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아침, 너무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설마하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이자 작가인 강기희 기자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불이 나다니요? 지난번 다녀온 뒤 그곳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불이 났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불이 났다는 소식에 믿겨지지가 않아 전화를 하게 되었습니다."워낙 산골이어서 물어물어 찾아가느라 어둑어둑해져서야 도착한, 정선 가리왕산자락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강 기자의 집엔 지난 초여름에 다녀왔습니다. 인가가 드문드문 있어 자연의 소리만 함께 하던 곳, '글쓰기에 작가에게는 적절한 장소이겠구나'하며 부러워하며 밤을 새며 술잔을 기울였던 곳인데…. 하룻밤 사이에 화마가 정든 집을 삼켜 버렸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초여름, 남편과 함께 정선 여행을 계획하고 가리왕산 자락에 있는 강 기자 집을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 부부가 강 기자 집을 방문했을 땐 더덕향이 입구에서부터 코끝을 자극했습니다. "더덕향이 온 동네에 진동합니다"라며 먼저 인사를 건네자 강 기자가 반갑게 맞이합니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평소 칠순 노모와 절친하게 지낸다는 시인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노모가 더덕을 까고 계셨기에 더덕향이 진동을 했던 것입니다. 소탈한 모습으로 반겨주는 강 기자의 모습에서 정겨움이 묻어났습니다.
강 기자는 가리왕산자락에서 캤다는 황기를 듬뿍 넣고 오후 내내 푹 고았다는 토종닭 황기 찜을 푸짐하게 담아 마당에 있는 작은 간이 식탁위에 올려놓고 "시장하실 텐데 같이 드실까요?"라고 했다. 집을 찾느라 시간이 오래 걸려 늦은 저녁을 먹게돼 마침 배가 몹시 고프던 차에 소주를 곁들여 닭다리를 맛있게 뜯었습니다.
반찬은 낮에 산에서 뜯어왔다는 두릅과 더덕, 고추장. 최고의 메뉴입니다. 두릅 향과 더덕향이 오감을 자극하니 지상낙원이 따로 없습니다. 소주가 들어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서리가 내려 앉아 옷이 젖어 축축해져 옵니다.
"초여름인데도 밤이 되면 이곳은 찬 서리가 내려 춥습니다. 옷을 따뜻하게 입으셔야 할 겁니다. 그래서 항상 겨울 점퍼를 준비해 놓지요. 겨울 점퍼를 입어야 밖에 앉아 별을 보며 이런저런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할 수 있지요."
추위가 더해지자 기자와 시인, 남편은 집안으로 자리를 옮겨 밤이 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집안 구조가 참 아기자기하고 재밌었습니다. 두 사람이 겨우 누울 정도의 방들이 4~5개정도 있고 거실이 있고 강 기자가 글을 쓰는 서재가 있습니다.
다용도로 쓰이는 듯 보이는 앉은뱅이 탁자가 있습니다. 기자가 만들었다 합니다. 옥수수를 좋아한다는 강 기자는 "옥수수를 안주삼아서 소주 한 병도 마실 수 있다"며 직접 농사를 지어 수확했다는 삶은 옥수수를 앞에 두고 소주잔을 기울입니다. 가리왕산 자락에 어둠이 짙어갑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어느새 새벽이 왔습니다. 밖은 아직 어둑어둑한데 노모는 시장에 가지고 나갈 각종 산나물과 밤새 깐 더덕 보따리 등 정갈하게 묶어 놓은 짐을 부지런히 챙기십니다. 늦은 시간에 잠든 아들을 깨웁니다. 산골에서 정선장까지는 노모 혼자서 도저히 걸어가실 수 없는 거리기에 아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아들은 대답이 없습니다.
세상사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밤새 들이킨 알코올이 문제입니다. 저는 아들을 간절하게 부르는 노모의 목소리에 잠이 깨 부스스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습니다. 노모가 장으로 가지고 나가실 짐을 차에 싣습니다.
노모를 모시고 장으로 향했습니다. 첩첩산중 깊은 산골 아침의 정적을 깨고 차는 달렸습니다. 맑은 물이 흐르는 냇가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환상적이었고 공기도 상쾌했습니다. 5일장이 열리는 정선 장에 도착했지만 아직 이른 시간인지라 상인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노모가 물론 일등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술잔을 기울이며 강 기자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좀 늦은 시간에 나가셔도 되련만 어둠이 걷히기 전에 나가셔야 마음이 편안하신지 꼭 남들보다 일찍 나가신답니다. 그래서 꼭 일등을 하시지요. 처음에는 몇 번 말씀 드렸지만 이제는 제가 그냥 어머니께 맞추기로 했답니다."주인장과 참으로 잘 어울리는 그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온 시간이 엊그제 같은데 불이 났다는 소식이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참 부지런하게 사시는 노모를 모시고 산골에서 글을 쓰며 살아가는 강 기자. 지역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뛰는 그의 모습에서 정선의 힘을 발견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왔는데…. 가리왕산의 겨울은 유난히도 길고 추울 텐데. 걱정이 앞섭니다.
대책이 안 서니 참으로 암담합니다.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강 기자의 목소리가 떨립니다. 노모를 모시고 사는 강 기자의 상실감이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정들었던 집을 화마에 날려 보낸, 평생을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사신 노모의 주름진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하루빨리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하기를 기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