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도록 벌어진 모기와 전투에서 결국 패했다. '엥엥'거리는 모기를 잡기 위해 수 없이 뺨을 때리고 머리를 쳤다. 아마 누가 봤다면 실성했다고 봤으리라. 그렇게 자해를 했으나 방 안 어디에도 모기 사체는 없었다. 오늘은 꼭 모기향을 사리라 다짐을 했다. 1만원짜리 여인숙에서 그렇게 날을 새우고 나니, 몸이 뻐근하다.
부산을 떠나 진해로 간다. 77번 국도 한쪽 끝은 부산이지만 부산에서 시작하는 국도 번호는 2번이다. 77번 국도는 때때로 다른 국도와 지방도를 빌어서 달린다. 새(乙)가 머무는 맑은(淑) 섬(島)이라고 해서 이름이 붙은 을숙도를 지난다. 1987년 낙동강 하구둑(길이 2400m)가 만들어지기 전까진 주민들이 살았다. 하구둑은 1981년 만들어진 영산강 하구둑이 처음이다.
하구둑이 만들어지기 전에 남해바다는 밀양시 삼랑진까지 40km 가까이 치고 올라갔다. 당시 삼랑진 바로 아래에는 취수장이 있었고 그 물을 부산사람들이 마셨다. 부산 사람들은 "물이 짜다"고 불평했다. 설마 국 끓일 때 소금 안넣어도 된다고 좋아하진 않았겠지. 소금기 섞인 물은 인근 김해평야 농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바닷물 먹은 벼라. 짠밥을 먹는다 생각하니, 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구둑이 만들어진 이유다. 사람들은 혜택을 받았지만 생태계는 타격을 받았다. <낙동강 하구 가이드북>(녹색도시부산21추진협의회 간)에 따르면 하구둑 건설 후 어류 갑각류 연체동물 수서곤충은 각각 93종->63종, 96종->50종, 42종->27종, 42종->33종으로 줄어들었다.
철새 또한 수금류는 22종에서 16종으로 섭금류(涉禽類)는 35종에서 9종, 갈매기류는 6종에서 3종으로 줄었다. 철새도래는 대략 10분의1 정도가 됐다. 생태계는 꾸준히 자기 자리를 내주며 사람을 먹여 살린다. 이 땅 사람들, 응당 자리를 뺏긴 새들에게 감사할 일이다.
"고맙다. 고맙다" 중얼거리며 진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낙동강을 낀 길은 좋았으나 이내 2번 도로를 타고 자동차와 함께 달리게 됐다.
조선시대 조선소 흔적을 만나다
진해는 그 쪽을 향해 오줌도 누지 않겠다고 했던 땅이다. 군 생활은 참 길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했던 감정도 식고, 미움도 옅어진다. 자전거는 이미 진해로 방향을 틀었지만 별다른 거부감이 없다.
가장 먼저 나타난 곳이 용원동이다. 가락국 수로왕의 왕비로 인도의 한 나라였던 아유타국 공주가 배를 댄 곳이다. 그 때가 후한 광무제 24년이니 서기 48년이다. 가락국과 인도 왕국이 교역을 했다는 것도 신통하고, 공주가 그 먼 거리를 배로 왔다는 것도 신통하다.
동네에 사는 친구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게 놀랍지 않다. 역사나 문화가 밥 먹여 주는 게 아니니 말이다. 아유타국 공주가 배를 댔다는 게 밥벌이와 관련됐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진 않다. 동네 귀퉁이 사람 발길 많지 않은 곳에 아유타국 공주가 배를 댄 유주각(維舟閣)이 있다.
역사에 화려하게 등장했으나 이후 눈에 띄는 일은 없었다. 진해는 일제점령기 시절 주목받기 시작했다. 진해만 요새 사령부가 마산에서 진해로 이전하면서 군항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물론 해방 이후엔 군사도시라는 점이 발전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지만.
진해를 고스란히 보기 위해선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게 좋다. 진해는 해안선 길이가 100km가 넘는다. 육지 쪽만 따져도 74km다. 2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 부산진해신항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멋있는 해안도로가 펼쳐진다.
