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이름 :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
- 글쓴이 : 정혜진
- 펴낸곳 : 녹색평론사 (2007.11.7.)
- 책값 : 1만 원
(1) 내가 찾는 길
옆지기가 스탠 냄비를 장만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노래하기에, 개수대 밑에 쟁여 놓기만 하고 안 쓰던 스탠 냄비를 꺼냅니다. 혼자 살던 예닐곱 해 앞서, 옛동무와 어머니한테서 받은 스탠 냄비인데, 혼자 먹고살면서 쓰기에는 크고 무겁다고 느껴서 고이 모셔 두기만 하고 있었는데, 이 냄비들을 꺼내니 옆지기가 깜짝 놀랍니다. 왜 이 좋은 스탠 냄비를 여태 쓰지 않고 그렇게 두었느냐고.
뒤통수를 긁적입니다. 어떤 냄비를 써야 하는가를 잘 몰랐고, 냄비 하나가 우리 밥차림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를 제대로 살피지 않아 왔습니다.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모르기도 했으나, 저 스스로 알아보려고 하지 못했습니다.
선물해 주는 냄비는 으레 값비싼 녀석이었습니다. 저는 늘 값싼 냄비를 쓰고 있었습니다. 혼자 살면서 저 비싼 녀석을 쓸 까닭이 없으리라 생각했고, 또 아깝다고 여겼으며, 선물 받은 모양새 그대로 모셔 두기만 했습니다.
그동안 쓰던 양은 냄비며 법랑 발린 지짐판이며 모두 개수대 밑으로 들어가고, 이제까지 개수대 밑에서 잠자던 네다섯 개나 되는 스탠 냄비가 밖으로 나옵니다. 전기밥솥도 그만 쓰기로 하고 냄비로 밥을 하고, 기름을 두르지 않고 달걀을 부치고 볶음밥을 합니다.
물을 안 넣고 감자와 고구마를 찝니다. 찐빵을 찌거나 구울 때에도 물을 붓지 않고 기름을 두르지 않습니다. 찌개를 끓일 때 스탠 냄비는 훨씬 빨리 달궈지고 더욱 오래 따뜻함이 이어갑니다. 끼니에 맞춤하게 짓는 밥은 여태까지 먹던 밥맛과는 견줄 수 없이 맛있습니다.
..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거나 절약하는 행위는 지역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든다. 에너지를 덜 쓰려면 외곽에 있는 쇼핑몰보다 동네 슈퍼를 자주 이용하게 된다. 혼자 차를 운전하는 것보다 이웃 혹은 직장 동료와 카풀을 하면 에너지를 보다 효율적으로 쓰게 된다. 좀더 걷고 자동차를 덜 쓰면 자신의 건강을 챙기고 지역 상권이 활성화되고 지역사회 전체적으로는 공기가 더 맑아지며 교통 혼잡 비용이 줄어든다.
절약해서 남는 돈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기면 지역사회 전체 문화 수준도 올라간다 … 거대 기업이 들어와서 단지 사업의 목적만을 위해 옥수수를 싹쓸이할 때에는 농산물값 폭등까지 이어지지만, 도시 공동체 사람들의 삶의 양식도 함께 바뀔 때에는 노는 땅이 에너지 작물을 키우는 땅이 되고, 깨끗한 기름을 쓸 수 있고, 폐기름을 줄이게 되며, 공기도 깨끗해진다는 것이다 .. (6, 62쪽)
곰곰이 돌아봅니다. 내가 바꾸지 못한 삶은 무엇이고 내가 바꾼 삶은 무엇인지. 나는 어디에 마음을 기울이고 어디에는 마음을 못 기울이고 있는지. 내 스스로 바꾸지 못하겠다며 손을 흔드는 삶은 무엇이고, 미처 깨닫지 못할 뿐 바꾸려 한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삶은 무엇인지.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라는 책에 ‘자동차 별거기’라고 해서 나이먹은 분으로서 자동차를 멀리하고 자전거를 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고 보면, 저도 자전거 타기만큼은 좀더 찬찬히 생각하면서 이 하나는 바꾸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살던 때, 신문배달로 먹고살며 짐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긴 했으나, 서울 시내 헌책방을 찾아나설 때에는 전철을 탔습니다. 이문동에서 안암동까지는 자전거로 갔어도, 혜화동이나 종로부터는 전철로 움직였습니다. 아직 서울이 낯설기만 한 시골도시 사람은 짐자전거로 멀다고 느껴지는 길을 선뜻 나서지 못했습니다.
