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들기에 흥미와 관심이 있던 장준하는 고된 훈련 과정에서도 짬을 내어 <제단· 祭壇 >이라는 이름의 잡지를 간행했다. 이미 장준하는 임천에서도 <등불>이라는 잡지를 만든 적이 있었다. 임천에서 <등불>을 만들 때에는 물자가 없어 아주 어려웠는데 그때에 비해 지금은 사정이 훨씬 좋았다.
그는 멀지 않아 국내 잠입을 하면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죽음을 영예로운 것이라 여기고 어서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그가 잡지의 이름을 '제단'이라고 한 것도 이런 그의 가치관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300부가 간행된 <제단>은 훈련병과 교관 전원에게 배포되고 중경 임시정부와 해외 단체에까지 우송되었다.
김준엽, 여성 광복군 민영주와 영내 결혼1945년 한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국내 침투 작전이 언제 결행될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초읽기 단계에 돌입해 있음을 장준하는 직감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훈련을 마친 장준하가 <제단> 편집실 앉아 휴식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지대장실에서 한 연락병이 와 장준하의 방을 노크했다.
"김 부관께서 긴히 상의 드릴 일이 있으니 한 번 뵙자고 하십니다."
김 부관이란 김신일(김준엽의 가명)을 말하는 것이었다. 김준엽은 지대장 이범석의 전속 부관으로 있었다. 장준하는 얼마 전 있었던 김준엽의 결혼을 떠올렸다. 그는 김준엽의 결혼에 후견인 노릇을 했었다.
"준하 형,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
강물에 무심히 돌을 던지던 김준엽이 말했다. 두 사람은 유유히 흐르는 뚜취강 앞에 앉아 있었다. 그때 장준하는 김준엽이 누구와 사랑에 빠졌는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병영 내에 여자라고는 한 명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민영주씨를 말하는 거지?"
김준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민영주는 이범석의 비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비서와 부관이 가까워지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시무룩해 있는 이유가 뭐지?"
김준엽은 병영에 하나밖에 없는 여자와 자기가 가까운 사이로 지내는 것이 동지들에게 미안하고 난처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실제로 자기를 대하는 동지들의 태도가 좀 소원하게 느껴진다고 그는 말했다. 하기야 사람은 여러 종류니 그에게 눈총을 보내거나 질시하는 경우도 있을 법한 일이었다.
"두 사람의 사랑을 진정으로 축복할 수 있도록 내가 동지들을 무마시킬 테니 두 분이 상의해서 날짜를 잡으시오."
김준엽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놀라시오? 여기 서안에서만 필요한 여자였소?"
"아니오."
"평생 사랑할 수 있는 여자라는 말이지요?"
김준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결혼해야지요."
장준하는 중경 임시정부의 민필호에게 편지를 보냈다. 얼마 후 민필호에게서 딸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답장이 날아왔다.
나 역시 소년 시절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상해에 갔다가 그곳에서 만난 한 소녀와 결혼하여 살고 있소. 우리 딸 영주는 모든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으니 학도병 동지들이 잘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편지대로 민필호는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기 전 상해로 예관 신규식을 찾아가 그곳에서 박달학원 일을 보다가 뒤늦게 상해로 온 신규식의 딸 신명호와 결혼해서 살고 있었다. 당시 그는 이범석과 한 방을 쓰며 예관 신규식을 도왔었다. 신규식은 경성고보 출신인 이범석은 무관 기질이 있다고 보아 군관학교에 보내고 휘문의숙 출신인 민필호는 문관 자질이 있다고 보아 임시정부에 둔 것이었다.
학병 입대 전 희숙과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린 장준하였다. 그는 동지들을 차례로 만나 우리가 왜 두 사람을 축복해 주어야 하는지를 말했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김준엽과 민영주의 전격적인 결혼은 이렇게 장준하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여기에다 장준하는 주례까지 맡아 했던 것이다.
경성 침투 작전에 장준하를 제외시키려는 이범석장준하는 급히 지대장실로 달려갔다.
'설마 그 사이에 부부 갈등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장준하는 미소를 지으며 걸어갔다. 그런 사적인 문제라면 김준엽이 자기를 지대장실로 오라고 할 리가 없었다.
김준엽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장준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장준하에게 자리를 권했다. 여전히 그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있었다. 장준하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이윽고 김준엽이 입을 열었다.
"대장께서는 준하 형을 국내 침투 작전에서 제외시키겠다고 합니다. 나로서는 준하 형의 뜻을 전할 만큼 전했는데, 대장은 아마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아요."
장준하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기가 학병을 탈출한 목적을 부인하는 조치였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김준엽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국내 잠입 공작도 중요하지만, 전후에 재목이 될 인재는 남겨 둬야 한다고 하시네요."
장준하가 지원하고 고대해 왔던 임무는 국내 잠입 공작이었다. 이 작전은 이미 연합군 중국 사령부를 거쳐 미 펜타곤의 찬성을 얻어 놓고 있었다. 그래서 연합군 사령부는 한국인 공작대의 훈련을 서안에서 하도록 조치했고 이를 위해 이범석 장군을 중경에서 불러낸 것이었다.
오에스에스 사령관 다나반 소장은 이 작전에 가장 적합한 인적 자원을 일군에서 탈출한 한인 학도병으로 보았다. 그들은 한국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한국 사정을 잘 알 것이고, 일본군 출신이므로 일본군의 생리를 알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대학 진학 이상의 지식 청년으로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조국에 대한 순수성이 함께 있다는 점은 학병 탈출로 이미 증명된 것이었다. 미군 사령관은 한국의 학도병들이 얼마나 조국 광복을 염원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제 학도병들에게 남은 일이란 미군 사령관의 최종 명령을 받는 것밖에는 없었다. 지대 사령관 사젠트가 작전 시기와 절차를 최종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곤명 사령부로 갔고 그들은 사령관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장준하를 포함한 4명의 대원은 경성 지역에 배치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무선 암호에 능한 노능서와 권총 명사수 이계현, 권투 선수 출신 김성환 등이 같은 조였고 장준하는 정보와 조직 관리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들은 살아남으리라는 생각 같은 것은 아예 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장준하는 조국에 바칠 한 장의 수표를 준비해 놓고 있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그것은 그의 생명 수표로서 발행인은 장준하이고 결재인은 대한민국이 되는 셈이라고 여기며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해 하며 내심 각오를 다지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장준하는 말없이 지대장실에서 나왔다. 김준엽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배웅하며 말했다.
"내가 대장님 면담을 한 번 주선해 보겠어요."
"고맙소, 김 동지."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의 실상과 이에 도전하는 매혹적인 인간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