진해는 건설교통부가 뽑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에 세 곳이나 이름을 올렸다. 천자봉 산길(태백동 안민도로-장천동 대발령 고개), 대천로(진해 시민회관-북원로타리), 해안관광도로(웅천동-웅동1동)가 그곳.
해안도로엔 조선과 일본이 부딪친 기록들이 고스란하다. 침략하고 막고, 쫓고 쫓기던 흔적들이 여전하다. 도시 중심부엔 일본이 한국을 강탈한 뒤 만든 흔적이 생생하다. 이래저래 진해는 우리나라와 일본이 부딪치면서 생긴 생채기를 우직하게 품고 있다.
해안도로에선 안골포 굴강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굴강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군선을 고치고 군수품을 나르던 곳이다. 군 전용 조선소라고 할 수 있다. 전국에 5-6개 정도 굴강이 남아 있는데, 안골포 굴강은 원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굴강이다.
안골포에선 큰 싸움도 한 차례 벌어졌었다. 1592년 7월 한산도 대첩 이후 안골포에 주둔한 일본군 제2주력함대를 이순신 장군이 격파했다.
더 들어가면 웅천 안골왜성이다. 해안도로 입구에 '안골왜성 안골포 굴강'이라고 돼 있었지만 무척 불친절한 표지판이다. 안골왜성과 안골포 굴강은 전혀 다른 문화유적인데 한데 몰아넣고 아무 설명도 없다. 거리 표시도 없다. 덕분에 찾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진흙탕길에 터널, 게다가 풀이 무릎까지 올라오는 산길을 지났다.
표지판 근처에서 한참을 헤매다 인근 주민에게 위치를 물으니 "그게 문화재 가치가 있나요"라고 반문한다. 풀이 잔뜩 자라 볼품없이 보이는데다, 왜군이 만들었다고 하니 하는 말일게다. 이어 "길이 없어요. 저어기 산길을 돌아서 가야 해요"라고 말한다. 산길 입구에 자전거를 눕히고 길을 나섰다.
왜성에 도착하니 흑염소가 성 이곳저곳을 뛰어다닌다. 나를 보는 눈빛이 "여기 왜 왔니"다. 성에 서서 이순신 부대가 성을 공격하고 왜군이 힘겹게 막는 모습을 떠올렸다. 왜성을 살피고 내려오니 옷 곳곳에 도꼬마리가 더덕더덕 붙어 있다. 상금을 내걸고 안골왜성 찾기 대회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임진왜란 영화나 드라마에선 항상 일본군이 조선군 성을 공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왜군이 수세로 몰린 뒤엔 성을 쌓고 한동안 조선수군을 막았다. 왜군이 남해안 연안 일대에 만든 18개 성이 이를 잘 보여준다. 안골왜성은 그 중 하나다. 이를 통해 임진왜란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진해가 단지 일제시대 이후 갑자기 나타난 도시가 아님을 이들 유적지는 증명한다.
안골포를 빠져나온 뒤엔 다시 2번 국도를 타야 한다. 시내버스가 달리는 2차선 길을 달리면 제대로 된 한적함을 느낄 수 있다. 가로수는 잘 생겼고, 길은 곱다.
웅천읍성, 웅천왜성, 명동왜성을 만난다. 웅천읍성은 둘레가 1km가 넘었다. 왜구들을 막기 위해 세종 16년에 만들었다. 높이도 4.5m나 됐다고. 그 위용을 지금은 전혀 찾을 길 없다. 일제가 신작로를 건설하면서 허문 탓이다. 일제만 탓할 게 아니다. 요즘 모양새를 보면 우리가 더한 것 같다. 간신히 남은 읍성 주변에 울타리를 쳤다. 지금 복원 작업 중이다.
웅천읍성을 본 뒤 빠트리지 말아야 할 곳이 진해예술촌 향토사료관이다. 폐교 활용에 대해 모범답안이다.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서면 그만 마음이 편안해진다. 교실문을 하나씩 열 때마다 나타나는 전시물들은 기대와 설렘을 함께 준다.
농경사회 시절 썼던 각종 도구와 살림, 부엌용구, 교복 등 근대전시물 등 모두 친숙하다. 왕이나 양반이 아니라 보통사람이 썼던 것이니 바로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이다. 각 지역마다 지역 서민문화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전시관이 많아져야 할 일이다. 나오는 길에 안내를 맡은 분이 "자전거 예쁘다"고 인사를 한다. 흐뭇.
