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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리축제 칠십리축제를 알리는 대형 현수막이 하늘에 걸려있다.
칠십리축제칠십리축제를 알리는 대형 현수막이 하늘에 걸려있다. ⓒ 장태욱

지난 여름을 아쉬워나 하듯이 십수일간 태양은 식을 줄을 모르고 이글거리더니 모처럼 단비가 내렸다. 수은주가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을 보니 지상의 남아있는 여름의 잔해가 모두 비에 씻겨 내려간 모양이다.

서귀포에서 ‘칠십리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바닷바람이 가슴속에 고여 있는 침전물을 씻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비를 맞으며 서귀포로 달렸다. 첫날이라 행사를 준비하는 손길들이 분주하기만 했다. 손님을 맞아보기도 전에 비부터 내리니 여간 실망하는 표정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내게 포구는 여전히 정겹기만 했다.

칠십리축제 축제를 위해 설치해놓은 천막들이다.
칠십리축제축제를 위해 설치해놓은 천막들이다. ⓒ 장태욱

군사요새가 서귀포를 낳아

지금 서귀포는 국내에는 물론이거니와 세계에도 잘 알려진 관광미항이다. 하지만 서귀포는 조선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름 없는 포구에 지나지 않았다. 이 포구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은 이곳에 군사요새로서의 역할이 주어지면서부터다.

1300년(충렬왕 26)에는, 탐라를 동도와 서도로 나누고, 대촌(大村, 제주시 지역을 지칭)을 제외한 지역에 현을 설치하였다. 당시 설치한 14개 현 중 홍로현은 지금의 서귀포시 서홍동과 동홍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조선전기까지 서귀포는 홍로현의 포구로 이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1439년(세종 21)에 이르자 제주군안무사 한승순이 조정에 건의해서 서귀진을 설치했다. 이후 홍로현은 폐현되어 홍로마을로 남게 되었고, 서귀포는 홍로현의 관할에서 벗어나게 되어나 정의현 소속이 되었다. ‘서귀포 70리’라는 말은 정의현성(지금의 성읍민속마을)에서 서귀포까지 거리가 70리라는 말이다.

서귀포 서귀포 전경이다. 앞에 보이는 섬이 새섬이고, 그 너머 보이는 섬이 문섬이다.
서귀포서귀포 전경이다. 앞에 보이는 섬이 새섬이고, 그 너머 보이는 섬이 문섬이다. ⓒ 장태욱

1589년(선조 22)에 이르자 이옥(李沃)목사가 홍로천에 있던 서귀진을 동쪽으로 옮겨 성을 쌓으면서, 포구에 군사적 기능이 강화되었고 그 주변에는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제주삼읍지지>의 기록이다.

‘서귀포는 현(縣, 정의현을 지칭) 서쪽 홍로천의 하류다. 탐라조와 대원 때 후풍처소(출항하기 전에 적당한 바람을 기다리는 곳)라고 한다. 옛날에는 홍로천 위에 있었는데, 목사 이옥 때 지금의 위치로 이축하였다. 성 밑으로 구멍을 뚫어 물을 끌여 들였다. 성과 마주한 바다 가운데는 문섬, 범섬, 숲섬이 있는데, 모두 석벽이 가파르게 솟아 나란히 별여서서 서로 바라본다.’

서귀진 옛 터 서귀초등학교 서쪽 언덕 위에 있다. 지금은 고구마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서귀진 옛 터서귀초등학교 서쪽 언덕 위에 있다. 지금은 고구마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 장태욱

농민이 살아야 요새도 튼튼

홍로천은 천지연폭포의 상류인 솜반내를 말한다. 당시 병역은 농민들이 져야할 책무였다. 진을 만들어도 이 곳에 살 농민들이 없으면 병영을 유지할 수가 없는 법이다. 조정에서는 이곳에 서귀진을 만든 후, 그 인근으로 주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간구했다. 제주목사를 지냈던 이원조가 <탐라지초본>에 남긴 기록을 보면, 당시 관아에서 이곳으로 주민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서귀진 아래에 있는 포구를 수전포라 부르며, 항구가 매우 넓어 절벽을 의지하면 수백 척의 선박을 감춰 둘 수 있는 곳이다. 서귀진 주변에는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으나, 다만 어려운 몇 가구만 살고 있다. 때문에 서귀진 주변에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진 아래 사용하지 않는 목장을 이 곳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조 8섬지기 분량에 한하여서는 영구히 세금을 감면하여 떠나가는 것을 방지하였다. 성 밖에는 다분히 논이 있었다. 성의 동쪽에서부터 정방연의 상류까지 수로를 파서 물을 이끌어와 논을 만들고, 식수로 사용하다 남는 물은 성 남쪽 밭으로 보내어 모두 옥토로 바꾸었다.’

1702년(숙종 28)에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이형상은 1년 동안 제주전역을 순시하면서, 그 장면을 화공 김남길로 하여금 채색도로 그리게 하였다. 당시 그린 40폭의 그림을 엮은 것을 <탐라순력도>라고 한다.

서귀조점 <탐라순력도>에 있는 '서귀조점'이다. 서귀진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서귀조점<탐라순력도>에 있는 '서귀조점'이다. 서귀진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 장태욱

이중 ‘서귀조점(西歸操點)’은 서귀진을 점검하는 장면을 담은 내용이다. 이 그림에는 서귀진과 그 주변 섬의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 서귀진은 동문과 서문이 있는 타원형의 성이고, 성벽 위에는 여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림에는 성 안에 있는 객사, 창고, 병고 등이 잘 그려져 있어서 당시 성내의 시설까지 엿볼 수 있다.