다섯 해쯤 서울에서 지내다가 신문배달을 그만 두고 출판사로 자리를 옮기니 자전거하고 멀어집니다. 집과 일터가 퍽 멀기도 했지만(동대문구 이문동에서 강서구 방화동) 자전거로 오가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신문배달 하던 때에는 달삯이 아주 적기는 했어도 내 자전거가 있었기에 따로 자전거 장만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니 내 자전거는 없으나 일삯은 예전과 견주면 일고여덟 갑절이라서, 살림돈 십만 얼마와 책값과 필름값 삼십만 원을 빼고 모두 은행에 맡겼고, 자전거 없이 보내던 삶은 오래지 않아 끝내고 처음으로 제 돈을 주고 제 자전거를 장만합니다.
자전거를 장만하면서 서울시내 꼼꼼길그림도 함께 장만하면서 길을 눈에 익힙니다. 이제는 전철이 아닌 자전거를 몰며 헌책방 나들이를 다닙니다. 종로구 평동에서 신촌으로 오가는 길은, 전철은 빙 돌아서 가는데다가 버스 타는 곳은 집에서 너무 멀어서 으레 사십 분이나 걸리곤 했는데, 자전거로 움직이니 짧으면 8분, 길어도 12분이면 넉넉했습니다. 이제, 웬만한 곳은 모두 자전거로 움직이는 버릇이 붙고, 대중교통인 버스나 전철마저 가까이하고픈 마음이 조금씩 사라집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인천에서도, 옆지기와 함께 돌아다닐 일이 아니라면 혼자서 자전거를 몰고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인천과 서울을 오갈 때에도 자전거를 타면 전철로 갈 때와 거의 같거나 좀더 빠릅니다(동인천에서 마포큰다리까지 50분, 광화문까지는 1시간 2분). 다만, 자전거를 타면 책을 못 읽을 뿐입니다.
그래, 이 하나, 자전거 타기만큼은 아주 잘 바꾸었다고 느낍니다. 모르는 일인데, 신문배달을 자전거로 했기 때문에 자전거 타기가 많이 익숙해졌고, 신문배달 짐자전거로 웬만한 오르내리막을 두루 꿰다 보니 자전거로 서울 시내 돌아다니면서 아무런 어려움을 못 느끼지 않았나 싶습니다.
.. ‘저탄소 도시’나 ‘친환경 에너지 도시’처럼 온실가스 배출 감축, 재생가능 에너지 보급 확대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도시에서의 삶의 방식 변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 지구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도시민은 지구 표면의 2%에서 자원의 75%를 소비한다 … 어떤 지자체에서는 화석연료의 안락에 길든 도시 생활을 바꾸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태양광 발전, 풍력 발전 설치에만 열을 올린다. 그런 단체장은 진정한 의미에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들은 아직도 ‘눈에 보이는 한 건’을 원하고 있다 .. (34∼35, 58쪽)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 자전거 다음으로는 옷이 있을까. 신문배달 하던 때에는 늘 헌옷 모으는 통에서 옷을 주워서 입었지(예전에는 옷 모으는 통이 열려 있었습니다). 또, 가까운 대학교에서 행사를 할 때마다 나눠 주는 옷을 슬쩍 끼어서 얻어입기도 하고(우리 신문 독자인 학생들이니까). 형이 안 입는 옷을 치수가 많이 크지만 고맙게 물려입기도 하고. 길에서 2000원에 파는 반바지 몇 벌 사다가 입고, 청바지 두어 벌은 길에서 5000원에 파는 녀석으로 장만했고. 출판사 사장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당신 아들내미가 안 입는 옷을 한 보따리 안겨 주기도 했고.
그 다음으로는 가게에서 주는 비닐봉지를 안 받고 천가방을 챙기며 다니는 버릇. 한 번 쓰고 버리는 나무젓가락을 새것으로 안 쓰고, 다른 이가 쓰고 버린 것을 주워서 씻어 말린 다음 가방에 챙겨넣고 다니면서 쓰는 버릇. 길바닥에 널부러진 종이조각이나 광고명함 주워서 책갈피로 쓰는 버릇. 둘레에 많이 버려지는 이면지를 내 공책이나 편지지로 삼는 버릇.
