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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익 위원장을 비롯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회원들이 29일 오후 광화문 동아일보사앞에서 '정부와 동아일보의 사과' '동아의 무책임한 보도 지양 및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정신 복귀' '사과와 함께 그에 걸맞은 구체적 화해조치' 등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정동익 위원장을 비롯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회원들이 29일 오후 광화문 동아일보사앞에서 '정부와 동아일보의 사과' '동아의 무책임한 보도 지양 및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정신 복귀' '사과와 함께 그에 걸맞은 구체적 화해조치' 등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권우성

정동익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 위원장은 지난 1967년 편집기자로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요원은 편집국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기사를 넣어라 빼라" 시시콜콜 간섭했다.

마침내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고 독재에 맞섰다. 기관원의 상주를 막고 시위 기사와 인권 기사 등을 풍부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정부의 광고탄압에는 백지광고를 낸 독자들과 함께 싸웠다. 그러나 결국 이듬해인 1975년 3월 17일 새벽, 폭력배와 보급소 직원 등이 동아일보사에 난입해 농성중이던 150여 명의 사원들을 들어냈다.

정 위원장도 동료·선후배들과 함께 쫓겨났다. 그때 안종필 당시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은 "이제 <동아>의 정신은 우리에게 있다"고 외쳤다. 쫓겨난 기자들은 그날 아침 '동아투위'를 결성했다.

진실화해위 "국가와 동아일보는 해직 기자들에게 사과해야" 권고

그리고 33년 동안의 싸움이 이어졌다. 결국 2008년 10월 29일, 당시 '동아 사태'에 대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 결정이 내려졌다. 국가는 <동아일보>와 해임된 기자들에게 사과하고,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였던 <동아일보>에 대해서는 해직 언론인에게 사과하고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이었다.

해직 당시 서른 네 살이었던 정동익 위원장은 어느 덧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정 위원장은 28일 저녁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사필귀정이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진리가 확인됐다"며 "단 하루라도 <동아일보> 기자로, 언론인으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에 멍울졌던 한이 풀어지는 기분이 든다"면서 "먼저 가신 12명의 동아투위 동지들이 가장 보고 싶다"고 말했다. 정 위원장과 동아투위 위원들은 29일 오후 2시 30분 동아일보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뒤 "국가와 <동아일보>의 진정한 사과"를 촉구하는 1인 시위에 돌입한다.

"사필귀정...화해의 손을 잡을 용의가 충분히 있다"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정동익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장.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정동익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장. ⓒ 권우성
-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은 동아투위의 명예회복 계기다. 위원장으로서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오랜만에 가슴에 멍울졌던 한이 풀어지는 기분이다. 벅찬 감동을 느낀다. 지난 2006년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개별, 지역별로 동아투위 위원들을 민주화 관련자로 인정한 적은 있었지만 당시 상황이 국가기관에 의해 밝혀지기는 처음이다. 지난 33년동안 진상규명을 요구하던 동지 12명이 작고했다. 사필귀정이다.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진리가 확인됐다."

- 1974년과 1975년 당시 '동아 사태'에 대해 들려 달라.
"중앙정보부 요원이 매일 드나들면서 '이 기사 넣으라', '빼라' 간섭하고 심지어 '데모 기사는 1단 이상 안 된다', '야당 당수 기자회견은 사진 싣지 마라' '연탄값 인상이라고 하지 말고 연탄값 현실화라고 해라'는 식으로 간섭했다. 이른바 인민혁명당 관련자 가족들이 <동아>에 찾아와 진실을 밝혀달라고 울부짖었다. 서울대 학생들도 몰려와 사옥 앞에서 화형식을 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젊은 기자들이 이렇게 비겁하게 살 수 없다'며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다. 기관원들 출입 막고, 인권 기사와 학생 시위 기사를 제대로 보도하려 했다. 인혁당 사건도 이때부터 제대로 보도했다.

정부 쪽에서는 이걸 깨기 위해 광고탄압을 시작했고 당시에도 광고가 주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신문사가 정권에 손을 든 것이다. 사측에서는 처음에는 국민들 성의가 높으니 동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광고탄압 심해지고 경영상 어려움도 오니 태도가 돌변하기 시작했다.

경영상의 이유로 사규 위반했다고 해서 18명을 강제 해임시켰다. 이에 항의하고 농성하니까 1975년 3월 17일 새벽 3시경 폭도 300여 명을 동원해 우리를 쫓아냈다. 그날 아침 곧바로 '동아투위' 만들고 이후 6개월간 동아일보사 앞에서 113명이 도열 시위했다. 이후엔 우리 정당성 알리는 유인물 뿌리고 신문에 보도되지 않은 인권 소식 묶어 '민권일지'를 만들어 배포했다. 이 사건으로 12명이 구속되기도 했다."

- 당시 정권과 <동아일보>를 용서할 수 있나?
"세월이 지나니까… 예전같은 적개심은 사라졌다. 진심으로 정부쪽에서 사과하고 나온다면 과거를 잊고 언론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세우는데 동참할 것이다. 그 화해의 손을 잡을 용의가 충분히 있다. <동아일보>하고도 마찬가지다."

