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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이후 고정환율이 포기되고 자본자유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전후 세계경제질서를 떠받쳤던 브레튼우즈체제는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부자들의 넘치는 돈이 방만한 소비와 투기행태를 부추기고, 그 결과가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가들의 막대한 경상수지적자 누적과 부동산가격 상승 그리고 헤지펀드 같은 통제받지 않은 금융기관들의 발호였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소용돌이의 중심에는 자기자산 규모의 수배에 달하는 일상화된 차입대출, 헤지펀드를 직접 만들거나 거기에 뛰어들었던 대규모 투자은행, 연금기금, 보험회사들, 그리고 이들이 '구조화'시키고 전세계에 퍼뜨린 수많은 파생상품들이 있다.

일단 돈이 실물시장과 유리되어 투기화되는 구조가 만들어지자, 부동산가격 폭락이 촉발시킨 신용위기는 유동성의 퇴장을 더욱 가속시켰다. 이제 우리는 마침내 금융위기가 실물경제의 가공할 파국을 예고하는 단계에 직면해 있거니와, 세계는 수요 부족, 투자 격감, 실업 격증, 고용불안 압박 등 악순환 속에서 가늠조차 안되는 장기불황의 늪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번영 아닌 위기의 세계화 20년을 돌아보는 심사는 착잡하고 참담하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20년을 돌아보는 참담함

탐욕인가? 아니다. 책임을 자본주의의 보편적 성향인 탐욕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 안이하다. 이런 태도에는 현하의 위기가 탐욕이라는 죄업에 대한 당연한 대가이며,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나면 위기는 시간과 더불어 결국은 해소되리라는, 시장체제의 자연치유 능력에 대한 낙관과 시장을 거스른 데 대한 '도덕적' 질타가 담겨 있다.

우리가 만들고 방치한 제도와 관습이 우리의 물질적·정신적 삶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데, 이런 식으로 상처를 곪은 채로 봉합하고 문제를 호도할 수는 없다. 진정으로 시급한 것은 원인을 규명해서 발본(拔本)을 서두르는 일일 것이다. 자본주의적 시장의 근본적 불안정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 그래서 필요하다.

"비합리적 세계에서 합리적 정책을 제시하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을 가져오는 것은 없다"고 케인즈는 말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시장을 과신하며 미래를 계산가능한 합리성으로 재단할 수 있다는 오만에 차 있었다. 이것의 극적인 표출이 자본자유화 이후 갈수록 정교해진 금융기법들, 월가가 수백명의 수학박사들을 고용해서 만들었다는 수많은 파생상품들일 것이다.

투자자는 물론이고 전문가들조차 파생상품의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얼마나 많은 헤지펀드, 연금기금, 투자은행, 보험회사들, 개인들이 거기에 올인했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내렸는가.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은 것은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경제위기에 심각한 취약함을 노출하는 한국사회 

문제는 경제위기의 파장이 이른바 선진국들의 경우보다 그외 국가들에서 훨씬 심각하리라는 점이다. 예컨대 유럽의 대륙국가들은 오랜 세월 복지체제와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그리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 상대적으로 제도가 잘 정비되어왔기 때문에, 혼란을 수습하는 심적·물적 토대가 우리와는 비교도 안되게 견고하다. 우리는 제도의 부재와 '제도 부재의 악순환' 속에서 국가, 노동시장, 기업, 사회가 핑퐁 하듯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는 와중에, 역사적 맥락이 제거된 신자유주의를 교조적으로 추종해왔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화려한 팡파르를 울리며 이명박정부가 들어섰지만, 다시 케인즈의 말을 빌리면, "가방 속엔 고양이가 없었고, 모자 안엔 토끼가 없었으며, 머리 속엔 뇌(腦)가 없었다." 현정부의 면면과 지금까지의 행태를 보니, 모든 진보적 어젠다는 어차피 마이동풍의 헛소리로 허공에 흩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혁명을 하랴. 그러나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은 안목으론, 수많은 비정규 노동자들과 공영방송 사수를 외치는 기자들이 몇달 몇년을 거리에 내몰려도 나몰라라 하는 사회에선, 약자의 고통과 변화의 징후를 가장 민감하게 포착해야 하는 글쟁이들조차 기성작가에 대한 한 무명작가의 계속되는 표절 주장에도 집단적으로 침묵하는 세상에선, 걱정마시라, 혁명도 아예 불가능하다.

