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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0일부터 27일까지 7박 8일간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이 진행하는 '글로벌 비즈니스 교육프로그램- 중국연수'에 다녀왔습니다. 연수에는 30여 명의 문화예술인과 문화산업업체 임직원 등이 참여했습니다. 중국 산둥성과 상하이시에서 보고 듣고 느낀 중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일정에 따라 몇 차례에 나눠 연재합니다...<기자 주>

중국 산둥성 즈보시에 있는 제나라역사박물관. 글씨는 장쩌민이 썼다.
 중국 산둥성 즈보시에 있는 제나라역사박물관. 글씨는 장쩌민이 썼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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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를 마치고 칭다오(靑島)의 호텔을 떠났다. 월요일 오전 출근시간이라 그런지 도로는 차량으로 붐볐다. 시내를 벗어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다만 자전거들은 길 양 옆으로 마련된 자전거 전용도로로 신나게 달렸다. 칭다오의 경제 수준이 높기 때문일까. 다른 도시에 비해 자전거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았다.

"중국과 중국인을 하나로 이해하려고 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면적은 약 960만㎢. 국경 길이는 총 2만2117km로 세계에서 가장 길다. 22개의 성(省), 5개의 자치구, 4개의 직할시, 2개의 특별행정구에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지역과 민족에 따라 문화와 풍습, 기질과 언어가 다르다. 당연히 경제적 수준도 차이가 나고 그에 따라 사법 기준조차 달라진다.

"지린성(吉林省)에선 400위안 정도의 물건을 훔치면 감옥에 간다. 그러나 상하이(上海)에선 훈방 조처되고, 적어도 2000위안 정도는 훔쳐야 감옥에 간다. 또한 신장성(新疆省)에선 남자들이 칼을 차고 다니는 게 관습이라 괜찮으나 산둥성(山東省)에선 15일 구류를 살아야 한다."

여러 민족이 한울타리 안에서 '따로 또 같이' 공존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 그 바탕에는 그 같은 나름의 합리성이 작동하고 있었다.

'식객 삼천' 맹상군과 "부꺼치(不客氣)"

여행 중 찾은 중국식당은 모두 회전식탁으로 돼 있었다. 사진은 취푸의 한 식당에서.
 여행 중 찾은 중국식당은 모두 회전식탁으로 돼 있었다. 사진은 취푸의 한 식당에서.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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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가 넘어 제(齊)나라 문화의 발상지인 즈보(淄博)시에 도착했다. 마침 점심 때라 식당에 먼저 들렸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회전 식탁 위에 음식이 올려졌다. 유중하 교수(연세대 중문학과)가 '식객(食客) 3천명'을 두었었다는 제나라 재상 맹상군(孟嘗君)의 일화를 들려줬다.

'맹상군이 일찍 객을 대접하며 저녁밥을 먹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불빛을 가렸다. 객은 밥이 같지 않다고 노하여 밥을 먹지 않고 나가려고 했다. 맹상군이 일어나 스스로 자신의 밥그릇을 들고 객의 밥과 비교해 보이니 객이 부끄러워 스스로 목을 찌르고 죽었다.'

유 교수는 "회전 식탁이면 그런 시비할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렇다고 설마 맹상군의 그 일화 때문에 회전 식탁이 생겨났을까. 어쨌든 식사를 마치고 용기를 내 식당 종업원에게 "셰셰(謝謝)"라고 말했다. 바로 "뿌꺼치(不客氣)"라고 대답이 돌아왔다.

'뿌꺼치'는 중국 여행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우리말로 하면 "천만에요" "별말씀을" 정도가 될 터.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손님처럼 느끼지 말라, 즉 바로 당신이 주인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식객 삼천' 맹상군의 후손다운 인사법이다.

강태공이 세운 나라, 그 조상은 동이족의 한 가지

중국 산둥성 즈보시 제나라역사박물관 앞에 세워져 있는 '제(齊)'자의 원형에 가까운 조형물. 언뜻 보면 축구 골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중국 산둥성 즈보시 제나라역사박물관 앞에 세워져 있는 '제(齊)'자의 원형에 가까운 조형물. 언뜻 보면 축구 골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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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목적지인 제나라역사박물관(齊國歷史博物館)으로 향했다. 즈보의 동쪽에 있는 린즈(臨淄)는 제나라의 도읍이었다. 성벽 모양의 박물관은 생각보다는 아담했다. 박물관 앞뜰에는 문 위에 깃대를 꼽은 모양인 '제(齊)' 자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제국역사박물관'이란 글씨는 역시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작품이었다.