비경에 취했던 어사들, 차마 발길이 떨어지 않아

서귀진이 만들어진 이후, 서귀포는 제주섬을 찾는 중앙관리들이 거쳐 가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인근의 천지연폭포와 정방폭포에 이들이 방문하면서 서귀포가 그 비경을 외부 세계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귀포 관광은 이 섬에 파견된 지방관들과 어사들에 의해 시작된 셈이다.

천지연폭포 입구 김상헌은 천지연폭포로 들어가는 길이 백주에도 음침하다고 했다. 기암절벽 틈에 형성된 상록수림으로 인해 여름에도 서늘하다.
천지연폭포 입구김상헌은 천지연폭포로 들어가는 길이 백주에도 음침하다고 했다. 기암절벽 틈에 형성된 상록수림으로 인해 여름에도 서늘하다. ⓒ 장태욱

1601년 안무어사로 제주에 파견되었던 청음 김상헌이 서귀진을 점검한 후, 천지연폭포를 둘러보고 남긴 기록이다.

‘천지담은 서귀포 서쪽 5리쯤에 있는데, 해구로부터 좌우는 석벽이 에워싸고 있으며, 갈수록 아름답다. 동구 속의 나무들은 모두 겨울에도 푸르다. 벽을 따라 몇 리를 올라가는데 한줄기 바위 턱을 기어오른다. 그런데 아래로는 바위가 비상하게 튀어나와 미친 듯 사람에게 다가오고, 골짜기는 늑대처럼 사나우며 백주에도 음침하다. 바람을 감추고 비를 모아 귀신이 울부짖는 것 같다. … 다만 굳게 감춰진 해외의 유람의 장소로서 세상 사람들이 올 수가 없어 그 좋은 경치를 아는 이가 거의 없다,’   

천지연폭포 서귀포를 상징하는 폭포다.
천지연폭포서귀포를 상징하는 폭포다. ⓒ 장태욱

청음이 제주를 방문할 당시만 해도 천지연 폭포는 외부세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천지연폭포의 절경에 반한 청음은 이 좋은 경치를 아는 이가 거의 없음을 두고, 아쉬워했던 것이다.

서귀포 서쪽에 천지연폭포가 있다면, 그 동쪽에는 정방폭포가 있다. 1679년 안핵겸순무어사로 제주를 찾은 이증(李增)은 제주일대를 순회하며 관아는 물론, 해안 방어시설을 점검했다. 그는 호천봉수, 영천천, 보목포 서쪽연대, 정방연폭포를 지나 서귀진에 도착했다. 그리고 서귀진을 점검했다.

이증은 주변에서 정방폭포에 대해 전해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그가 정방폭포에 대해 기록한 내용이다.

‘폭포의 높이는 수십 장(1장이 약 3m)을 헤아리겠고, 바로 큰 바다에 쏟아지는데 석벽이 깎아놓은 듯 삼면에 벌여 있고, 바로 문섬이 마주 대하고 숲섬, 범섬이 좌우에 나란히 솟아 있어 뛰어난 장관이 있는 곳이라 믿어진다. 섬 안의 돌 색깔은 모두 검고 거친데 문섬의 깎아선 절벽은 옥으로 된 언덕처럼 누각 같은 모양이라고 한다. 그러나 해는 져가고 바람이 일어 가서 볼 수가 없었다. 이것 역시 조물주가 아까워 비밀을 지키려 그런 것일까.’

정방폭포 이증은 정방폭포를 직접 구경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정방폭포이증은 정방폭포를 직접 구경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 장태욱

해가 지고 날씨마저 나빠 정방폭포를 가까이서 볼 수 없었던 점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정방폭포를 위해 시 두 편을 남겼는데, 그중 한 편이다.

선구의 땅의 비경 역시 하늘도 아껴
풍진에 물든 나그네 오르지 못하게 하여
내리는 폭포수 구슬을 뿜으며 백 장을 날며
걸려 있는 절벽에 옥을 모아 두 줄기 머리 땋아 세웠네.
일찍이 듣건데 바다 위에 삼신산이 있다는데
깊은 바다 가운데 이제 한 곳을 바라보노라니
다만 한스러운 것 바람에게 막혀 뛰어난 경치 못 봐
속세의 인연 나 또한 오로지 굳히지 못 하네.
 -이증의 시 <정방연구점(正房淵口占, 정방연에서 입에 나오는 대로)>

이증은 당시 어사의 신분으로 이곳을 찾았다. 저녁에 궂은 날씨로 정방폭포를 구경하지 못했으면 다음 날 오전에 다시 구경해도 될 것인데, 이증은 주어진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아쉬움을 뒤로한 채, 아침 일찍 대정을 향해 길을 떠났다. 이를 보면 이증은 업무에 충실한 모범 공직자였던 모양이다. 국정감사보다 심야 접대에 관심이 많은 국회의원들도 많다던데, 옛사람들의 태도를 본받을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도시로서의 서귀포가 아니라 항구 '서귀포'에 대한 것입니다.

서귀포에서는 10월 26일까지 서귀포칠십리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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