우리의 처방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러나 원래 희망의 싹이란 가능성이 아니라 당위에서 움트는 것이다. 만약 자본주의가 유지돼야 한다면, 개혁의 핵심은 권력을 금융과 대기업에서 대중에게 되돌리고, 그나마 민주주의가 활성화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국민국가의 중심성을 회복하는 일이 돼야 한다.

우선 지구적 차원에서 '현재대로의' 세계화는 바뀌어야 한다. 오늘날에도 직접투자의 흐름은 여전히 선진국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이자율과 투자율 등에선 나라마다 뚜렷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볼 때, 세계화는 아직 불가피한 현실이나 대세라기보다는 담론의 성격이 강하다.

또한 그것이 그간 몰고 온 빈곤, 양극화, 불안의 심화는 세계화의 정치적·권력적 성격을 부각시킨다. 지금이라도 무분별한 환율변화와 자본이동을 규제할 수 있는 새로운 초국가적 금융감독기구의 창설이 절대적으로 요구되거니와, 그간 신자유주의의 첨병 역할을 자임해온 IMF는 비민주적 정책과정 그리고 원래부터 단기적 금융구제를 위해 출범했다는 한계로 인해 근본적 개혁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 요구되는 세가지 제도화

국내적 차원에서는 무엇보다 총수요의 안정된 확보가 중요하다. 그것만이 요동하는 대외부문과 공급측의 유동성 퇴장경향으로부터 투자와 고용을 담보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세가지 제도화가 시급하다.

첫째, 국가복지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선진국 복지수준의 1/4 수준을 고집하고서는 경제도, 사회도, 정치도 안정을 기할 수 없다. 복지가, 말이 아니라, 예산배정을 둘러싼 첨예한 싸움의 결과임을 생각할 때,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세력의 의회진출이 그래서 중요하다.

둘째, 일단 '소비적' 복지의 기본틀이 마련된 후에는, 복지수혜자들을 시장으로 재편입시킬 수 있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자 없이 후자에 치중하는 전략은 노동의 수요여건, 즉 기업의 고용역량이 전제되지 않으면 공염불이요 정치적 수사에 그칠 가능성이 많다.

셋째, 기업의 지배구조를 보다 민주화함으로써 종업원들이 '어두운 고용'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고 무분별한 일방적 노동유연화 전략이 국가복지에 부담을 주는 계기를 최소화해야 한다. 갤브레이스가 말했듯이, 기업권력을 제어하지 않으면 자본주의의 미래는 없다.

요컨대 국가복지와 기업지배구조 그리고 노동시장정책은 서로 긴밀히 맞물리면서 한 사회의 총수요 역량을 좌우한다. 고용이 최상의 복지인 것은 이 세 부문에서의 제도화가 최소한으로 전제될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니는 개념이다.

무릇 모든 진보적 어젠다는 아래로부터의 동원 없이는 실현 불가능하다. 특히 한국처럼 보수적 정치구조가 고착된 경우는 인터넷이야말로 진보개혁(정치)의 활력과 가능성을 위한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오바마가 수세기의 인종편견과 사반세기 보수정치의 벽을 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인터넷을 통한 대중동원에 힘입은 바 컸다.

그간 이명박정부는 방송과 인터넷에 관해 조급증을 넘어 분열증적 증세를 보여왔다. <1984년>을 쓴 오웰도 예측 못한 인터넷의 가공할 힘을 이 정부는 일찍부터 감잡았나 보다. 익명의 사이버논객마저 '절필선언'을 하는 상황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제 청와대, 정부, 여당에는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간신돼지 스퀼러(Squealer)들만이 설쳐댄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우리 국민도 국민이지만 현정부의 앞날이 정말 걱정된다.

덧붙이는 글 | 고세훈님은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입니다.



#금융위기#신자유주의#헤지펀드#경제위기#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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