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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19일 영국 의사당이 보라색 밀가루 테러를 당했다. 통칭 'F4J(Fathers 4 Justice)'라 불리는 '절망에 빠진 아버지(desperate fathers)' 두 명이 그 전전날 의사당에 잠입해 숨어있다가 당시 영국 수상 토니 블레어에게 보라색 밀가루를 채운 콘돔을 던진 것이다.

다음날 영국의 대표적 일간지 <타임스>는 "생긴 지 18개월밖에 되지 않는 F4J가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게릴라 압력집단으로 등장했다"라는 헤드라인을 실었다.

어린 아들과의 면접장소가 법원으로 한정된 것에 반발한 매트 오코너의 주창 하에 절망에 빠진 아버지들이 2002년 만든 집단이 바로 'F4J'이다. 처음에는 자식을 보지 못하는 이혼한 아버지들의 고통에 공감한 사적 모임이었던 것이 지금은 전 세계에 지부를 가진 압력집단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아주 소박하다. ① 자녀 면접시간을 늘려 달라 ② 부모 역할을 동등하게 할 수 있도록 해달라 ③ 엄마 위주의 가정법을 개선하라는 세 가지이다.

스파이더맨 복장으로 시위하는 영국 아버지

 <타임스> 커버 스토리에 실린 F4J의 활동 소식
 <타임스> 커버 스토리에 실린 F4J의 활동 소식
ⓒ www.timesonline.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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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제대로 아버지 노릇하게 해달라"는 주장을 사회에 알리기 위해 이들은 극한투쟁도 서슴지 않는다.

자신의 세살 된 딸이 가장 좋아한다는 스파이더맨 복장으로 런던다리 탑 꼭대기 180피트 높이 기중기에 6일간 매달려 시위를 하거나, "나는 아버지다"는 글이 적힌 대형 보라색 풍선을 띄우고, 런던의 '정의를 위한 왕립 대법원' 지붕에 배트맨 복장으로 기어 올라가 시위를 한다. 아버지의 날에는 갖가지 슈퍼히어로 복장을 하고 대형 꽃장식을 단 이층버스로 시위를 한다.

이들의 기발한 시위방법은 언론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으나 또한 조롱거리이기도 했다. 평등을 의미하는 보라색으로 물들인 밀가루가 부성애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주장은 이해되나 방법이 희극적이고 과시적이라는 등의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사연이 자세히 알려지면서 세간의 시선도 달라진다. 법적으로 보장된 면접시간에 허가 없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었다고 4개월간 감옥 생활을 한 아버지, 1년에 하루만 자녀를 만나도록 허락된 아버지, 한 번에 2시간 이상 만나는 것은 지나치게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판결을 받은 아버지 등 지나치게 엄마 위주로 만들어진 가족법이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보수적인 영국 사회가 우스꽝스러운 시위를 하는 이들에게 동조적인 이유도 이처럼 소박한 것을 요구하는 적나라한 부성과, 이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극한투쟁도 마다하지 않는 절절한 부성애에 감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뉴욕 타임스> 2면 헤드라인에 '가족법은 악이다?'라는 기사와 <보스톤 글로브> 1면에 '법익 이탈 아버지들의 반격'이라는 헤드라인 하에 동조적인 기사가 실리면서, 서구 사회는 소외된 아버지의 권익에 눈을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아버지 역할에 대한 성찰과 논쟁으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가족법의 정치성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서구의 양육권 조정은 '아이 중심'

자녀 양육권에 관한 서구의 가족법은 몇 단계를 거쳐 진화해 왔다. 특히 미국의 경우 두 쌍 중 한 쌍이 이혼으로 끝나고 이혼하는 부부의 10%는 양육권 소송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양육권에 대한 고민은 절박한 것이었고, 1980년대부터는 전문가의 판단을 구하게 된다.

1985년 베네덱과 스켓키(Benedek & Schetky)가 "아이에게 최대한의 이로움이 가도록(the child's best interests presumption) 양육권은 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후로 이 주제가 양육권 판단의 황금률이 되었다. 문제는 아이에게 최대한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법이 적절히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오랜 고민의 결과 그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으로 "가장 해가 적어야 한다(the least detrimental alternatives)"는 개념이 병행하게 된다.

1988년 미국 정신의학협회(APA)는 아동 양육권의 정신과적 평가를 위한 태스크포스 팀을 구성하여 평가지침을 만들었고, 현재 1997년 미국 소아청소년 정신의학회의 '양육권 평가를 위한 임상 지침서'가 통용되고 있다.

이 지침서는 첫째도 마지막도 '아이에게 최대한의 이로움'을 보장하기 위해 논쟁의 중심에 아이를 둔다. "법의 도덕적 의무는 스스로 보호할 능력이 없는 시민을 보호하는 데에 있다"는 '국친사상(parens patriae)'의 법정신을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아직 자라나는 어린 나이(tender years)라는 점과, 누구와 가장 질적으로 양호한 시간을 더 많이 보냈는지, 누구에게 안정된 애착관계가 맺어져 있는지 등등이 기준이 되고, 그 결과 엄마에게 대부분 우선권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자녀와 관련된 거주권·경제권 또한 아이의 최대한의 이익에 부합되도록 양육권에 부수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덧붙이자면, 또 다른 기준으로 주목되는 것은 양육권 주장이 평화롭게 이루어지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했는지에 관한 조항이 있다는 점이다. 법적 소송 자체가 아이에게 정신적 해를 끼친다는 점에서 합의를 위한 노력이 없이 법 절차부터 밟는 것은 감점 대상이다.

