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해방 전 제주에서 태어난 작가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을 회상하며 쓴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때문에 이 소설 속에는 격동기 제주의 풍광이 그대로 담겨 있다. 마치 사진첩 속 흑백사진들을 통해 제주의 옛 모습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나의 유년과 소년이 추영된 자연 속의 사물들, 나는 거기에서 잊혀진 나의 어린 자아를 찾아보는 것이다. 내 심신의 성분 구조 내에는 자연 속의 숱한 사물들과 풍광이 용해되어 있을 것이다."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작가가 고통을 참으며 토해내는 추억 -예를 들면 가난, 순탄하지 못한 가정, 4·3의 굴레, 이웃 사람들의 잦은 죽음, 아버지의 외도 등-은 현대사 속에서 제주 민초들이 겪었던 보편적 체험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 작품이 현기영 개인의 기록물에 머물지 않고, 동시대의 자화상이 되는 이유다.
광장에 전시된 유격대장의 머리통들 작가는 제주읍 노형리에 속해 있는 함박이굴이라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그가 생활했던 집에는 천장에 구렁이가 둥지를 틀고 있었고, 저녁이면 대숲에서 살쾡이가 기어 나왔다.
부모가 모두 집을 나간 고향에서 작가는 불화로 싸움이 잦았던 조부모 아래서 두려움과 외로움에 울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와중에도 작가는 할아버지의 배려로 가끔 외가를 방문해서 어머니를 만나기도 했다. 그의 외가도 역시 노형리에 속한 너븐드르 마을에 있었다.
47년 봄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3·1절 발포 사건이 일어난 이튿날 작가는 고향에 있는 함박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3·1절 총격사건에 항의하는 총파업이 전도에 일어나면서, 학교도 무기한 휴업에 들어가고 말았다.
48년이 되자 이념 대립이 더욱 격화되었다. 외가에서는 사위들의 이념 대립으로 전전긍긍하던 외할아버지가 결국 읍내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외할아버지가 새로운 터전을 닦은 곳은 무근성이라는 곳이다. 이 때 어머니는 아들을 빼돌려 함께 친정으로 데리고 가게 되었다. 무근성으로 이사 온 작가는 북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작가가 살던 무근성 인근에 있는 관덕정 광장에는 연일 시국연설회가 열리기도 했고, 붙잡힌 유격대원들에 대한 즉결 심판이 열리기도 했다. 광장 길목에 잘린 유격대원들의 머리통이 전시되기가 여러 번이었다. 유격대원들 중 일부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백기를 들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격대장 이덕구의 시체가 십자가에 높이 전시되었다. 장두 이덕구의 주검에 대한 작가의 기록이다.
"두 팔을 벌린 채 옆으로 기울어진 얼굴. 한쪽 입귀에서 흘러내리다 만 핏물 줄기가 엉겨있었지만 표정은 잠자는 듯 평온했다. 그리고 집행인이 앞가슴 주머니에 일부러 꽂아놓은 숟가락 하나, 그 숟가락이 시신을 조롱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었다. …민중 속에서 장두가 태어나고 장두를 앞세워 관권의 불의에 저항하던 섬 공동체의 오랜 전통, 그 신화의 세계는 그 날로 영영 막을 내리고 말았다."
4·3이 끝나고 얼마 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가족들은 문상객들에게 죽 한 사발 돌릴 수 없는 초라한 장례식을 치렀다. 작가는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를 위로할 형편이 못 되었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집단 학살로 제주에 다시 한 번 죽음의 광풍이 지나갔다. 그리고 피난민들이 제주로 몰려들어 인구가 갑자기 늘어났다. 피난민 가게들이 거리에 줄을 이었고, 피난민 좌판이 즐비해져서 마치 읍내가 생존 전쟁터처럼 변했다.
용연과 병문내 하구, 어린 작가를 키워냈다작가가 6학년이 되자 정드르 마을로 이사를 갔다. 정드르마을은 훗날 제주공항이 확장되면서 마을이 사라지고 지금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정드르마을은 용연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죽음의 기운이 제주 섬을 휩쓸고 지난 와중에도 아이들은 노는 것이 즐거운 일이었나 보다. 작가는 여전히 용연과 병문내를 오가며 노는 데 여념이 없었다. 작가가 자신의 유년을 표현한 말이다.
"나를 결정한 것은 인간만이 아니었고 자연의 몫 또한 컸으니, 부모를 비롯해서 그 때까지 내가 겪은 모든 사람과 내가 젖줄 대고 자란 대자연, 그 모든 것의 총화가 바로 나라는 존재였던 것이다."
작가에게 '가족'이란 삶을 든든히 후원할 만한 공간이 되지 못했다. 아버지는 늘 집 밖을 나돌았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해서 친정 생활을 했다. 어디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던 작가는 친가와 외가를 오가며 유년을 보냈다.
끝없이 방황하던 아버지는 4·3이 일어난 후에는 이념 대립의 광풍을 피해 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헌병으로 근무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군복을 벗고 인천 부둣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는데 결국 사업에 실패했고, 다른 여자를 얻어서 새 살림을 차렸다.
그의 눈에 비친 어머니는 "4·3의 참화 속에서 사그리 불타고 주춧돌과 돌담만 남은 폐허에서 삶을 일구는 신석기시대 농경인" 같았지만, 자존심은 몹시 강했다. 남편의 외도에 몹시 분통해 했고, 그 분노의 화살은 어린 아들을 향했다.
아버지는 인천에서의 살림이 거덜난 뒤 돌아왔다. 7년 만에 아버지와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다. 아버지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심한 가위눌림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 아들이 해주는 발마사지가 아버지에게 수면제 효과를 발휘했다. 작가는 당시 자신이 만진 것은 아버지의 발이 아니라 아버지의 슬픔이었다고 고백한다.
아버지는 얼마 후 군청 임시직 서기로 직장을 얻었다. 가족들이 모두 기뻐했으나, 그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아버지는 한달 만에 직장을 떠났다. 그리고 시작한 일이 돼지치기였다. 하지만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가족들에게 아버지는 영영 실패자의 모습으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작가는 작품에서 자신의 상처를 먼저 세상에 드러냄으로서, 해방 이후 제주인들이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상처들을 서로 어루만져보자고 제안하고 싶었으리라.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말이 풍성한 시대일수록 소외의 골은 깊은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이웃의 상처에 관심을 갖는 일아 더 가치 있고 소종한 일이 아니겠나?
하마터면 제목만 듣고 지나칠 뻔 했던 소설인데 마침 국방부에서 무슨 이유에선지 '불온서적'으로 지명해준 덕에 호기심이 생겨 책을 구해 읽게 되었다. 국방부 당국자들에게 감사하다는 말 전한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의 주무대가 되는 제주시 용연, 관덕정, 정드르, 무근성 등은 필자가 기행기사를 썼던 곳들입니다. 내가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현지를 조사할 당시에 <지상에 숟가락 하나>라는 책을 참고로 했으면 더 좋은 기사가 나왔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