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경찰청이 2012년 이후 전의경제도 폐지계획을 사실상 백지화하겠다고 한다. 뭐든지 참여정부와는 거꾸로 하는 현 정부이기에 별로 놀라울 것도 없다. 그래도 그동안 전의경을 대체할 직업경찰관들도 뽑고 몇몇 전의경 중대를 해체하는 식의 움직임을 보며 일말의 기대를 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한 순간에 아쉬운 한숨으로 남고 말았다.
1년 전이다. 2007년 11월 11일 나는 의경 신분으로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2007 범국민 행동의 날' 집회 관리에 동원되어 출동을 나갔다. 당시 정부는 이 집회를 막기 위해 전국 254개 전의경 중대를 동원했고, 결국 시위대는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지 못했다.
당시 <문화일보> 11월 10일자에는 이 집회를 앞두고 '빼빼로데이에 진압 출동이라니…'라는 기사가 실렸다. 내용인 즉, 빼빼로데이인 11월 11일에 전의경들이 위험한 집회관리에 동원되어서 그들의 여자친구들이 마음을 졸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전의경의 고질적인 구타문제나 인권환경개선 문제에는 침묵하는 보수신문들이 큰 집회나 시위가 있을 때면 이런 식으로 전의경을 걱정하는 기사를 내보내곤 한다. 그리고 이 기사의 방향은 폭력 시위대에 의해 피해를 당하는 '불쌍한 전의경'에 맞춰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기사를 읽은 국민들은 집회의 정당성과 상관없이 '불쌍한 전의경'을 괴롭히는 시위대를 욕하게 된다. 문제의 본질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전의경과 시위대 간의 충돌에만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군인의 주적은 북한, 전의경의 주적은 '노동자' 사회문제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갖게 되는 것은 보수신문을 읽는 독자뿐 아니라 시위를 막는 당사자 전의경들도 포함된다.
전의경 진압중대에선 1년에 두 번 정도 '검열'이라는 것을 받는다. 경찰청의 높은 분들을 모셔다놓고, 평소에 갈고 닦은 진압훈련 성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선 진압의 상대로 노동자를 설정해놓는다. 노동자 역할을 맡은 전의경들은 머리에 빨간띠를 두르고 '철의 노동자' 등 투쟁가를 부르며 쇠파이프를 휘두른다.
그 가상 노동자들은 진압중대에 의해 체계적으로 진압되고 곧 모두 체포된다. 이렇게 '폭력적인 노동자 집단'을 진압하는 방법을 1년에 몇 달씩 훈련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시위와 노동자에 대한 반감이 체득될 수밖에 없다. 육해공군에서의 주적이 북한이라면, 전의경에게 주적은 노동자라고 가르쳐주는 것일까?
집회관리에 나갈 때도 '왜 우리가 이 집회에 투입되는 것인지'와 '우리가 투입되는 집회는 누구에 의해 열리고 왜 열리는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가서 막으면 되는 것이다.
집회가 열리는 인과관계와 배경을 모르기 때문에 '왜 우리가 여기서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불만의 화살은 자연스럽게 반대쪽에 서있는 시위대를 향하게 된다. 아니, 안다고 해도 시위대를 욕할 수밖에 없다. 전의경은 군인 신분이고 큰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라서 무사히 몸 건강히 제대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시위대는 그들 목소리의 정당성과 상관없이 나의 군 생활을 힘들고 위험하게 하는 '방해물'일 수밖에 없다.
전의경 시절 성립된 이러한 가치관은 제대를 하고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거리를 걷다가 집회 현장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욕이 나오고,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는 전의경 후배들을 보면 눈물이 핑 돌며 동정심이 드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여름 촛불집회 관련기사들 댓글란에서도 성난 누리꾼들에 맞서 경찰 측을 적극 옹호한 것은 다름 아닌 전의경 예비역들이었다. 지금도 전의경 최대의 인터넷 커뮤니티인 다음의 모 까페에는 큰 집회가 있을 때마다 시위대를 향한 비난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곤 한다.
촛불집회로 전의경의 필요성을 인식한 정부?
이렇게 성난 시위대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줄 뿐만 아니라 집회자체에 대한 견제역할까지 하고 있는 전의경 제도를 권력과 기득권층이 안 좋아할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는 참여정부도 별로 다를 바 없었지만, 그래도 정권 말기에 군복무 인원 감소에 따라서 전의경제도를 2013년까지 폐지한다는 청사진을 세워놓기는 했었다.
그러나 현 이명박 정부 들어서 어청수 경찰청장이 "전의경제도 폐지에 반대한다"라는 주장을 내놓더니 급기야 11일에는 폐지방안을 보류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를 거치며 전의경들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됐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가 전의경들을 동원해 한미FTA에 반대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원천봉쇄했듯이, 이명박 정부도 성난 국민들로부터 자신들을 막아주는 '방어막'으로서 전의경들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조중동과 어청수 경찰청장이 큰 시위가 있을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만큼 불법 폭력시위를 하는 국가는 없다"물론, 이건 사실도 아니지만 그대로 그들에게 적용이 가능한 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처럼 군복무하는 청년을 진압경찰로 돌려서 정부의 방어막으로 쓰는 국가는 전 세계에 한 군데도 없다"전의경의 인권은 돈으로 환산 안 되나?전투경찰대설치법에 의하면 전의경의 주 임무는 대간첩작전의 수행이다. 그러나 전경·의경 가릴 것 없이 시위현장에 투입되어 정부의 방패박이가 되는 탈법적 행위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의경의 경우 '치안보조'라는 전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두환 군사정권이 당시 급증하는 시위를 막기 위해 만든 조항인데다, 시위현장에서만큼은 직업 경찰들보다 전의경들이 일선에서 대부분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게 과연 '보조'라고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인 상황이다.
게다가 헌법적으로도 오동석 아주대 법대 교수가 지난 7월 23일 전의경폐지연대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전경을 시위에 투입해 과중한 업무를 부과하는 것은 헌법이 금하고 있는 사실상의 강제노역이고 병역의무자를 전경으로 전환 배치하는 것은 헌법적 한계를 일탈한 편법"이라고 밝힌바 있다.
이처럼 전의경제도가 지속될 명분은 별로 없어 보인다. 경찰청이 내놓은 변명은 전의경을 대체할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비용만 생각하지 말자. 지금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의경제도 안에서 구타와 가혹행위, 근무혹사로 병들어 가고 있고, 일부 전의경 예비역들은 왜곡된 사회의식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지난 촛불집회 때 양심선언을 한 의경처럼 시위진압을 하는 것 자체에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런 건 비용으로 계산이 안 되는 것일까?
진정 국민을 위한 정부라면 불쌍한 전의경 뒤에 숨지 말고, 당당히 전의경제도를 폐지하여 직업경찰로 대체해야 한다. 국민들도 그러한 책임감 있는 모습을 기대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윤서한 기자는 지난 7월에 제대한 의경 예비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