입구 부근은 '은상시기(殷商時期·BC 16 - 11C)'의 유물로 꾸며놓았다. 안내문에는 한자로 '商部落本是東夷族的一支'라고, 한글로는 '상부락은 원본 동이족이다'라고 씌어 있었다. 동이족? 우리가 바로 동이족의 후손들이 아닌가.

제나라를 세운 강태공의 반신상.
 제나라를 세운 강태공의 반신상.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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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옛날 황해는 바다가 아니라 육지였다고 한다. 동북의 만주 일대, 한반도 그리고 산둥반도 등이 동이(東夷)의 지역적 토양이었다. 이 지역이 바다로 나뉜 것은 구석기 말이었다. 산둥지역, 산둥인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조금 더 들어가자 춘추시기(春秋時期·BC 770-476)가 시작되며, 그 한 곳에 강태공(姜太公)의 반신상이 놓여있다. 제나라는 강태공이 주(周)나라 무왕(武王)으로부터 받은 봉토(封土) 위에 세운 나라다. 한때 바늘 없는 낚시로 세월을 낚던 그는 동이족의 어진 습속(夷俗仁)을 바탕으로 최소한의 제도만을 정비해 3개월 만에 제나라를 세웠다.

계속해서 안자(晏子), 관자(管子)와 제환공(齊桓公), 묵자(墨子)와 순자(荀子) 등의 반신상과 안내문들이 나타났다. 관자, 즉 관중(管仲)은 포숙(鮑叔)과의 우정으로 '관포지교(管鮑之交)' 고사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옆자리엔 포숙 대신 그가 받들었던 제환공의 반신상이 놓여 있었다. 그렇다고 친구간 우정보다 군신간 충의(忠義)가 더 중요하다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체관람을 온 중학생들이 <손자병법>을 지은 손무 상을 바라보고 있다.
 단체관람을 온 중학생들이 <손자병법>을 지은 손무 상을 바라보고 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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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다른 방 한 쪽에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지은 손무(孫武)와 그의 손자 손빈(孫臏)의 반신상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우리는 과연 중국을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축구 발상지'의 공한증

미니어처로 제나라 도읍 당시의 린즈 시가를 재현해놓았다.
 미니어처로 제나라 도읍 당시의 린즈 시가를 재현해놓았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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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300여건의 유물과 모형, 조각, 사진, 도표 등이 800년 제나라의 흥망성쇠를 보여주고 있었다. 7만 호의 가구가 있을 정도로 번성했던 린즈의 당시 마을 풍경을 점토 미니어처로 재현해 놓은 곳도 있었다.

마침 단체관람을 온 중학생들의 재잘거림에 떠밀려 다니다 보니 다소 희한한 광경을 연출해 놓은 미니어처들이 눈에 들어왔다. 옛 복장을 한 사람들이 축구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안내문에는 바로 이곳이 축구의 기원인 '축국(蹴鞠 - '축'은 발로 찬다는 뜻이고, '국'은 가죽으로 만든 공을 뜻한다)의 발상지로 소개돼 있다. 그리고 보니 앞뜰의 '제' 자 조형물도 축구 골대를 연상시켰다.

다른 한 벽면에는 2004년 블래터 FIFA 회장이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설명과 함께 지도 위에 중국에서 이집트, 그리스, 로마,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이어지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기도 했다. 이른바 축구 전파도인 셈이다. 믿거나 말거나.

축구의 원형이라는 '축국'을 하는 모습을 미니어처로 재현해놓았다.
 축구의 원형이라는 '축국'을 하는 모습을 미니어처로 재현해놓았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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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은 2018년 월드컵 유치를 위해 분주하게 뛰고 있다. 2005년엔 '축구 발상지'라는 린즈에 축구박물관도 건립했다. 월드컵을 유치할 경우 2008년 베이징올림픽, 2010년 상하이엑스포에 이어 지구촌 3대 이벤트를 모두 치러내는 셈이다. 중국인들이 '공한증(恐韓症)' 운운하며 한국과의 축구 승부에 왜 그렇게 열을 올리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자 한 여중학생도 밝게 웃으며 함께 손을 흔들었다. 당연히 그들에게 '공한증'은 없었다.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자 한 여중학생도 밝게 웃으며 함께 손을 흔들었다. 당연히 그들에게 '공한증'은 없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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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음악에 빠져 석달 동안 고기 맛을 잊다

박물관을 떠난 버스는 얼마 안 돼 부근의 작은 시골마을로 들어섰다. 공자(孔子)가 제나라에 와 순(舜) 임금이 지은 소(韶)라는 음악을 듣고 감동해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잊었다'는 '공자문소처(孔子聞韶處)'가 있는 곳이었다.

