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진부한 속담 하나.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이 진부한 속담은 아마 지금 우리나라 사회지도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으로 봐서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 싶다.
결국, 그랬다. 실제 농사를 짓지 않음에도 쌀 소득보전 직불금(이하 쌀 직불금)을 받은 것도 모자라 이봉화씨는 현직 차관 신분으로 농지원부를 허위로 작성해 신청했고 취득했단다. 전 보건복지부 차관인 이봉화씨 말이다. 이분께선 자리에서 물러나며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공무원에게 아주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준법성을 기대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으면 한다"고 남은 공무원들에게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아주 높은 도덕성과 준법성'이라는 말에 밑줄.
자, 그럼 여기서 아주 간단한 상식을 예를 통해서 알아보자. 농지원부. 도대체 이것이 뭐냐 하면 간단하게 풀어서 '농부 자격증'이다. 1000㎡ 이상의 경작지를 소유하거나 임대해서 직접 경작을 할 경우 해당 읍면사무소에 가서 신청을 하면 소재지의 산업계 담당과 이장이 현장을 실사한 뒤 사실일 경우 발급되고 사실이 아닐 경우 발급이 안 되는, 그러니까 실제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주는 증명서다.
진짜 농민도 떼기 어려운 '농지원부'를 어찌...
이쯤에서 2년 전 여름에 귀농한 내가 목격한 장면을 이야기해 볼까 한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귀농한 이웃 분이 농사지을 땅 1000㎡ 이상을 구입한 후 농지원부를 떼러 갔더니, 담당계장이 현장실사를 나와서는 "아무것도 심은 게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분명 농사지을 땅인데도 말이다. 몇 달 뒤 겨우 그걸 얻어 냈지만, 그분들 오신다고 아침부터 노심초사 대기하고 있었던 이웃 분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농지원부는 농민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양식'이다. 농지원부가 있으면 건강보험료 경감혜택을 받을 수 있고 농민에게 주는 정부지원금 수급 자격도 그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이들 학교 등록금도 농지원부를 떼어다 주면 감면해 준다. 1년 동안 뼈 빠지게 농사지어 쌀 10마지기 얻어, 겨우 200만원 정도 건지는 가난한 농사꾼에게 이런 혜택은 수입농산물에, 비싼 생산비에, 낮은 쌀값에 부딪혀 절뚝이는 농민들에게는 걸음이라도 가능하게 해 주는 목발 같은 존재다. 8년 후 양도소득세 면제? 농민들은 이런 거에 관심도 없다.
당시 '서울'하고도 서초구에 사시는 공사가 다망하신 현직 차관께서 '경기도'하고도 안성까지 가셔서 1000㎡ 이상의 경작지에 농사를 짓겠다고 농지원부를 작성하여 신청하고 해당읍면사무소 담당자와 경작지 동네 이장님의 실사까지 마친 후 농지원부를 취득을 하셨다?
공무원증도 모자라서 농부자격증까지 있어야 할 이유가, 요즘 많이 회자되는 8년 후 양도소득세 감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마음 깊이 농사를 열심히 지어 볼 요량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두 가지가 있다. 농지원부 취득과정이 요령부득이라는 것과 쌀 직불금 신청 자체가 이미 밝혀진 대로 실제 농사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의도된 거짓이라는 것.
'부패' 괜찮다는 청소년들... 모든 게 썩은 윗물 탓아까 그어 놓았던 밑줄 친 부분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자. 우리나라 국민들은 공무원들에게 "아주 높은 도덕성과 준법성을 요구하고 있"다는 건데, 소가 웃을 말이다. 이번 일은 진짜 농부에게 돌아가야 할 쌀 직불금을 농부도 아닌 사람들이 허위로 농지원부를 발급받고 거짓경작으로 가로채면서 빚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주 높은 도덕과 준법을 운운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이건 아주 기본적인 도덕과 준법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정치권과 언론계, 공무원들을 비롯해서 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라고 불리는 부류들에 부지기수인 모양이다. 한 마디로 윗물이 썩었다. 그러니 언론을 장식했던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부패지수가 그 모양일 수밖에. 윗물에 이어 아랫물도 썩어가고 있다.