도시 전체가 근대박물관, 100년 전 건물 수두룩
진해는 살아있는 근대문화재 박물관이다. 일제강점기가 만든 흔적이다. 진해역과 구 진해해군통제부 병원장 사택(설학곰탕집), 구 진해요항부 사령부, 구 진해방비대 사령부, 구 진해방비대사령부 별관, 구 진해요항부 병원이 각각 등록문화재 192-197호다.
진해우체국은 사적 291호다. 러시아풍 건물로 1912년 10월 25일 만들어졌다. 일제가 2차대전에 '올인'하던 때, 지붕 동판은 포탄재료로 징발했다. 당시 수저, 밥그릇까지 군수물자로 거둬갔다는 이야기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1984년이 돼서야 복원했다.
진해역은 1926년 11월 11일 문을 열었다. 2002년 12월 30일 전면 보수를 했지만 당시 모양은 지켰다. 진해방비대와 요항부 건물은 모두 해군작전사령부 안에 있어서 일반인이 볼 순 없다.
천리교 경남교구는 일제 강점기 덕환사(德丸寺)가 있던 자리다. 교구 내엔 러일전쟁 당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1848∼1934)가 글을 쓴 표지석이 있다.
수양회관은 러시아식 건물이다. 제황산(해발 90m) 꼭대기에 있는 진해탑은 1927년 노일전쟁 승리 기념 일본 전승기념탑을 지우고 만들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마자 철거했다. 진해탑에 오르는 길은 두 가지가 있는데, 365계단은 우리가, 75계단은 일제가 만들었다.
독특하게 생긴 진해탑은 군함 마스터를 본 땄다. 군사도시라는 특성을 탑에 담았다.
365계단을 자전거를 메고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아이 둘과 함께 내려가는 어머니를 만났다. 아이가 떼를 쓰고 있었다.
"아앙, 원숭이 있다고 했잖아. 원숭이 보여줘." 진해탑에 원숭이가 있을 리 없었다. 어머니가 도움을 청한다.
"원숭이가 이사 간 지가 언젠데. 에이 몰랐구나."도움 실패. 아이 울음소리가 더 커진다. 나도 난처, 어머니도 난처다. 자전거를 메고 내려오다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가 아이 둘을 데리고 다시 진해탑 쪽으로 올라간다. 뭐라고 아이를 달랬을까.
사람이 건물을 만들고 길을 만들지만, 사람은 건물과 길을 닮는다. 오래 되고 변화가 느린 동네에 가면 아무래도 마음도 그리 되는 모양이다.
골목을 누비다 그만 '쌀과 마늘을 갈아드린다'는 집 앞에 멈추고 말았다. 어르신이 볕을 쬐고 있었다. 100년도 넘은 집이란다. 한때 쌀과 마늘을 갈았지만 지금은 몸이 좋지 않아 그만두었다고 말씀하신다. 사진을 부탁하자 "이 낡은 게 볼 게 있어서..."라며 말을 흐리다 허락하신다.
중원로타리 주변을 다니다 보면 일본식 집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2차대전을 일으킨 폭력국가 국민들은 떠나고 집을 남겨놓았다. 한 때 점령국 국민이 살던 집엔 지금 이 땅 순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집에선 어떠한 폭력도 느낄 수 없다.
진해는 빠르게 변한다. 2002년 14만명이던 인구는 2008년 6월 16만6천명으로 늘었다. 대부분 인구가 주는 경상남도에서 진해보다 인구증가율이 빠른 곳은 김해가 유일하다.
땅도 더불어 바뀐다. 진해는 2006년 기준 섬이 25개다. 한 해 전엔 31개였다. 웅동단지가 만들어지면서 바다가 매립되고 연도, 송도, 을미도, 수도, 아랫꼬지섬은 육지가 돼 버렸다.
개발 바람이 진해를 어떻게 바꿀지 예측하긴 어렵다. 다만 과거를 아우르며 가길 바랄 뿐이다. 도시가 근대박물관인 곳이 흔치는 않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2008년 10월에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