그리고 ……, 음, 세탁기 안 쓰고 손빨래 하기? 텔레비전 안 모시고 살기? 운전면허증을 아예 안 따기? 값싸고 질긴 고무신 신고 다니기? 음식물쓰레기가 아예 나오지 않게끔 포도알 포도껍질 사과알 사과속까지 냠냠짭짭 먹으면서 먹을거리 다스리기? 손전화기는 마르고 닳도록 쓰고 쓰다가 망가져서 더는 못 쓰게 되어서야 바꾸어 주기? 밑 닦을 때 휴지는 한 칸이나 두 칸만 쓰기?
.. 차를 타고 달릴 땐 사람들이 아닌 차만 보였던 걸까. 새로울 것도 없는 사람 사는 풍경이 마치 신기한 이국 풍경인 듯, 자가용을 타지 않는 나는 그동안 내 눈에 보이지 않던 풍경을 새삼스레 즐겼다 … 질적으로 검소한 것은 소비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지 않고 필요한 기술이나 서비스에 돈을 쓰는 것을 뜻한다. 무분별한 소비로 괜히 쓰레기만 만들지 말고, 창의적인 기술과 서비스에 제값을 지불하자는 것이다 .. (38, 65쪽)
다음으로, 무엇을 쓰고 사는가 손꼽아 봅니다. 무엇보다 첫째로는 책. 둘째로는 필름. 셋째로는 술. 넷째로는 ……, 넷째, 넷째가 있나. 모르겠네. 이밖에 돈 나가는 데라면 집삯과 전기삯과 물삯 따위인데. 몇 군데 시민단체에 보내는 돈 얼마, 길에서 만나는 동냥꾼한테 건네는 돈 얼마, 성당에 내는 돈 얼마.
그렇군. 쓸 데가 많지 않으니 처음부터 많이 벌 생각도 안 하는 듯하군. 출판사에서 일하던 때에는 비앙키 자전거 하나 갖고픈 꿈을 키웠는데, 이제 이 꿈은 이루지 못할 물거품이나 뜬구름이지. 아이를 키우려면 돈 부지런히 벌어야 한다지만,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을 뿐, 아이를 어디 학원에 넣을 일 없지 아이를 연예인처럼 예쁘장하게 꾸밀 일 없지 하니, 딱히 무엇을 더 쓰거나 누려야 할까 싶고.
그저 재개발이니 재생사업이니 하면서, 우리처럼 밑돈 없는 사람이 겨우 깃들어 사는 골목집을 밀어내는 정부정책이나 없으면 더 바랄 일이 없습니다.
.. 인도는 분명히 차를 위한 공간이 아닌데도 도시 곳곳의 인도들이 차들로 점령당하고 있다. 그래도 나는 신경질만 내고 나면 그만이다. 자전거에서 내려 잠시 차도로 내려갔다가 다시 인도로 올라가면 되니까. 그런데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나, 전동휠체어를 모는 노인들, 그리고 큰 유모차를 미는 엄마들은 … 걷다가 인도에 주차된 차들을 만나면 자전거를 탈 때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도대체 차를 이곳에 주차한 이 사람은 예의라는 게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일까 … 차를 몰든 안 몰든 똑같이 낸 세금으로 닦아 놓은 도로를 그들은 질주하면서, 역시 세금으로 만든 인도까지 그들이 점령한다. 똑같이 세금 내면서 차를 몰지 않는 이들은 도로에 세금 퍼주고, 차량으로 인한 대기오염은 공유하고, 인도까지 운전자들에게 점령당한다. 그런데도 인도를 점령한 운전자들은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 (148∼149쪽)
늘 골목마실을 하면서, 틈틈이 동네 이웃을 만나면서, 꾸준히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 맛보는 기쁨과 즐거움과 보람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느낍니다. 돈을 많이 움켜쥐고 있다고 해서 더 많이 누릴 수 있지 않다고 느낍니다. 5만 원짜리 자전거를 타든 50만 원짜리 자전거를 타든 500만 원짜리 자전거를 타든, 자전거 타는 기쁨은 매한가지입니다. 보증금 없이 10만원짜리 달삯집에 살든, 보증금 천만 원에 달삯 없는 집에 살든, 싯가 이십억짜리 아파트에 살든, 또 몇 억에 이르는 아파트에 살든, 사람 사는 모양새는 다를 바 없을 뿐더러 사람 사는 즐거움이 벌어지지도 않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니 자꾸만 남 앞에서 우쭐거리고픈 옷을 입고 차를 몰고 집을 얻지 않으랴 싶습니다. 마음이 허거프니 자꾸자꾸 남 위에 올라서면서 이웃나눔과 어깨동무하고는 멀어지면서 살지 않으랴 싶습니다. 마음이 메마르니 숱한 물질문명을 누리는 일이 세상 사는 기쁨인 줄 잘못 알면서, 자기 스스로 자기 몸마저도 망가뜨리지 않으랴 싶어요.