'감옥에서 10년을 살더라도 10억원을 받게 된다면 부패를 저지를 수 있다'는 항목에 18세 미만 청소년 17.7%가 "그렇다"고 대답했단다. 24.3%는 '나를 더 잘 살게 해줄 수 있다면 지도자들이 불법행위를 하더라도 괜찮다'는 물음에 "그렇다"고 말했단다. 기가 찰 노릇이다. 중학생보다 고등학생에 "그렇다"는 대답이 더 많았다는데 18세 이상 어른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미 그만 둔 사람의 마지막 말을 꼬투리 잡아 물고 늘어진다고 생각했다면 미안하다. 그런데 이미 그만 둔 사람'만'의 생각 같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몰랐다거나 다들 그렇게 하는 관행이라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다거나 하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는 충고도 하셨다는데 참말로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가 또 나왔다. 매번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되풀이 되는 말이 '모르고 한 일이다', '관행이었다'다.
이 말 정말 지겹도록 들었다. 그래서 다들 그런 핑계로 유야무야된 일이 어디 하루 이틀인가, 수십 년 동안 계속된 것을. 그런 사람들이 사회지도층이 되어주니 우리 선량해야 할 청소년들 입에서 10억이라면 10년 감옥도 괜찮다느니, 잘 살게만 해 준다면 모든 걸 용서해 준다느니 하는 민망한 말들이 나오는 것이다.
정쟁에 열 올리지 말고, 잘못한 사람은 벌을 주자
'진정한 성공은 자기 삶의 행복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멋진 말들이 청소년들 입에서 나와 주었으면 좋겠는데 '진정한 성공은 땅 많고 돈만 많으면 장땡'이라는 험한 말이 쉽게 나오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 아이들의 좋은 모범이 되어야 할 우리 어른들의 탓이 크다. 그래 다 우리 잘못이다. 그런데 '믿고 따라와라. 좋은 세상 보여줄게'라고 우리 어른들을 지도하고 편달해 주시는 지도층 인사들의 탓은 더 크다.
담백하게 인정하자. 농지원부는 농부자격증이다. 진짜 농부들은 가난하다. 높은 자리 있는 분들이 가난한 농부가 환장하게 되고 싶어 농지원부 취득할 수는 있다. 그러나 편법적인 방법으로 농지원부를 얻었다면 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쌀 직불금, 농사짓고 당당하게 탔다면 괜찮다. 그러나 비겁하게 농사도 짓지 않고 경작확인서를 거짓으로 제출해 돈을 타먹었거나 타먹을 생각이었다면 벌을 받아야 한다.
아주 높은 도덕과 준법정신을 보여주지 않아도 좋다. 그저 기본적인 도덕과 준법정신을 보여주면 된다. 여기에 이전 대통령을 소환해서 추궁을 하겠다느니 이게 다 이전 정부 탓이라느니 하며 본말을 흐리지 말자. 먼저 죄송하고 미안하다고 사죄부터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하나 잘못된 것들 가려내고 잘못한 사람들 벌주고 그러면 된다.
문제의 본질은 법을 어긴 것이고, 자격도 안 되는 사람들이 농지를 편법으로 취득한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거기에 맞는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다. 정치논리로 애매하게 위장하지 말고 비리를 저지른 사람이 너무 많아 일괄처벌이 어렵다고 물 타기 하지 말고, 아이들에게 똑바로 보여 주는 것부터 하면 된다. 윗물이 이렇게 맑아지려한다는 의지 말이다.
아이들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어른' 될 순 없나
도덕과 준법을 살리고 부동산 투기가 아니라도 당당하게 돈 벌 수 있는 세상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지금 사회지도층을 봐서는 우리 시대에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의 미래까지 우리가 망쳐서는 안 된다. 갈수록 부패에 무감각해지는 아이들의 멍든 마음에 붉은 살빛이 돌게해야 한다.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잘못된 것을 드러내고 합당한 벌을 주고 잘못된 제도를 정비하는 일이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땅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가난한 농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의 돈을 편법으로 가로채 간 땅값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가짜 농민들부터 사라지게 해야 한다.
24.3%의 청소년들이 "그렇다"고 대답한 이 말이 영 귓속을 떠나지 않는다.
'나를 더 잘살게 해줄 수 있다면 지도자들이 불법행위를 하더라도 괜찮다.'
이런 말을 듣고도 아무런 가책이 없는 사회지도층 인사라면 아랫물에 대한 지도와 편달을 그만 하셨으면 좋겠다. 아무리 일제고사에 학원에 뺑뺑이를 도는 아이들이라도 알만 한 것은 다 알고 볼 거 다 볼 줄도 안다. 이 아이들이 곧 우리의 미래다. 절망일지 희망일지 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