공자는 위대한 사상가이자 뛰어난 음악가였다. 어릴 때부터 여러 악기를 가지고 놀았고, 10대 때는 혼례나 장례의 악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20대 때는 노나라 궁정 악사 사양자(師襄子)에게서 거문고(琴)를 배웠고, 30대 때는 낙양(洛陽)을 찾아 장홍(萇弘)에게서 왕실음악을 배웠다. 특히 사양자에게서 거문고를 배울 때는 곡조만을 듣고 그 음악이 그리고 있는 인물의 피부 색깔과 얼굴 생김새까지 알아맞힐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공자문소처. 공자가 순임금이 지은 '소(韶)'라는 음악을 듣고 석달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잊었다는 곳이다.
 공자문소처. 공자가 순임금이 지은 '소(韶)'라는 음악을 듣고 석달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잊었다는 곳이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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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시기에도 제자들에게 음악 가르치기를 멈추지 않았던 공자는 예(禮)와 함께 악(樂)을 사회 질서의 두 축으로 삼았다. '음악이란 천지의 조화이며 예란 천지의 질서이다(樂者 天地之和也 禮者 天地之序也).' 그렇듯 공자는 단지 음악 소(韶)를 들었던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순임금이 이룬 태평성대, 천지의 조화를 보았던 것이다. 그가 석달 동안 고기 맛을 잊은 것도 당연했다.

'공자문소처'는 의외로 소박했다. 검은 벽돌담 안 중앙 벽에 '공자문소처'란 글자가, 왼쪽에는 공자가 '소'를 듣고 있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박재동 화백이 그 앞에서 너울너울 춤을 췄다. 일행 중 한 명이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그러다 석달 동안 고기 맛을 잊으시면 어쩌시려구요."

'공자문소처'를 나오다 한 컷. 저분들의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겉으로 드러난 풍경은 요순 시절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였다.
 '공자문소처'를 나오다 한 컷. 저분들의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겉으로 드러난 풍경은 요순 시절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였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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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와 닮은 '곡예'

버스가 지난(濟南)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가 넘었다. 퇴근 시간인지 4차원 도로가 자동차로 가득했다. 도로 양옆엔 역시 자전거 전용도로가 마련돼 있었다. 약속 시각에 늦었다. 중국인 기사는 계속 자동차 경적을 울려댔다. 유중하 교수는 "산둥인은 성질이 급한 편"이라며 "아마 경적을 제일 많이 울리는 곳이 산둥일 것"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그 덕분에 그리 늦지 않게 약속 장소인 산둥사범대학에 도착했다. 산둥사범대 동북아문화발전연구센터 관계자들과 대학생들이 미리 나와 우리 일행을 환영했다. 그들은 우리를 한 공연장으로 안내했다. 대학 건물 로비에는 공자 흉상이 놓여 있었다.

중국의 곡예는 우리의 판소리와 비슷했다.
 중국의 곡예는 우리의 판소리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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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주나라 초기부터 전해오던 3000여 편의 시가 가운데 305편을 간추려 <시경(詩經)>을 편찬했다. 특히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국풍(國風)은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불려지던 노래였다. 당연히 국풍에는 당시 백성의 삶과 정서와 소망이 담겨 있다. 남녀간 정한을 그린 노래가 많으나 현실의 정치를 풍자하고 학정을 비판하는 노래도 적지 않았다.

그럼 공자 이후의 백성들은 어떤 노래, 예술을 즐겨왔을까. 지난곡예단에서 우리 일행을 위해 작지만 알찬 곡예 무대를 펼쳐 보였다. '국풍'이 우리의 민요에 해당한다면 곡예(曲藝)는 판소리와 비슷했다. 판소리처럼 창과 아니리(이야기), 발림(몸짓)이 어울렸다. 이야기와 노래가 함께한다고 해서 설창(說唱)으로도 불린다고 했다.

판소리와 다른 점도 있었다. 먼저 판소리는 1명의 소리꾼과 1명의 고수가 판을 이끌어가는 데 비해 곡예는 연희자나 반주자의 구성이 작품마다 달랐다. 또 판소리는 작품별로 큰 형식 차이가 없는 데 비해 곡예는 만담 위주의 상성(相聲), 노래 위주의 고곡(鼓曲), 1인극에 가까운 쾌판(快板), 구연 위주의 평서(評書) 등으로 다양했다.

