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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살에 빛나는 벚꽃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정체불명의 테러 집단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 미국의 노인 세대들은 태평양 전쟁의 일본군 가미카제를 떠올렸을 것이다. 똑같은 자살 테러였기 때문이다. 그런 극단적인 방법은 맹신이나 광기가 있어야 감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본은 종교를 통해 인간을 맹신이나 광기의 포로로 만든 제국주의 국가였다.

천황을 숭배하는 일본인들의 종교적 신념은 극렬한 배타성으로 나타났다. 전쟁에 임하는 일본인들은 이교도를 배척하는 광신도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광기의 종교 집단이 그러하듯이 패색이 짙어진 일본의 광신도들도 최후의 수단으로 집단 자살을 선택한 것이었다.

가미카제 해군특공대는 전군의 특공화로 확대되었고, 막바지에 이르러는 '일억 총 특공'이라고 하여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확산되었다. 사실 이 작전을 입안한 오니시 다키지로의 말마따나 이것은 '작전의 추락'에 불과했다.

오니시는 장교 시절부터 부하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기로 유명했다. 그는 중령 시절 항공모함 '가가'의 부장이었는데 날씨가 안 좋아 출격을 주저하는 조종사들에게 "모두 날아가 죽어 버려!"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인간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없어.' 언제나 그는 이런 생각으로 훈련과 전투를 지휘했다.

그는 마닐라에서 클라크 기지로 가는 차 안에서, "결사대가 필요해, 결사대가…"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항공본부에 도착한 그는 부하들 앞에서 말했다.

"모두 알겠지만 이번 쇼이치고 작전이 실패하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우리는 적의 항공모함 갑판을 파괴하여 항공기의 발착을 막아야 한다. 이제 남은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제로센 기에 250킬로 폭탄을 탑재하여 직접 부딪친다면 항모의 갑판은 적어도 일주일은 쓰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201 항공부장 다마이가 옆에 있는 참모 요시오카에게 물었다.

"250킬로의 폭탄을 싣고 육탄 공격을 가한다면 어느 정도의 효과를 낼까?"

요시오카는 창문 너머 활주로에 있는 제로센 기를 물끄러미 보면서 대답했다.

"높은 데에서 떨어지면서 가속도가 붙는 투하 폭탄보다야 파괴력은 약하겠지만 일시적으로 갑판을 망가뜨릴 수는 있습니다."

다시 얼마 동안의 정적이 흐른 후, 다마이는 위관 장교들을 소집한다. 그는 자기에게 훈련을 받은 제10기 갑종비행 연습생 출신 23명에게 물었다. 그들은 거의 20대 나이의 어린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천황 폐하를 위해서라면'이라는 전제로 자살 특공 작전에 동의를 표했다.

일본인 고유의 노래를 화가(和歌)라고 한다. 화가 중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 '대화혼'(大和魂, 야마토 다마시)이라는 노래가 있다.

일본의 마음을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것은 아침햇살에 빛나는 벚꽃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 4개의 이름은 모두 이 시 구절에서 인용되었다. 특공대들의 이름은 각각 시키시마, 야마토, 아사히, 야마자쿠라였는데, 이들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일본인의 마음은 아침의 벚꽃'이라는 뜻이 된다.

1억 국민 전원 옥쇄

마침 1944년 10월 20일은 아침 햇살이 빛나고 있었다. 오니시 중장은 아들 또래의 어린 청년들을 놓고 훈시를 했다. 창백한 그의 얼굴은 여러 복잡한 감정들로 엉크러져 있었다. 그는 비감에 찬 어조로 훈시를 시작한다.

"여러분이 육탄 공격에 성공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곧 신이 되는 것이다. 조국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지휘관이나 사령관이 아니다. 오로지 순수한 여러분만이 할 수 있다. 나는 일억 국민을 대신하여 젊은이들에게 부탁한다. 나는 여러분의 노력을 끝까지 지켜보고 그 결과를 여러분이 있는 하늘나라로 전할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자살 출격이 3백여 차례나 계속되는 동안 3,845명의 20대 청년이 죽어갔다(그들 중에는 10여 명 이상의 한국 학도병도 있었다). 3,845명의 목숨과 바꾼 대가로 미군 함정 30척이 침몰했고 350척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미군이 대책을 강구하면서 가미카제의 효력은 급감하기 시작했다.