자가용 끌고 출퇴근하면서 ‘운동이 모자라’ 헬스클럽에 가는 일은 얼마나 자기 삶을 좀먹는 일인가요. 몸 갉아먹으면서 한 해에 억대 연봉을 받는 일을 한다지만, 이렇게 일하면서 갉아먹힌 몸을 추스르느라 적잖은 돈을 보양식에 쓰고 어디 물 좋고 공기 좋은데 놀러가서 쉬는데 쓰고 있으니, 고작 며칠은 쉴는지 모르지만 정작 훨씬 긴 자기 삶은 쉼없이 휘몰아치며 두 손에는 아무것도 안 남고 말지 않습니까.
더 빨리든, 더 많이든, 더 크게든, 누군가 더 천천히 가야 하기에, 또 더 적게 가져야 하기에, 또 더 작게 웅크려들어야 하기에 누릴 수 있습니다. 이웃을 눌러야 더 빨라집니다. 동무를 꺾어야 더 많아집니다. 살붙이를 멀리하거나 등쳐야 더 커집니다. 이와 같은 삶이, 이처럼 무언가 누리는 듯 보이는 삶이, 참으로 우리한테 도움이 되거나 웃음꽃이 피어나게 해 주고 있는지, 차분하게 돌아보거나 곱씹을 수 있어야지 싶은데.
.. 술값 몇 만 원 아끼는 것과 전기요금 몇 만 원 아끼는 것은 간접비용의 차원이 다르다. 술값에는 간접비용이 별로 없다. 과음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전기요금의 뒤에는 원자력 발전소 뒤치다꺼리 비용, 송배전 인프라 비용 등이 있다. 숨어 있는 비용을 계산한다면 술값 몇 만 원과 전기요금 몇 만 원은 결코 같은 몇 만 원이 아니다. 그런데 당신과 다른 단순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몇 만 원을 같은 금액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두뇌회전을 즐기는 데서 만족감을 얻는 당신의 계산이 필요하다 .. (212∼213쪽)
(2) 스스로 길찾기를 막고 만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
몇 해 앞서 《태양도시》라는 책을 펴낸 정혜진 님은 대구에 있는 〈영남일보〉 기자입니다. 우리 나라 기자가 보여주는 여느 모습을 돌아볼 때, 정혜진 님처럼 생태와 환경에 눈길을 깊이 두면서 ‘우리가 지금 삶터에서 좀더 아름다운 쪽으로 나아지는 길을 찾으려는 움직임’은 몹시 남다르면서 훌륭하다고 느껴집니다.
여러 달 앞서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사기는, 나오자마자 책방에 달려가서 샀는데, 책을 사서 읽는 내내 마음 한켠이 무거웠습니다. 무거움은 자꾸만 더해 갔고, 나중에는 응어리까지 맺히면서 풀리지 않습니다.
책을 다 읽고 책꽂이 한쪽에 꽂아 놓습니다. 여러 달 잊고 지냅니다. 그리고 다시 끄집어내어 펼칩니다. 정혜진 님 책을 두 권째 읽는 동안, 어딘가 아쉽다는, 아니 어딘가 가슴으로 와닿지 않는다는, 어쩌면 귀로 듣고 눈으로 읽는 이야기로는 반갑거나 놀라울는지 모르나, 정작 우리 스스로 어떻게 길찾기를 하면서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르게 꾸려가는 삶을 일구면 좋은가 하는 생각을 얻기가 어려웠는데, 그 실마리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펼칩니다.
..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인을 알아야 한다. 지구온난화의 원인은 과다한 온실가스 배출이다. 이건 너무 많은 안락을 추구하다 보니 벌어진 일이다. 문제의 원인을 부시나 다른 사람에게 돌릴 일이 아니다. 당신이 편하게 살아온 만큼 당신도 책임이 있다. 그러니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성’이 출발이다 .. (199쪽)
정혜진 님 말대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한테 ‘지구온난화’는 발등에 떨어진 불입니다. 그런데 지구온난화는 왜 생겨났을까요. ‘온실가스 배출’ 때문일까요? 그러면 온실가스 배출이란 무엇일까요? “너무 많은 안락을 추구하다” 보니까 생겨났다고 할 만할까요? 그러면 우리가 여태까지 누려온 “너무 많은 안락”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안락’을 누리면서도 조금도 ‘안락을 누린다’고는 여기지 않으며 ‘더 많은 안락’을 좇게끔 길들여져 있을까요?