무송은 호랑이를 어떻게 때려잡았는가


경극(京劇)과는 달리 곡예는 저자거리에서 일반 백성들이 즐기던 예술이었다. 내용에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그들의 사소한 일상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그런 통속성 때문에 곡예는 일반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환영을 받았으나, 지배층로부터는 '소시민의 문예' '저속한 문예'로 천시받아오기도 했다. 지금은 인기 만담가의 경우 중국 갑부 대열에 들 정도라고 한다.

지난곡예단은 9편의 작품을 선보였다. 장사를 망친 술장수가 자신의 술을 마시고 취한 광경을 그린 '마대보 술 취하다', 몰래 떡을 훔쳐 먹다가 시어머니에게 들킨 며느리의 소동을 그린 '설 떡 도둑질', 그리고 <수호지>의 무송이 호랑이를 때려잡는 상황을 연기한 작품들이 연행됐다.

'무송, 호랑이를 잡다'(武松打虎)의 연희자는 호랑이의 기척을 살피던 무송이 살금살금 다가가 펄쩍 뛰어올라 갖은 무술을 사용해 호랑이를 때려잡는 장면을 박진감 넘치게 연기했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표정과 음성과 동작만으로도 상황과 감정과 의미가 그대로 전해졌다.

지난곡예단의 한 곡예 연희자가 '무송이 호랑이를 잡다'를 들려주고 있다. 그 표정과 몸짓이 살아 있다.
 지난곡예단의 한 곡예 연희자가 '무송이 호랑이를 잡다'를 들려주고 있다. 그 표정과 몸짓이 살아 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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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 흥미롭게 공연을 지켜본 박재동 화백은 "우리의 판소리는 슬픔과 애환이 깊은 데 비해 중국 곡예는 무엇보다 시종 즐겁고 해학적인 것 같다. 즐거워야 지배자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일까"라는 감상평을 내놓았다.

이웃나라에서 온 방문객을 위해 짧지만 멋진 무대를 선물해준 그들의 정성이 고마웠다.

한국을 배우는 중국 유학생들

곡예를 감상하고는 같은 건물의 5층, 중한합작 국제상학원(國際商學院)의 강의실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중한합작국제상학원은 산둥사범대와 전주 우석대가 합작으로 2004년 이곳에 설립한 학교다. 2006년부터 학생 모집을 시작해 현재 학생(1~3학년)은 약 350명. 교수진은 한국인 13명, 중국인 15명으로 구성돼 있다. '국제무역학과' '유통학과'에 이어 지난해 '문화산업학과'를 추가로 개설했다.

일행 가운데 박재동 이희재 화백이 중국 산둥사범대 한중합작국제상학원 대학생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들은 서툴렀지만 한국말을 했다.
 일행 가운데 박재동 이희재 화백이 중국 산둥사범대 한중합작국제상학원 대학생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들은 서툴렀지만 한국말을 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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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상학원의 이학규 원장은 "일반 대학에 비해 등록금이 3배 정도 비싸지만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또한 함께 자리한 우석대 전홍철 교수는 "전주 우석대에 중국인 유학생이 900명이나 된다"며 "이런 (합작) 모델이 우리 지방대학이 사는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지난의 호텔 방안에 놓여 있던 <논어집주>.
 중국 지난의 호텔 방안에 놓여 있던 <논어집주>.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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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자료에 따르면 국내 중국인 유학생의 수는 4만1천여 명으로 전체 유학생의 약 48%를 차지하고 있다. 또 지난해 중국 내 유학생 19만5천여 명 중 한국인 유학생은 6만4천여 명으로 전체의 1/3에 이르고 있다. 두 나라 모두에서 서로 가장 높은 비율이다.

유학의 목적과 성격이 다양한 만큼 유학을 무조건 반길 수는 없다. 또 체제와 문화의 차이로 갈등이 종종 불거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부딪히면서 서로를 조금 더 알아가고, 또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

저녁식사를 마치고 밤늦게 숙소인 산둥호텔에 들었다. 로비에 타이산(泰山)을 그린 대형 액자가 높다랗게 걸려 있다. 방 안 탁자 위에는 목재상자 안에 <논어집주(論語集注)> 상·하 권이 들어 있었다. 가격은 110위안. 내일 드디어 '하늘 아래 뫼'인 타이산을 오르고, 공자의 고향인 취푸(曲阜)를 찾을 예정이다. 중국연수 셋째 날이었다.


태그:#중국연수, #공자문소처, #제나라역사박물관, #곡예, #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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