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하고 청명한 가을의 중간이다. 창 밖으로 쌀랑한 가을 날씨가 문 안의 마음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데 주위에 걸리는 것이 너무 많다. 잡다한 집안 살림이며 휴일이라고 종일 들락날락이는 아들이며, 그래도 마음은 자꾸 창밖에 나가 있다.
문득 문자를 날렸다. ‘딸, 날씨가 넘 좋다. 나는 코스모스 보러간다.’ 문자를 찍어놓고 보니 겨우 딸에게 내 마음이 가 있었다. 금방 답이 온다. ‘엄마. 나두 델꼬 가’ 나는 얼른 문자를 꾹꾹 눌렀다. ‘ㅋㅋ 울 딸. 니도 이 날씨에 방콕은 못하지. 그래. 니네 집에 들려서 델꼬 갈게 ㅎㅎ’
이제 갓 돌 지난 아이가 있는 딸이다. 딸이 사는 아파트에 차를 대니 아장아장 걷는 꼬맹이를 앞세워 딸 자매와 셋이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안녕, 송아야.”내게는 첫 손주인 송아다. 그런데 자주 만나지 않아서 지금도 낯가림을 한다. 그래서 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오늘은 한참 만에 보는데도 웃는 얼굴로 나를 대하는 것을 보고 막내딸이 말한다.
“어, 엄마, 송아가 엄마를 보고 반색을 하네.”
한다. 사실 나는 이녀석이 좀 밉살스러울 때가 있다. 우리 막내딸인 제 이모는 저와 같이 살아서 제 엄마 다음으로 좋아하는데 모처럼 만나는 나에게 낯을 가리니 사랑을 표현해주고 싶어도 잘 안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멋진 코스모스 꽃길에서 그 동안 못 나누었던 사랑을 돈독히 해두어야겠다는 마음을 잔뜩 먹고 차를 달렸다.
관곡지를 지나 연밭을 가서 차를 세웠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연밭과 코스모스 꽃길을 걷고 있었다. 우리들도 서둘러 연밭을 들어섰다. 연밭엔 가을이 잔뜩 내리고 있어서 누른빛이 가득하다. 부지런히 연밭을 지나 코스모스 꽃길을 들어섰다.
“우와. 엄마 나는 시흥시에 살아도 어디를 다녀보지 않았는데 여름에 연밭이 무지 좋았겠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꽃길이 있는 줄은 몰랐어.”
“그래. 이렇게 좋은 데가 한 두 군데인 줄 아니. 시흥시가 지금은 참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 철마다 볼거리가 참 많아.”
송아는 코스모스 꽃길에 들어서자 제 세상인 듯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꽃에 다가가 꽃잎을 만져보기도 하고 뜯어보기도 하고 앞 뒤 사람들을 눈 여겨 보기도 하며 낯선 듯 하다가 길가로 아장거리며 앞서가기도 하는 모습이 천진스럽기만 하다. 오늘 송아의 아장거리는 발걸음은 가녀리게 꽃대 올리고 휘어질 듯 말듯 피어있는 코스모스가 있는 가을날 꽃길과 꼭 어울리는 컨셉이다.
송아에겐 세상에 나서 처음 만나는 꽃길이다. 낯설지만 이 아름다움에 젖어 저물녘 가을햇살에 비치는 붉은색 도로와 끝도 보이지 않게 피어있는 코스모스와 파란 하늘과 저에게 보내는 가족들 사랑의 눈길 속, 그 풍경 어디 쯤 서있던 기억이 아마도 오랫동안 환하고 고운빛깔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길가에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는 송아의 이 모습이 왜 이렇게 아름다워 보이는지 마음이 짜안하게 곤두선다.
한껏 만개한 코스모스 꽃길을 보니 몇 년 전 공부방 아이들과 이 꽃길을 왔던 생각이 난다. 그 때는 자전거 길이 아닌 농로였는데 지나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아이들과 꽃길에 앉아서 꽃 이야기도 하고, 꽃길을 걸어보고 땅바닥에 철버덕 주저앉아 공책을 길바닥에 펴놓고 글을 쓰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철버덕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장난을 쳐도 지나는 사람이 없어서 그때의 꽃길은 우리들만의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그 때와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잘 깔아진 자전거 도로에 끝도 보이지 않게 핀 코스모스 꽃길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오고 간다. 휘어진 도로에서 생태공원쪽을 바라보니 호조벌 보통천을 따라 생태공원까지 이어진 자전거 도로를 따라 맘껏 피어있는 코스모스꽃길이 마치 한 폭의 그림같다. 코스모스 한 송이로 보아서는 절대 이런 그림이 안나오는데 꽃길이 너무 아름답다.
꽃잎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저녁햇살에 섬세한 잎맥이 빛나고 있다. 이런 가녀림 속에서도 그 긴 계절을 이기고 피어나 아름다움을 주는 코스모스를 가리켜 ‘코스모스에겐 가녀림의 미학이 있다.’라고 하면 될까?
한 송이를 볼 때 절대로 꼿꼿하지 않을 듯 보이지만 봄을 지나고 여름이 지나면서 연약한 줄기에 힘을 받아서인지 휘어질 듯 하면서도 꼿꼿하게 서서 꽃을 피우고 가을길을 밝혀주고 있다.
이 꽃길에서 유난히 많이 볼 수 있고 싱그러운 풍경이라면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리는 사람들이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꽃길을 걷는 내내 마음은 그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있었다. 언젠가 나도 자전거를 배우려고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연습을 하다가 넘어져서 무릅을 다치고 나서 그만두었는데 지금 나는 슬슬 자전거를 다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참 많은 자전거를 만나는 날이었다.
석양을 받은 자전거도로 코스모스 꽃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혹은 친구들과 동호회원들과 함께 코스모스 정취에 빠져 거닐기도 하고 코스모스 속에 들어 사진을 찍기도 하며 끊이지 않고 가을 추억을 만들고 있다.
이제 멀리 가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좋은 풍경들이 곁에 있어서 시흥에 사는 일이 즐겁다. 아마도 이 꽃길을 걷는 사람들도 이런 마음으로 이 가을 꽃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하얗고 붉고 핑크빛으로 가을길을 밝혀주고 또한 쓸쓸해지는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코스모스 꽃길에서 사람들은 고된 삶의 일부를 희석 시키고 편안한 일상으로 살아간다면 벌판을 지키고 있는 코스모스들에게 훈장이라도 내려야 할 건 아닌지 모르겠다.
코스모스가 한껏 어울어져 있는 꽃길에서 아직도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세상의 길을 짚어본 송아는 이제 힘이 들었는지 엄마품에 안겨서 잠들고 있다. 아마도 꿈속에서도 코스모스와 같이 환한 웃음으로 꽃가지 속을 헤치며 길을 걷고 있으리라. 아름다운 가을 꽃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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