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세상은 똑똑한 사람들의 의해 이끌려 간다. 삼성 그룹의 이건희 전 회장은 천재 한 명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세계 문명은 똑똑한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어 왔고 우리가 누리는 모든 편리한 과학과 문명은 천재들의 수고의 결과이다. 천재를 천재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인류가 해야 할 일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똑똑한 사람들이 많다. 교회나, 혹은 어떤 단체나 잘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좋은 현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잘난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모두들 잘났기 때문에 시기가 있고 다툼이 있다. 모두가 잘난 사람이 되기보다는 못난 사람을 잘 나게 만들어 모든 사람을 잘되게 만드는 공동체가 되면 좋을 텐데 모두가 잘나서 서로 힘들게 만든다.
내가 목회를 시작하면서 일관된 나의 기도제목은 일평생 어수룩한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잘난 목사도 똑똑한 목사도 많다. 그러나 나는 좀 바보 같은 목사가 되고 싶었다. 다른 분들은 목회에는 프로가 되어야 한다고 충고해 주었지만 나는 프로보다는 아마추어의 정신으로 목회를 하고 싶었다.
이제 목사가 된 지도 20년이 넘었는데 나는 아직 바보가 되지 못했다. 정신에서는 아마추어의 모습은 이미 상실해 버렸고, 모습에는 아마추어도 아니고 프로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이다. 바보 목사가 되고 싶었는데 바보 목사도 천재 목사도 되지 못했다.
바보들의 특징은 자기중심적이다. 자기밖에 모른다. 남을 생각하지 않는다. 행동이 미숙한 것은 고사하고라도 이들의 사고는 자기가 아는 것밖에 할 줄 모른다. 남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세상에는 바보들이 많이 있다. 남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부동산 투기로 한 몫을 잡아 보려는 사람들이 그렇다. 집단 이기주의 의해 조금도 손해 보려고 하지 않고 이것이 관철되지 않을 때에는 폭력도 불사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한국의 대부분의 경제인들과 정치가들이 바보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짜 바보가 아니다. 천재로 가장한 바보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바보들이 아닌 진짜 바보가 되고 싶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교인들을 모두 바보로 만들고 내가 아는 사람들을 전부 바보로 만들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바보이다. 내 주변에는 바보들만 몰려들고 그 바보들과 어울리고 싶다. 그들과 밤을 지새우며 가슴 속에 파묻힌 사연들을 들으며 같이 뒹굴면서 바보스러운 삶을 공유하고 싶다.
바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 바보이기 때문에 당하는 불이익이 많다. 주위에서 바보라는 멸시의 손가락질을 당해야 하고 짓밟으면 짓밟혀야 되고 나의 것을 빼앗겨도 말 한마디의 항의도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을 감수하면서도 바보가 되고 싶다.
내가 바보가 되고 싶어서 그런지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은 거부감이 생긴다. 바보는 천재에 대하여 질투를 느끼기 때문인 모양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집스러운 바보의 자존심이다. 저 잘났다고 떠드는 사람 앞에서는 그에게 실망 주지 않기 위해서 그냥 들어주지만 한심함을 금할 길이 없다. 나는 인간의 얄팍한 수단으로 얻은 성취에 도취되는 약아 빠진 성공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하느님의 길이 아닌 방법은 끝까지 사절하고 승리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 설령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명하신 길을 따라가서 하는 실패라면 기꺼이 하고 싶다. "이런 실패는 자랑스러운 것이다 너희도 불행한 성공보다는 행복한 이런 실패를 하라"고 떳떳하게 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성공으로 인간의 가치를 측정하는 이 시대의 풍조를 거스르고 싶다. 성경에는 바보가 많다. 노아는 화창한 날에 홍수가 나서 세상은 멸망당한다고 산꼭대기에다 120년이나 걸려 큰 배를 지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 한마디에 따라 고향을 떠나 타국으로 이주하면서 고생을 자처하였다. 요셉은 억울한 일을 당해 감옥에 가도 변명 하나 하지 못한 정말 바보다. 호세아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창녀를 아내로 맞은 바보다. 다니엘도 느헤미야도 고집스럽게 바보의 삶을 살았다.
세례요한은 고생을 자처하며 바보스러운 생활만 하면서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만 골라 하다가 개죽음을 당했다. 바울도 그 잘난 가문과 학식과 지위를 다 버리고 일평생 바보스러운 삶을 살았다. 시대의 풍조를 거스르며 신사참배를 거절해 죽어간 주기철 목사님도, 자기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님도, 이미 통일이 왔다고 민족 통일의 꿈을 노래했던 문익환 목사님도 영락없이 다 바보들이다.
나는 이 바보들이 부럽다. 나도 그들처럼 철저한 바보가 되고 싶었는데 바보가 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고 부러움의 대상인 천재보다는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고 오히려 멸시하고 깔보는 바보가 나의 선망의 대상이다. 오직 하느님 한 분만 알아주면 만족해하는 그 바보가. 그러나 바보가 되려는 것 때문에 진짜 바보가 아닌 사이비 바보로 남을까 그것이 두려울 따름이다.
어느 곳에서나 울고 싶을 때 울고 노래하고 싶을 때 콧노래 부르고 더울 때 옷을 훌훌 벗어버리는 수치도 겸손도 사랑도 모르는 그런 사람 다른 사람 걸어갈 때 서있으면 어떠하리 거울 속의 나를 보고 몰라본들 어떠하리 어제도 오늘도 감각도 의식도 생각 없는 그런 바보가 되고싶다 마음이 모자라서 흡족한 사람 나 너 너 나 무엇을 따져보리 아무 것 채울 것도 비울 것도 없는 것을. -조영희 '바보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