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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정의로워야 하고 엄정해야 한다. 조선의 사관들에게는 역사 서술의 양대 원칙이 있었는데, 먼저 '춘추대의'라 하여 역사의 정의성을 지향하면서 다음으로는 '춘추필법'이라 하여 역사의 엄정성을 추구했다. 그들은 정의성과 엄정성을 바탕으로 이실직서(以實直敍, 있는 그대로 서술함)하는 것을 준칙으로 삼았다.

한편 역사는 정의롭지도 않고 엄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 인식에는 과거와 미래, 객관과 주관 등이 결합된다고 말한다. 그는 역사가의 일차적 관심은 '사실'에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가 역사에서의 사실을 중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역사가가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읽을 때 책의 내용보다 책을 쓴 역사가를 일차적으로 살펴야 한다. 이것은 그의 나라 영국에 전해지는 속담처럼 '모든 것은 누가 말하는지가 중요하다'는 뜻과 상통한다.

이런 점에서 27일부터 일제히 시작된 서울 고교생 대상 역사 특강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날 강사들의 강의 내용을 보니 그들은 기본적인 사실(史實)조차 알지 못하는 문외한들이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강사들의 질이 낮다.

일단 그들은 피해의식이 심해 보인다. 그들은 역사의 반성을 역사의 자학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그들이 말하는 역사는 사실보다는 풍문에 더 의존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역사는 미래보다는 과거에 집착하는 모습을 띤다. 단적으로 말해서 19세기의 강사가 21세기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형국이 되고 만 것이다.

이 글에서는 역사특강에 나타나는 이념의 편향성이나 정치적 주관성을 문제 삼지 않으려 한다. 이 글은 특강에서 범해지는 객관적 사실의 오류만을 지적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강사들은 이념적 편향성으로 인한 역사 왜곡 이전에 기본적인 실력 미달에 기인하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강위석 강사] 논점일탈과 논거 박약

강위석 강사(71)는 경남 마산 출생으로 수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시인이자 언론인이다. 그는 중앙일보 논설 고문을 역임했다. 그의 경력이나 활동 내역 어디에도 역사와 관련되는 점은 없다.(앞서 말한 대로 역사를 볼 때는 역사가를 먼저 살펴야 하기에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는 것이니 양해 바란다.)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큰 공적은 사회를 혼란으로부터 지켜낸 것입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도 학교에 다니게 한 것입니다. 6·25전쟁이 계속되고 있다면 무슨 수로 학교도 다니고 그렇게 합니까?" (강위석, '세계경제와 자유화의 물결')

일단 '세계경제와 자유화의 물결'이라는 주제 강의에서 박정희 예찬이 나오는 것은 논점이탈처럼 보인다. 또한 여기서 '박정희 대통령의 공적이 사회 혼란으로부터 지켜낸 것'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호하다. 박정희가 4·19 이후의 (혼란한)사회를 5·16 쿠데타로 바로잡았다는 건지 아니면 재임 기간에 그리했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먼저 그것이 5·16을 의미한다면, 5·16 직전 즉 4·19 이후가 혼란한 사회였는지 아니면 민주화와 통일을 열망하는 분위기가 고조된 자유로운 사회였는지 판단하는 것은 강사의 주관이라고 해 주자. 강사가 시인이라서 하는 말인데, 소설가 최인훈 같은 이는 명작 <광장>은 '4·19가 가져다 준 빛나는 시간'이 없었더라면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박정희가 '재임 기간'에 혼란으로부터 이 사회를 지킨 것이라는 의미라면 이것은 객관적 사실과 크게 어긋난다. 박정희 재임 220개월 중 105개월이 계엄· 위수령 등의 비상사태 상황이었다. 또한 이 기간에 투옥· 검거된 인원은 1만 4000명에 달한다. 다시 말해 박정희 재임 기간에 한국 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강사는 "6·25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면 무슨 수로 학교에 다니겠느냐"고 했는데, 이것은 마치 박정희가 6·25전쟁을 끝낸 것처럼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박정희가 아닌 이승만은 휴전협정 당시 전쟁을 계속하자고 주장하기는 했다.) 게다가 이것과 '날 때부터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학교에 다닌 것'하고 무슨 연관이 된다는 말인지.

'6·25전쟁'이라는 용어도 시대착오적이다. 역사상 전쟁이 시작된 날짜로 전쟁 명칭을 삼는 예는 없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이 전쟁을 6·25전쟁이라고 하지 않는다. 북한에서는 '조선전쟁'이라고 하고 남한 고교생들은 '한국전쟁'이라고 배워 알고 있을 것이다.

[이동복 강사] 2차대전의 역사관과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이 27일 오전 서울 천호동 성덕여상에서 고3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에게 통일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특강을 하고 있다.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이 27일 오전 서울 천호동 성덕여상에서 고3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에게 통일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특강을 하고 있다. ⓒ 권우성

정치학과 신문학을 전공한 이동복 강사(71) 역시 역사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박정희 시절 중앙정보부, 전두환· 노태우 시절 국가안전기획부에 근무한 이력이 있다.

