지난 5월 미 국무성 초청으로 '인터내셔널 비지터 리더십 프로그램'(IVLP)에 참가, 미국의 대외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을 두루 만날 기회가 있었다. 7명으로 구성된 방미단에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국회의원 보좌관들과 학자·기자 등이 참가했는데, 대체로 보수와 진보 성향이 수적으로 균형을 이뤘다.
첫 방문지 워싱턴에서 대북 적극 협상론자로 잘 알려진 한 인사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그는 "미국의 비핵화 추진 정책은 지속되겠지만,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제한적으로나마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북한의 '핵 포기'는 북미관계 정상화와 경수로 제공이라는 조건이 충족돼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소량의 핵무기 보유 위협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논리였다.
워싱턴의 '북한 핵무기 보유 인정론'
우리 일행 가운데 특히 한나라당 보좌관들을 비롯한 보수 성향의 참가자들은 그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이명박 정부가 막 출범한 당시 상황에서 미국의 대북정책이 실제 그런 방향으로 간다면 한-미간 갈등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국의 북핵 보유 인정은 한국에 큰 재앙이 될 것"이라고 즉각 반박했다.
그러나 미국측 인사는 "압박을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던 조지 부시의 정책은 이미 실패로 끝났다"고 단언하면서 "현재 아무도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실제 정책은 그렇게 가고 있다"고 거듭 주장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핵무기 보유 인정론'은 미국 내 진보진영 일각의 견해로 치부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다음 방문지인 뉴욕에서 우리 일행은 더 큰 충격에 맞닥뜨렸다. 이번엔 스스로 리퍼블리컨(공화당 지지자)을 자임하는 보수 성향 인사로부터 거의 같은 맥락의 견해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 인사는 "부시가 북한을 핵무기 보유국으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천천히 가고 있는 것 같다"면서 "개인적으로도 일단 핵물질 확산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우리 일행 사이에서 다시 "북한 핵 인정은 동북아 전체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라는 반론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이 인사는 "그럼 현실적으로 대안이 있으면 가르쳐달라"고 우리에게 반문했다. 북한이 보유한 핵을 즉각 제거하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전쟁밖에 없는데, 한국이나 동북아 국가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 시점에서 차선은 북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하되, 투명성을 갖춰서 위치 알리고, 생산 중단하고 수출하지 않는다는 확인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신고 시설' 검증 양보가 의미하는 것
조지 부시 행정부가 11일(미국 현지시간) 북한을 테러지원국 지정에서 해제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잠정 인정하는 방향으로 대북정책이 확실한 가닥을 잡았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방향은 2006년 10월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 직후 독일 베를린에서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간 '직접 협상'이 이뤄지면서 이미 예견됐던 것이지만, 그 동안 강온파간 갈등으로 계속되던 여진도 사실상 정리됐다고 볼 수 있다. 지난 5월 워싱턴과 뉴욕에서 감지한 분위기가 현실화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지난 6월26일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 방침을 밝혔음에도 이후 협상이 다시 파국 일보 직전까지 치달았던 이유는 이른바 '미신고 시설'에 대한 검증을 둘러싼 입장 대립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은 북한이 제출한 검증계획서에 신고된 시설뿐만 아니라 미신고 시설도 검증 대상으로 해야 하며, 북한에게 거부할 권리를 줘선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북한은 이 같은 요구가 주권국가에게 무리한 굴복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반발해왔다.
북미는 결국 미신고 시설에 대해서는 '상호 동의 하에 검증이 이뤄지도록 한다'는 데 합의했다. 따라서 북한이 동의하지 않는 시설은 검증이 어려게 됐다. 미국은 플루토늄뿐만 아니라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핵학산 활동 등 "미국이 추구했던 모든 요소가 핵 검증 패키지에 포함됐다"는 점을 내세웠지만, 결과는 미국측의 일방적 양보이며, 북한측의 '판정승'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미국은 사실상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잠정 인정한 상태에서 새로운 협상전략을 수립해 나가야 하는 입장이 됐다. 이번 결정으로 사실상 '돌아오기 힘든 다리'를 건넌 것이다.
게다가 이런 흐름은 차기 정권으로 바통이 넘어가면서 더욱 가속도가 붙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달 대선에서 당선이 유력시되는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가 이번 조치를 "적절한 대응"이라며 환영하고 나오고, 공화당 후보인 존 매케인은 오히려 우려를 표명한 것은 상징적인 장면이다.
'군사적 위협'-'신뢰의 위기' 동시 증대... 현실 방치하는 정부
미국의 이번 대북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결정으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중대한 기로에 섰다. 이 정부의 대북정책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비핵개방 3000 구상'으로 명명되어 있다. 즉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하면 대북지원을 통해 10년 내에 GDP를 3000달러까지 끌어올려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라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북한은 원칙적으로는 핵을 포기하겠다고 계속 말해왔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포기할 것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협상이 목표점에 도달하기까지는 앞으로 몇 년이 더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는 목표점에 근접하기 전에는 북한과의 교류와 협력을 일체 끊을 셈인가? 정권 초기에 혹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도 모르겠다. 미국 공화당 행정부를 잘 설득하면 납치문제에 매달려있는 일본과 함께 튼튼한 한미일 공조를 이뤄서 북한을 압박해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거란 계산을 했을 것이다.
지금의 꽉 막힌 남북관계가 그런 초기의 구상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 정부 당국자들은 북한이 남북대화를 거부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정권 인수인계 과정에서 이명박 정권 스스로 지난 10년간 축적된 남북관계의 신뢰와 대화채널을 스스로 걷어차버린 측면이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7월 11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비로소 "남북 당국간 전면적인 대화 재개"를 제안하면서 6·15공동선언과 10·4정상선언을 포함해서 "남북간 합의를 어떻게 이행해 나갈 것인지에 관해 북측과 진지하게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제안은 당일 발생한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에 파묻혀 빛이 바랬다.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사실상 잠정 인정하는 결정을 내린 상태에서 '비핵개방 3000 구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미국의 차기 정권이 대북협상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핵개방 3000 구상'은 현실적으로 이미 파산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북정책과 통일방안을 다시 세워서 국민 앞에 제시해야 한다. 이런 어정쩡한 자세로 계속 간다면 우리는 한반도의 운명을 북미협상에 내맡기고 그 뒤치다꺼리 비용이나 대는 한심한 처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이명박 정부 출범 후 8개월 동안은 북한의 '핵 보유국' 위상은 점점 강화되면서 남북간 신뢰가 무너져가는 과정이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군사적 위협과 신뢰의 위기가 동시에 증대하는 것은 안보 면에서도 최악의 시나리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