왜 우리 사회와 교육과 문화와 정치와 경제 모두 ‘더 많은 안락’으로만 나아가고 있을까요? 정혜진 님이 몸담은 언론사 〈영남일보〉는, 우리 사회가 어떠한 쪽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면서 기사를 실어서 대구 사람들한테 읽히고 있을까요? 정치가 어디로 나아가도록, 경제가 어떻게 꾸려지도록, 문화가 어떻게 뿌리내리도록, 교육이 어떻게 펼쳐지도록 바라면서 기사를 풀어내고 있을까요?
우리들은 틀림없이 ‘뉘우쳐야(반성)’ 합니다. 지금처럼 꾸리는 삶이 얼마나 우리 스스로를 좀먹는지 뉘우쳐야 합니다. 지구를 무너뜨리거나 온실가스를 많이 내뿜어서 뉘우친다기보다, 무엇보다 내 삶을 망가뜨리고 내 삶터를 엉망으로 흔들며 내 몸과 마음을 내 손으로 갉아먹고 있음을 못 느끼며 살고 있는 지금 흐름을 뉘우쳐야 합니다.
..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지만,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 부모님 세대처럼 없어서 안 쓰고, 낭비할 수 없어 아끼던 그런 시대는 지났다. 기후변화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 우리의 딜레마일지도 모른다. 몇몇 훌륭한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도시의 풍요를 ‘건전하게’ 누리는 수준일 것이다 .. (마무리글 / 229쪽)
그러나 뉘우침은 첫걸음이 아니지만, 마지막 걸음도 아닙니다. 뉘우침을 넘어서 ‘삶을 두루 돌아보는 눈’을 길러야 합니다.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눈’을 닦아야 합니다. 그리고 ‘뉘우침’을 한다면 마땅히 ‘지금 누리는 것 가운데 꽤 많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회개와 고해성사는 있는데 달라지는 삶이 없다’면, 이러한 회개와 고해성사는 거짓 회개와 껍데기 고해성사일 뿐입니다.
회개를 못하고 고해성사 또한 할 용기가 없을지라도, 다문 한 가지나마 자기 삶을 바꾸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됩니다. 하루에 한 가지가 어려우면 한 달에 한 가지, 한 달에 한 가지조차 어려우면 한 해에 한 가지씩 자기 삶을 바꾸어 나가면 됩니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 우리 삶에서 ‘놓아도 되는 대목’은 놓으면서 바꾸어야 비로소, 어떤 정책이나 대책이나 대안을 나라나 지자체에서 세우지 않아도 저절로 서민 스스로 ‘문화도시’도 이루고 ‘착한 도시’도 이루며 ‘깨끗한 도시’도 이루는 가운데 ‘살기 좋은 도시’가 마련됩니다.
그런데 정혜진 님 책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할 수 있는 길찾기를 처음부터 금을 그어 놓고서 “아끼는 삶 = 과거로 돌아가는 것”인 듯 풀이를 내려 버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곳곳에 밑줄을 긋기는 하지만 선뜻 가슴으로 스며들지 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건전하게’ 누리는 삶이란 어떤 삶인지 또렷하게 밝혀 보이지 않고 ‘건전’이라는 낱말을 섣불리 쓰고 마니까, 입에서 까끌까끌하게 맴돌기만 할 뿐, 제 몸으로 스며들지는 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는 “예전 시대로 돌아갈” 까닭이 없습니다만, “예전 시대에서 훌륭한 대목은 기꺼이 배워야” 합니다. 예전 시대에서 잘하던 대목, 예전 시대에서 놀랍게 이루어 낸 대목은 앞으로도 고개숙여 배워야 합니다. 새로운 대체에너지만이, 새로운 대안운동만이, 새로운 기술개발과 유럽 선진국 사례 모으기만이 우리가 나아갈 길이 아닙니다. 나중에 세 번째 책을 엮어낼 꿈을 품으신다면, 모쪼록, 앞선 두 책을 넘어서 주기를, 아니 앞선 두 책을 정혜진 님 스스로 밑줄을 그어 가면서 물음표를 찍고 찬찬히 읽어 보아 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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