"<동아>, 촛불 시민들로부터 오명을 듣는 신문으로 추락"

- 투쟁 과정 가운데 어떤 장면이 가장 기억나나?
"1974년에 우리가 닷새 동안 단식농성한 적이 있었다. 사옥 2층에 공무국이 있고 3층에 편집국이 있는데 우리가 공무국을 점거했었다. 당시에 2·3층 사이에는 기사 송고시 활자판 등을 옮기는 공간이 있었는데 3층에 격려방문 온 분들이 그 곳을 통해 '힘내라'고 소리쳤다. 그럼 우리는 다시 그 공간을 통해 '고맙다'고 소리질렀다. 

3월 17일 깡패들이 침탈할 때는 공무국 벽을 해머로 때려 부수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밖으로 들려나왔는데 그 장면도 잊을 수 없다. 아무래도 옛날 장면이 많이 떠오른다."

- 동아투위 회원들의 반응은 어떤가?
"며칠 전부터 전화도 많이 오고 연락도 많이 온다. 다들 비슷한 반응들이다. 그동안 애쓴 것들이 보람있다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심재택·김인한·안종필 선배 등 돌아가신 12분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그들도 전부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 진실화해위원회 결정은 권고일 뿐인데… 국가와 동아일보사가 이행할 것으로 보는가?
"즉각 시행해야 한다. 이명박 정권은 현 정부 일이 아니라면서 발뺌할 가능성이 있지만 과거 4․3 사건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과하지 않았나. <동아> 역시 지금까지는 경영적 해직이었다고 말하는데 진상을 소상히 밝혀야 한다. '<동아> 보는 재미로 산다'는 독자들의 성원을 받던 신문이다."

- 특히 <동아일보>쪽에서 위원회 권고에 대한 입장을 낼지가 관심이다.
"농성·단식·성명 등등 지난 30여 년간 사과 받기 위해 많은 일 했지만 <동아일보>는 우리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큰 기대는 하지 못한다. 단 지금의 <동아> 사주는 당시 상황을 잘 모를 수 있다. 그만큼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니 사과와 화해 가능성이 있다고도 본다."

- 해직 이후 <동아일보>와 동아투위가 머리를 맞댄 적은 없나?
"두어번 있다. 1980년 서울의 봄 때하고 DJ 정권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정치적으로 큰 변화가 있을 때 동아일보 사측에서 대화의 제스처를 썼다. 그런데 정권이 보수쪽으로 기울어지는 낌새가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대화의 채널을 끊었다."

- 위원장의 후배들이 만드는 <동아일보>는 어떻게 평가하나?
"우리가 쫓겨나면서 '동아일보 정신은 동아투위에 있다'는 것을 천명했다. 우리를 내쫓으면서 <동아>는 변질되기 시작했다. 지금 어떤가? 꽉 막혀있다는 느낌이 든다. 촛불을 밝힌 시민들로부터 각종 오명을 듣는 신문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동아일보>가 새로 도약할 전기를 맞이했다. 10․24 선언 정신으로 돌아간다면 1970년대 국민 사랑받던 최고 신문으로 살 길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동아일보>에 희망은 없다."

"단 하루라도 좋으니 언론인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1975년 3월 17일 '축출'된 동아일보 기자들은 6개월 동안 출근시간에 회사 앞에 도열한 뒤 신문회관 혹은 종로 5가 기독교회관까지 침묵시위를 벌였다.
1975년 3월 17일 '축출'된 동아일보 기자들은 6개월 동안 출근시간에 회사 앞에 도열한 뒤 신문회관 혹은 종로 5가 기독교회관까지 침묵시위를 벌였다. ⓒ 동아투위

- 복직도 요구할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줄곧 '원상회복'을 요구해 왔다. 단 하루가 되어도 좋으니 <동아일보>로, 언론인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다들 환갑이 훨씬 넘어 어렵겠지만 상징적으로 동아투위와 화해한다면 <동아일보>를 바로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 언론계의 가장 큰 관심사인 YTN 사태가 동아투위와 많이 닮아있는 것 같다.

"우린 싸우기가 어려웠다. 군사정권의 탄압 심했고 시민사회 세력도 형성이 안 되어 있었다.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언론계에도 함께 하는 동지들이 많이 있다.

시국선언에 7800명의 언론인이 서명했다. 건강한 시민사회단체도 지원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양식있는 촛불시민들이 YTN 살리기에 나서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잘 싸우고 있다. 저렇게 똘똘 뭉쳐있으면 반드시 이긴다. 우리같은 불행한 일을 오래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앞으로 동아투위 활동 계획은?
"우선 진실화해위원회 권고가 나온 만큼 11월 17일까지는 정부와 동아일보의 사과 촉구에 집중할 예정이다.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지난 30여년간 일관되게 걸어온 자유언론실천선언 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언론계와 언론계 후배들 지키는 밀알이 되자는 게 동아투위 정신이다. 다짐을 새삼스럽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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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투위#동아일보#정동익#진실화해위원회#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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