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다인철소 출토 유물 각종 철제품
다인철소 출토 유물각종 철제품 ⓒ 중원문화재연구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철이 없다고 상상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다리며, 건물의 뼈대가 되는 철 구조물이며, 사사롭게는 조그만 열쇠조차도 철로 만들어진다.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철은 현대 사회뿐만 아니라 고대사회에서도 중요한 자원이었다.

그리하여 혹자는 철을 고대의 신소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청동기 시대를 거쳐 철의 가치와 유용성을 알게 된 고대인들은 이를 확보하기 위해 정복활동을 벌였고, 막강한 철제무기는 전쟁의 양상을 치열하게 만들었다.

철의 생산을 독점한 지배자의 권위는 더 상승했을 뿐만 아니라 철제공구의 보급으로 삼림의 대규모 벌채가 가능해지고 넓은 경작지를 효율적으로 경작할 수 있게 했으며 이는 생산력의 확대로 이어졌다. 즉 철을 지배하는 자는 권력과 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고대사회에서의 철은 국가 경영의 중요한 요소이자 고대국가형성의 요건이 되었다.

초강법의 비밀 드라마 주몽에서 초강법의 비밀을 후대에 알려주는 장면
초강법의 비밀드라마 주몽에서 초강법의 비밀을 후대에 알려주는 장면 ⓒ mbc

MBC 미니시리즈 “주몽”에서도 초강법을 알아내기 위해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는 대목이 있는데 이를 두고 주몽과 소서노가 고구려 건국의 투쟁사는 초강법을 알아내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의 역사라고 드라마 홈페이지 줄거리에서 설명할 정도이다.

지난 14일 고려시대 최대 철산지로 고려사,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 알려져 있었으나 유적의 성격이나 규모 등이 확인되지 않았었던 충주 ‘다인철소’가 지난 5월부터 중원문화재연구원이 발굴 조사한 결과 제철소인 야철 유적과 관련시설 및 유물 등이 확인되었다.

‘다인철소’라 함은 오늘날의 충주시 이류면(利柳面)을 가리키는 곳으로 이 지역은 일찍부터 철이 풍부하게 매장되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중기부터 이안면(利安面)으로 변경되었는데 아마 발음상 익안(翼安)이 이안(利安)으로 변화되어 불린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하고 있으며 이후 1914년 유등면과 합하여 이후 이류면(利柳面)이 되었다.

이번에 조사된 곳은 다인철소의 중심지로 전해져오는 노계마을(마을유래비가 존재함) 서북쪽 낮은 구릉지역의 일부 도로 관통개설 구역으로 철기의 생산과 관련된 유구와 연료와 관련된 숯가마, 공방터, 조선시대 민묘 등이 확인되었다.

철재(鐵滓, Slag) 퇴적층에서 해무리굽 청자와 고려시대 그릇과 기와조각들이 출토되어 시대가 고려 때 경영된 유적임이 확인할 수 있다. 출토된 유물은 솥 3점, 정(鼎 ; 3개의 다리가 달린 솥) 2점, 보습, 쇠도끼, 쇠낫이 확인되었다. 특이할 만한 점은 솥 안에 다량의 철제품 조각들을 가득 담아놓은 채 출토되었는데 어떤 연유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충주대몽항쟁전투도 다인철소사람들의 대몽항쟁전투 장면
충주대몽항쟁전투도다인철소사람들의 대몽항쟁전투 장면 ⓒ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고려 충렬왕 3년(1277) 4월에 몽고에서 환도(還刀) 천 자루를 요구하자 조정에서는 이를 충주에서 주조하게 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때 바로 익안현(다인철소)에서 생산케 했는데.
철이 풍부했던 충주는 무기류의 제작뿐만 아니라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수륙 양면 교통의 요지라는 지리적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철을 생산하여 육로나 수로를 통해 각 지방으로 군수를 조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몽고군 또한 알고 있어 끝까지 충주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내륙으로 침입한 상황에서 전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무기류의 공급이 중요했기 때문에 철산지와 기술자가 모여 있는 충주의 익안현이 중요한 목표물이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문헌을 보면 고려사 지리지 충주목에 “고종 42년(1255) 다인철소 사람들이 몽고병을 막아내는데 공로가 있어서 소를 익안현으로 승격시켰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소(所)는 고려시대의 특수 행정구역으로 다인철소에서의 철소(鐵所)는 생활 도구 혹은 무기류의 제작에 필수적인 철을 생산하거나 제작하는 곳이었다. 여기에는 많은 노동력과 일정한 특수 기술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특정지역이 이를 전담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이러한 다인철소에서 고종 42년 몽고군의 침입에 저항한 항몽전투가 일어났고 이를 다인철소 사람들의 공으로 막아 소(所)를 올려 익안현(翼安縣)으로 승격한 것이다.

이번 발굴의 성과는 문헌기록은 남아있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실증적 유물이 없었던 터에 역사적 기록이 증명되는 또 하나의 사례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충주#다인철소#철산지#역사#문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 문화, 문화유산, 박물관, 미술관, 여행, 책, 삶에 관한 글을 씁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