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가 한창일 때 어머니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추수가 끝나기도 전에 양식(1년에 2가마 반)이 떨어져가 쌀을 사먹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힘들게 수확한 벼를 건조기에 말린 뒤 방아를 찧어와야 밥을 먹을 수 있는데, 예전처럼 동네에 쌀 방앗간이 있는 게 아니라 트럭에 벼가마를 잔뜩 싣고 검단정미소까지 가서 방아를 찧어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선선한 가을볕에 벼를 말렸지만, 벼뿐만 아니라 눈에 띄는 농작물을 모조리 훔쳐가는 도둑들이 넘쳐나고, 벼 말리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서 동네 아저씨의 건조기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가져간 벼가마는 바로 방아를 찧을 수도 없습니다. 인천 서구 인근에 남아있는 정미소가 이곳 밖에 없어, 다른 농부들의 벼가마니가 줄줄이 예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까지 이웃 동네인 경서동에도 정미소가 있었는데, 택지개발 때문에, 농사를 지을 사람도 땅도 사라지니 정미소도 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평화롭고 안락했던 농촌 마을과 논, 밭을 불도저로 깔아뭉개 버리고 '명품도시' 운운하는 인천시의 마구잡이 개발 때문에, 농부들이 벼농사 짓기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런 것들 때문입니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이 뿌듯하고 풍성한 기분!! 아무튼 양식 걱정하시던 어머니의 걱정이 어제(8일) 싹 가셨습니다. 아버지가 정미소에서 방아를 찧은 햅쌀을 저녁 늦게 가지고 돌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검단정미소에서 저희 동네사람들의 벼를 찧어 한꺼번에 배달해주는 편에 저희 집 햅쌀도 받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쌀가마니를 싣은 트럭이 1층 현관 앞에 도착했다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는, 부리나케 계단을 내려가 현관 한편에 쌀가마니를 아버지와 함께 트럭에서 빨리 내려 놓았습니다. 정미소 트럭은 아직 배달할 곳이 여러군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30여 가마를 어렵지 않게 내려놓고 트럭을 보내고 모두 올라와(3층) 저녁을 먹었는데, 아버지는 식사를 끝낸뒤 다시 현관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저희 쌀(15가마)과 다른 분들께 줘야하는 쌀을 구분해서, 몇 해 동안 임대가 되지 않아 이것저것 부려놓은 2층에 올려놓으려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다시 따라 내려가 쌀가마를 어깨에 짊어지고 계단을 오르며 날랐습니다. 2층이 아니라 3층과 옥상의 계단 사이에다 말입니다.
한 해 동안 가족이 먹을 양식을 어머니는 이곳에다 놓아두시기 때문에, 다음날(오늘) 2층에서 쌀가마를 번거롭게 또다시 옮기느니, 한 번에 올려놓는 게 좋다 싶어 40kg짜리 쌀가마 4개를 올려다 두었습니다. 비리비리한 몸이지만 간만에 힘 좀 썼습니다.
그렇게 제 몸무게보다 13Kg 밖에 덜나가는 쌀가마를 옮겨놓고 나니, 어깨가 조금 뻐근하고 무릎에 무리가 오긴 했지만 참 뿌듯했습니다. 어머니도 "방아도 찧어왔으니 이제 겨울채비는 김장만 남았다!" 하시면서 좋아하십니다.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이런 풍성한 기분, 여러분도 느껴 보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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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직불금 부정수령자 국정조사와 처벌, 징계는 언제쯤 하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