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한국문학에서 전통성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지난한 이야기인가. ‘민족문학‘ 이라는 단어 때문에 마치 문학의 저변이 위축되고 국수주의적이라도 된다는 듯 서둘러 간판을 바꾼 한국작가회의의 모습만 보더라도 그렇다. 또한 아직 여물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세계화 대중화를 앞세워 ’전통성‘ 을 무시하거나 우리의 것들을 홀대하기 일쑤다. 단언하건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장르와 민족적 향기와 문제를 다루는 소재를 없이 여기고 세계화만 주장한다면 한국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일 수도 있다. 역으로 말하자면 전통적인 것이야말로 세계적인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시조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현대시조작가가 당당히 노벨문학상을 타는 것을 꿈꾸지만 수백 년을 거치며 명맥을 당당하게 지켜오고 있는 한국현대시조가 아직도 변방인 것은 바로 이런 많은 문제들이 널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시조단 내부에서의 혁신과 노력이 부족하였던 것을 먼저 반성해야 하겠지만 대학교수는 물론 초중등 교사들 중에도 현대시조를 제대로 이해하고 가르치는 이가 찾아보기 어렵게 현실도 이를 반증한다. 해마다 중등교과서에서 현대시조 작품 소개가 형편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도 큰 문제 중 하나라고 하겠다.
그러나 2000년대를 통과하면서 많은 문학잡지들이 시조작품을 다루고 게재하는 추세에 많은 위안을 받는다. 이런 긍정적 상황에 힘입어 올해에도 젊고 능력있는 시인들이 각종 시조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우리문학을 달뜨게 하고 있다. 청도가 배출한 한국현대시조의 거목 이호우, 이영도 시인의 고향 경북 청도군이 주관하는 시조문학상과 한국시조사가 주관하는 한국시조작품상의 수상자들이 속속 결정되면서 늦가을 시조의 향기가 가득하다.
먼저 18회를 맞은 이호우시조문학상에는 제주도의 외톨이 고정국시인이, 22회를 맞은 이영도 시조문학상은 수원의 정수자시인이 결정되었고 18회를 맞는 한국시조작품상은 강현덕시인이 각각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상금의 규모는 차치하고 역대 수상자들의 면면이 한국시조단을 이끌어온 걸출한 시인들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상들의 영예가 만만치 않은 것임을 보여준다.
<백록을 기다리며>라는 작품으로 수상하게 된 고정국시인은 제주사투리서사 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래기)와 문화집중의 폐단을 시사하는 (서울은 가짜다) 등의 작품집을 내며 날카롭게 사회상을 재단해온 시인이다. 심사위원들도 "억센 생명력과 치열한 시대정신을 심도 있게 드러내고 있다" 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수자 시인은 시조 <금강송>으로 수상하며 "부드러우나 위력적인 시어의 조탁" 이라는 상찬의 심사평을 이끌어 냈다. 이미 중앙시조대상을 수상했고 (저녁의 뒷모습) 등의 시집을 냈으며 평론가로서도 많은 시조집 평설과 이론서를 저술한 중견시인이다. 정시인은 수상소감에서 "광속으로 변하는 시대에 오래된 정형시의 미래는 어떠할까" 라고 말하며 애를 태우기도 하는 현대시조의 본류를 지켜온 시인이다. 또한 작년부터 신설된 신인상에는 김강호, 박지현시인이 각각 수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운영위원회는 "개화" 라는 작품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한국시조작품상은 청도군이 상금과 행사를 주관하는 것에 비하여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도 18년을 이끌어온 상이어서 작은 상금에도 불구하고 현대시조의 주류급들을 역대수상자로 배출하여 더욱 의미있는 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원로시인 녹원 이상범 시인이 애면글면 이 상의 명맥을 위해 분투하고 있음에 시조단은 큰 박수를 보낸다.
이번부터는 기념 작품집까지 출간하면서 제2의 전성기 구가를 위해 권갑하 시인이 합류하여 힘을 보태었고 안산의 여류 강현덕 시인이 올해의 수상자로 결정되며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94년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장원과 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석권하며 시조단에 등장한 강시인은 여성이면서도 강한 시사성 짙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시조집 (한림정역애서 잠이 들다)를 상재했고 <동굴에서의 잠>으로 이번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환상적인 상상력을 통하여 노숙자의 삶과 험난한 시절을 농도 깊게 표현해 냈다.
올 가을 가뭄으로 마른 단풍이 서걱대지만 시조단의 빛나는 열매는 단연 돋보인다. 이호우, 이영도 문학상 시상식은 11월 14일 청도군민회관에서, 한국시조작품상은 11월 21일 서울 한국출판문화회관 강당에서 각각 거행될 예정이다. 변방이 중앙을 압도하고 있는 시조단의 시류가 변방의 문학 시조를 한국문학 한 가운데로 이끌어 가기를 간절하게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