'절망에 빠진 아버지들의 모임'은 이 여성 우선권의 가족법에 대한 항거이자 거부받은 부성의 고통스런 외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됨'을 쟁취하기 위한 이들의 투쟁

물론 비판도 있다. 아직까지도 아이 양육의 질적·양적 임무가 거의 대부분 엄마에게 부과되는 현실에서, 이혼 후에 동등한 양육권 행사가 실제로 가능할 것인가 부터, 강렬한 시각적 자극의 시위방식이 부성에 대한 환상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라는 등의 비판이 이어졌다.

또한 현대적 부성의 개념이라는 것은 가족법의 정치적 논리가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에서부터, 또한 아무 잘못한 것도 없이 이혼당할 경우 양육권이 이혼당한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에 들어있는 'no-fault'의 개념이 일방통행적이라는 비판까지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성공적 시민단체의 하나로 인정받는 이유는, 현대의 아버지 역할에 대한 대중의 공론과 성찰을 끌어냈다는 점일 것이다. 서구사회는 생물학적 혈연이 부모 됨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음을 오래 전에 선언하고, 자격 있는 자가 부모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다양한 차원에서 그 해결책을 찾아왔다.

'아이 중심'으로 제도적 배려를 한 것이 그 한 예이고, 부모의 자격에 대한 검증과 부모 됨의 훈련방식 개발이 또 다른 예이다. 법적 제도적 제련의 뒤안길에서 법익으로부터 이탈된 소수의 아버지들이 과거 여성이 불이익을 받던 방식과 유사하게 아버지 자격을 박탈당해 왔고, 대표적인 예가 이들 '분노한 아버지들'인 것이다.

이들은 아버지 됨을 쟁취하기 위하여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시간의 만남을 위해 도버해협을 건너고, 학예회 발표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기 위해 5시간을 운전해서 찾아가고,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여름휴가를 포기하는 아버지들은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또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DNA에 의한 아버지? 짐승만도 못한 사랑

 고(故) 최진실의 유산을 놓고 전 남편 조성민과 최씨의 유족 간에 분쟁이 발생한 가운데 11일 오전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열린 '한부모 가정 자녀를 걱정하는 진실 모임'의 발족식에서 방송인 허수경이 호소문을 낭독하고 있다.
 고(故) 최진실의 유산을 놓고 전 남편 조성민과 최씨의 유족 간에 분쟁이 발생한 가운데 11일 오전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열린 '한부모 가정 자녀를 걱정하는 진실 모임'의 발족식에서 방송인 허수경이 호소문을 낭독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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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어떤 아버지는 이런 '절망에 빠진 아버지들'로부터 무언가 배워야 할 것이다. 단지 DNA를 주었다고 해서 아버지로써의 법적 권익만 주장하는 것은 공자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짐승만도 못한 사랑(짐승에게 미안한 말이지만)'이다.

천륜은 당연히 끊지 못한다.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아이도 정자 제공한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판에 어찌 혈연을 무시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천륜이 아버지로서의 자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만큼이나 명백하다.

공자는 인간의 '다움'에 관해 언급하면서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못하며, 자식이 자식노릇을 못한다면, 비록 곡식이 있은들 내 어찌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君君, 臣臣, 父父, 子子이요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면, 雖有粟이나 吾得而食諸아 - 論語 顔淵)?"라고 하여 '다움'이 없다면 '자격'도 없다고 일갈하였다.

또 "사랑한다면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랑하기만 하고 수고롭게 하지 않는 것은 짐승들의 사랑이요, 충성하기만 하고 깨우쳐주지 않는 것은 부인과 내시들의 충성이니(愛之 能勿勞乎 忠焉 能勿誨乎아, 愛而勿勞는 禽犢-之愛也요 忠而勿誨는 婦寺之忠也라 - 論語 憲問)"라고 하여, 사랑함에는 보살핌과 걱정과 노력이 반드시 따라야 하고, 이런 사랑만이 자격을 얻을 수 있음을 새삼 강조하였다(여기에서 공자에 관한 여성학적 비판과 우리나라 가족법의 성인지 수준에 대한 언급은 접어두겠다. 절망에 빠진 아버지가 나타날만한 상황이 아님은 물론).

이 땅의 아버지들은 고단하다. 오전 7시에 출근해야 하면서도 새벽 2시에 아이를 데리러 학원으로 운전해 가는 아버지들, 아이의 학자금 생각에 직장에서의 모멸도 묵묵히 삼키는 아버지들, 텅 빈 집에서 아이들 사진을 보며 소주로 잠을 청하는 기러기 아빠들. 이들은 사랑이 수고로운 것임을 아는 아버지들이다.

어머니의 사랑만큼, 때로는 그보다 더 깊이 자식을 사랑하는 이 땅의 많은 아버지들이 어느 한 아버지의 사랑 없음에 분노하고 있다.

그 한 아버지는 아버지다움을 위해 노력했는가? 아이의 안녕을 위해 수고를 다했는가? 아이 얼굴 한번 보게 해달라고, 대형 크레인 위가 아닌, 대문 앞에서라도 시위해본 적이 있는가? 아이에게 최대한 이롭게 하기 위해 소송이 아닌 평화로운 중재를 해보려 애썼는가? 아이로부터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이를 보호할 도덕적 의무를 가진 법이 이런 '다움'과 '자격'을 검증하지 않고 오직 DNA의 신전에 봉사할 것인지, 수고하는 지친 많은 아버지들은 궁금해 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최보문 기자는 가톨릭 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사회 의학과·정신과 교수이자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이사입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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