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길을 찾아경주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옛 현장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중 신라옛길 답사회를 따라 이번에는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동해에서 만파식적을 취득한 내용과 관련이 있는 옛길을 따라 나섰다.
경주에서 추령 고개를 넘기전 바로 옆에는 황룡 약수탕이 있다. 우선 이 길로 접어들어 동네인 모차골을 한참 들어가니 추원사란 절이 있고, 마을 안 깊숙이 잘 지어진 그림같은 펜션도 보이고, 마지막에는 석불암이라는 절이 있다.
여기서부터 이제 길이 포장된 길이 아닌 산길로 접어든다. 주변은 오는 길 내 단풍들이 온 산을 수 놓았다.
이 길이 맞는지 할 정도로....맑고 깨끗한 작은 물소리가 들리고 주변 공기가 맑아서 인지 몸과 마음은 한결 가벼운 느낌이다. 시간을 지금부터 초월하여 과거 신문왕이 수레를 타고 갔던 길을 상상하며 걷는다. 뭐 다 상상력이겠지만 과연 이 길이 그때 당시 마차가 정말 다녔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길은 그다지 좋지 않은 상태였다. 평지와 고개를 넘나들어 첫 번째 성황당고개라 불리는 곳에서 감포 기림사 방향을 보니 경관은 좋다. 약간 언덕 위에 길은 이제 조금씩 좋아졌다.
고개를 넘어 낙엽을 밟아 가면서 오니 세수방 근처에 이르렀다. 세수방이란 손을 씻고 피곤을 달래던 곳이라 한다. 효명 세자의 제수비용을 마련코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숯 가마터가 있었다고 하나 글쎄. 예전에는 민가도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주변을 보니 축대가 있어 정말 사람이 깊숙한 산중에 옛 이야기처럼 살았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두 번째 고개는 이름이 없다고 한다. 민묘가 언덕 위에 잘 조성되어 있고, 이제 세 번째 고개를 넘어 향하니 불령이 나온다. 사실 이번 답사의 개인적인 목적이었다. 이곳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불령의 봉표가 있기 때문인데, 아직 보지 못해 이번 기회에 볼 수 있었다. 香炭山은 木炭 숯을 생산하기 위한 나무가 있는 산을 말한다고 한다.
이 곳 가깝게 있는 용동 감재에도 봉표가 하나 있다고 하나 이 역시 보지 못해 다음에 보고자 한다. 세종 년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도 하나 아닌 것으로 보인다. 불령봉표에 새겨져 있는 한자 이다. 延慶墓香 炭山因 啓下 佛嶺封標 이제 불령을 넘어 가니 기림사의 뒤편 길과 연결된다.
삼국유사의 한 현장 용연신라 31대 신문왕이 감은사 앞바다 동해 대왕암에서 용에게 옥대와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얻고 기림사 서쪽 시냇가에서 와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들고 쉬는데 때마침 태자(후에 효소왕) 가 다가와서 "이 옥대의 한쪽 한쪽이 모두 진용(眞龍)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네가 어찌 아느냐"라고 하자 태자가 "옥대의 한쪽을 떼서 물에 넣어 보소서" 라고 하였다. 왼편 둘째 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땅은 못이 되어 용연(龍宴)이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삼국유사에 전하는 바로 그 현장이라 한다.
수량이 많이 줄어 물은 그다지 장관을 이르지는 못하나 주변 경관은 역시 좋다.
천년고찰 기림사기림사는 643년(선덕여왕 12) 천축국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고 하다가 원효(元曉)가 확장, 중수하고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현재 목탑지, 삼층석탑, 오백나한상을 모신 응진전, 주 건물로 보물 대적광전, 건칠보살좌상, 소조 비로자나 삼존불과 그 속에서 나온 복장유물 등이 있는 천년 고찰이다. 조금 시간이 늦어서인지 경내는 너무나 조용하다. 산을 넘어 계곡을 건너 이렇게 기림사로 와 보니 옛길의 운치를 알 수 있었다.
김시습의 영당을 잠시 보고 설명을 들으며 입구에서 한 잔의 차로 여유를 느끼며 하루 답사를 마무리 하였다. 현장 답사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알게 한다. 가을 단풍과 함께 인적이 드문 옛길을 찾아 나서 만남의 인연을 또 기약하고 다음의 답사길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