필리핀 함락 이후 미군의 공격은 곧장 일본 본토를 향했다. 본토 공습도 한층 가열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패배란 결코 없다고 부르짖었다. 그들의 입에서 "1억 국민 전원 옥쇄"라는 구호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이즈음이었다. 실제로 전 일본인의 5분의 1정도는 죽을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가미카제 입안의 공훈으로 일본군 군령부차장이 된 오니시는 본토로 되돌아갔다. 오키나와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일본군은 물자는 물론 식량마저도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오시니는 군부의 본영에서 항복을 논의할 때마다 신들린 표정으로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그는 아흔아홉 번을 지더라도 마지막 한 번을 이기면 승리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일본의 연합함대는 궤멸했지만, 지금 본토에는 1만 대의 비행기가 있다. 이를 모두 특공화하면 상륙하는 적군 1백만을 죽일 수가 있다. 그리고 북중국의 관동군은 모두 남만주와 한반도의 북쪽에 집결시키고 나머지 중국 병력도 남경이나 상하이로 모으면 방어선이 공고해져 승기를 잡을 수 있게 된다."

오니시는 육·해·군 총병력 230만을 모두 특공화하자고 주장했다.

1945년 8월 14일 점심 무렵, 야지 가즈오는 해군성 차장실에 있는 친구 오니시를 찾아간다. 오니시가 집무실에서 자살할까봐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니시, 오늘밤은 우리 집에서 한잔 하는 게 어때? 이제 모두 끝났잖아. 네가 할복한다면 사람들은 너를 성급한 사람이라고 비웃을 거야."

오니시는 친구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외쳤다.

"이놈아! 너 울어 본 적이 있냐? 이 바보 자식아."

그는 친구에게인지 아니면 자신에게인지 모를 말을 했다. 그러고는 동물 같은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야지 가즈오는 친구가 끝내 자결할 것이라는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오니시는 천황의 측근 때문에 전쟁에서 진 것이라고 말했다.

밤에 술병을 들고 야지 가즈오의 집을 찾은 오니시는, "1차대전에 진 독일이 부흥한 것처럼 우리 일본도 다시 일어날 거야"라고 하더니 홀로 술병을 비웠다.

오니시는 8월 16일 새벽에 자결했다.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고 주변을 정리하면서 그는 여러 통의 유서를 남겼다.

특공대의 영령에게 바친다. 잘 싸웠다. 정말 감사하다. 최후의 승리를 믿으며 육탄으로 산화했건만 그 신념은 달성되지 않았다. 나는 죽음으로써 그들과 유족에게 용서를 구한다. 일반 청장년에게 고한다. 여러분은 국가의 보배이다. 평시에도 특공정신을 잘 견지하여 일본 민족의 복지와 인류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

그는 특공 정신이 인류 평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말하지 않은 채, 용서를 구하며 할복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정신 유산은 오늘날까지 세계의 테러리스트들에게 전이되어 살아 있다.

저주 받은 땅, 오키나와

1945년 4월 1일, 사상 최대의 해공전이 오키나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무려 18만 3천 명의 미군 병력이 항공모함 40척을 비롯한 총 1,321척의 함정에 탑승해 있었다. 미국은 1개월 정도의 단기 승부로 예상했지만 전투는 3개월 이상이나 지연되고 있었다. 그 사이 일본군은 11만 명이 전사하고 7천4백 명이 투항했다. 미군의 사상·실종자도 전사자 1만 2천을 포함하여 5만 명에 육박했다.

일본 군부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오키나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려놓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무작정 들이닥치는 가미카제 공격은 미군 병사들에게 공포감을 안겨 주었다. 전쟁은 단기전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미군은 유혈과 폭격의 긴 시련을 감내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침 4월 12일에는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급서했다. 하지만 미군은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할 틈이 없었다. 사실 그 날은 많은 미국 병사가 대통령과 같은 시간대에 죽었다. 그 날 일본은 무려 175대의 가미카제 기로 17회에 걸쳐 미군을 공격했던 것이다.

노인과 어린이를 제외한 모든 오키나와 주민이 전투원이나 전투 보조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부녀자들은 취사와 간호를 맡으며 일본군을 지원했다. 청장년을 모두 전투에 내보낸 노약자들은 폭격으로 집이 없어지자 방공호로 피난했다. 그들은 비바람을 맞으며 생활했다.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오키나와의 실정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해져 있었다. 땅은 풀잎이나 나뭇가지조차 보기 힘들 정도로 초토화되었다. 일본군은 6월에 들면서 식량마저 모두 바닥이 나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일본 군부는 여전히 '결사 항전, 1억 옥쇄' 구호만을 되풀이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은 민간인도 10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잔인했던 시간에도 종말이 찾아들었다. 6월 23일 섬의 남단에 포위되어 있던 일본군 우시지마 중장의 잔존 부대가 전멸됨으로써 오키나와 전투는 종결되었다. 놀랍게도 우시지마 사령관과 참모들은 전원 자결해 버렸다. 이것은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 군부가 외치는 '1억 옥쇄'가 현실화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인식시켰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태그:#1억국민전원옥쇄, #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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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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