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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가 어느 날 한순간에 뚝딱 만든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마치 엄청나게 큰 호수와도 같다. 서양사상을 멀리서 조용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것은 몇 개의 큰 호수와 여러 갈래의 강물들의 연속처럼 보인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큰 호수는 에피쿠로스와 플로티노스 등의 강물로 흘러간다. 이 강물은 다시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호수로 모인다. 이 호수의 물은 르네상스라는 강물을 거쳐서 로크, 흄,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의 강물을 지나 18, 19세기의 칸트, 헤겔 등의 호수로 흘러든다. 우리들은 현대 초반에 하나의 엄청난 사상의 호수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르크스다. - 강영계,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철학의 끌림> 중에서

 

 책표지
책표지 ⓒ 멘토프레스

흔히 철학은 실생활과 아무 관련 없는 학문, 즉 돈이 안 되는 학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의외로 철학의 필요성을 절감할 때가 많다. 똑같은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이라도 기왕이면 철학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 더 낫고, 번듯한 글줄이라도 쓰려면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은 기본중에 기본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실생활과 괴리된 탁상공론쯤으로 치부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아마도 첫째, 학교에서 제대로 된 철학 수업을 하지 않고 둘째, 학교에서 철학 수업을 안 해도 입시에 쫓겨 그 공백을 느낄 겨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철학의 필요성을 느낀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라고 해도 별로 다를 건 없다. 철학을 번거롭고 사치스러운 지적 장식품 정도로 치부하는 분위기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철학이란 학문이 당장 도움이 안 된다고 공부하지 않는다면 수학, 과학, 역사 공부도 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당장 도움이 안 되기는 수학, 과학도 마찬가지니까. 결국 입시제도에 반영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 선택과 배제 원리가 적용된다고 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철학을 입시제도(바칼로레아)에 반영하고 있는 프랑스에서 철학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한편 철학자 김영민씨는 철학책이 읽히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철학책이 읽히지 않는 원인은 대략 몇 가지로 대별된다. 우선은 제대로 된 글쓰기 훈련을 거치지 않은 저자들이 설치는 탓이다. (.....) 다음으로, 결국 관련되는 문제지만 '지식의 식민성'이 지적되어야 한다. (....) 우리 땅에 내려앉지 않은 관념들을, 그것도 글쓰기의 훈련조차 없이 상략(商略)과 정략(政略)의 구도 속에 양산하고 있으니 철학이 외면당할 밖에.

- 김영민, <자색이 붉은색을 빼앗다> 

 

김영민씨의 지적을 접하고 나니 이래저래 철학이란 학문과 친해지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설령 철학이 정규 과목에 포함된다 해도 서양철학에만 편중된다면 그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워싱턴 같은 지도자를 선택하기 위해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철학과 친숙해지고 서양철학, 동양철학, 우리의 철학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철학에 문외한이나 다름없어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지만 그래도 얄팍한 지식을 동원해 본다면 "철학 공부에도 왕도가 없다"는 진부한 구절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실 철학은 역사도 길고 이론도 천차만별이라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는 일조차 지난한 과제로 다가오는 학문이다. 그러나 일단 재미를 느끼면 웬만한 시나 소설보다 감미롭고 새록새록 보람이 느껴지는 학문이기도 하다. 

 

일반 대중이 철학에 좀처럼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철학적 언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자 박이문씨가 말했듯이 철학 텍스트가 지적, 정보적이라면 문학 텍스트는 정서적, 비정보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철학 텍스트에 사용되는 언어는 명확하고 논리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보니 말랑말랑한 언어로 이루어진 문학에 비해 논리적인 언어를 주로 사용하는 철학이 더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철학과 친해지려면 논리적 언어에 익숙해져야 하고 논리적 언어에 익숙해지려면 논리적 언어로 쓰인 책이나 글을 많이 읽어야 한다.

 

철학 서적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은 가급적 철학자의 저술 속에서 직접 샘물을 길어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개론서나 해설집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원전을 읽지 않는다면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방법은 먼저 철학사 전반을 거시적으로 조망하고 그중에 마음에 드는 철학자나 철학 이론을 골라서 미시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과욕을 부리다간 몇 걸음 못 가서 제풀에 지치고 만다. 아쉽게도 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의 분량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두에 인용한 대목은 강영계의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철학의 끌림> 가운데 일부이다. 연륜 있는 철학자답게 한편의 서사시가 연상될 만큼 아름다운 비유로 서양철학사를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서양철학을 "몇 개의 큰 호수와 여러 갈래의 강물들의 연속"으로 이해하고 다음으로 개개의 호수와 강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나간다면 철학적 안목을 기르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인들의 교육관을 설명하는 말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우리의 자녀들이 모두 워싱턴이 되진 못하더라도 워싱턴 같은 사람을 지도자로 선택하는 사람으로 키우자." 우리가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철학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면 철학 없는 지도자를 분별할 줄 아는 유권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강영계 /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철학의 끌림> / 멘토프레스 / 2008 / 1만4000원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철학의 끌림 - 20세기를 뒤흔든 3대 혁명적 사상가

강영계 지음, 멘토프레스(2008)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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