"38선이 그어지지 않았다면 한반도는 전부 소련군의 장악 하에 들어가 여러분은 텔레비전에서 보는 김일성 광장의 북한 어린이들처럼 돼 있을 것이다. 38선 때문에 여러분은 공산주의 치하로 들어가지 않고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이동복, '우리에게 통일은 무엇인가')

이 글로만 볼 때, 강사는 강의 주제인 '통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 반대인 '분단'에 대해 말하기로 작심한 것 같다. 그런데 강사의 말에 의하면 분단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공산 치하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 된다. 강사가 분단을 옹호하는 것을 보면 한국의 분단에 미국이나 이승만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전후 분단국의 세계사를 살피지 않은 주장이다. 2차대전 후 분단을 택하지 않고 신탁통치를 수용한 오스트리아는 진작부터 자유민주주의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 있다. 우리처럼 분단된 나라는 독일인데 독일은 전쟁의 패전국이었다. 그럼에도 뒤늦게나마 통일을 이루었다.

사실 분단되었어야 할 나라는 (소련이 홋카이도를 미국에 요구한) 패전국 일본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우리는 패전국도 아니면서 분단되었고 지금은 일본은 물론 오스트리아나 독일보다 경제 형편도 열악하다. 이런 점에서 분단을 옹호하는 논리는 분단을 비판하는 논리보다 취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강사는 이어 "6·25 북침설은 북한도 내놓고 주장하지 않는데, 남쪽에서 북한을 편드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후, "동국대 강정구 교수 외 많은 사람이 그런 주장을 한다"고 강의했다.

필자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6·25북침설'을 주장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다만 한국전쟁을 통일전쟁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이 보았으며 필자 역시 한국전쟁은 외세에 의한 내전이자 통일전쟁이었다고 본다. 전쟁 초기에는 김일성도 통일을 위해 내려온 것이고 전쟁 막판에는 이승만도 휴전에 반대하면서 '휴전을 하면 통일을 이룰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기 때문이다.

강정구 교수는 한국전쟁을 통일전쟁이라고 했지 6·25 북침설을 제기한 적은 없다. 그런데 강사는 이런 사람이 '많다'고 말한다.

사실 강정구 교수는 한국전쟁의 시작을 6·25로 보지 않고 이승만이 좌익 전면 토벌을 선포한 1948년의 '2·7 구국투쟁'부터라고 보는데, 이것은 미국 시카코대 부르스 커밍스가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주장하는 바와 비슷한 관점이다. 비판을 하려면 상대의 주장을 제대로 제시한 후에 해야지 상대 주장을 허술하게 왜곡해 놓고 하면 안 된다. 논리학에서는 이런 비판 방식을 '허수아비공격의 오류'라고 한다.

"분단을 미국이 주도하기는 했지만 삼국시대 등을 생각해 볼 때 본래 한반도는 대부분 분단국가였다."

강사는 한반도의 역사에서 일부를 전부인 양 말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한반도는 부족국가 시대에는 여러 통치 구조가 있었고, 고대국가 시대에 들어 삼국이 정립한 후, 676년 신라가 평양· 원산 이남을 통일함으로써 북에 발해를 둔 남북조시대를 거친 후 고려와 조선왕조 장장 1000년을 단일국가로 유지해 왔다.

특히 조선은 518년을 이어온 세계 최장의 왕조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한반도는 역사가 진행될수록 통일을 지향해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48년의 분단은 역사적인 퇴행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석복 강사] 마당쇠 같은 주장이 딱해 보여

 서울시내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현대사 특강'이 시작된 가운데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 대동세무고등학교에서 이석복 전 보병 제5사단장이 '한국전쟁과 한미동맹 관계'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서울시내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현대사 특강'이 시작된 가운데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 대동세무고등학교에서 이석복 전 보병 제5사단장이 '한국전쟁과 한미동맹 관계'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 유성호
이석복 강사(65)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노태우 시절 한미연합사 작전처장과 5사단장을 지낸 예비역 소장이다. 그의 저서나 논문을 볼 때 역시 역사 전공자가 아니다.

그는 '한국전쟁의 기원과 미국의 역할'이라는 주제 강의 모두(冒頭)에서 학생들에게 "우리의 주적은 미국인가 북한인가?"를 물었다. 그런데 이것은 두 가지 전제가 참이어야 가능한 질문이다. 첫째 '우리에게 주적이 있다는 것'이 참이어야 하고, 둘째 '주적이 있다면 미국이나 북한 둘 중의 하나여야 한다는 것'이 참이어야 한다.

흔히 연역이라고 하는 이 추론 방식은 전제가 참이어야 결론도 참이 보장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런 전제를 고찰하지도 않고 곧장 학생들에게 물은 것이다. 이런 질문 방식을 논리학에서는 '복합질문의 오류'라고 한다.

이 강의를 들으며 학생들은 거의 호응하지 않고 졸아서 강사가 야단을 쳤다고 하는데, 강사는 야단치기에 앞서 왜 학생들이 그렇게 심드렁했는지를 알았으면 한다. 그는 학생들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당시 미국정부 고위층에서 소련의 한국 진격을 멈추는 선을 만들라는 명령이 있었고, 이에 따라 미 7사단이 한국에 들어와 38선을 그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강사는 38선이 소련의 진격을 막기 위해 미국이 만든 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38선은 강사의 말처럼 된 것이 아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미·영·소가 한국 군정을 합의한 후 이를 카이로선언에서 재확인하고, 그 후 연합군 참모장 공동회의에서 미· 소 분할 점령을 약정했다. 이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자 포츠담선언에서 38선을 기준으로 하는 분할 점령이 구체화된다. 얼마 후 미 국방성이 38선을 미·소 군사분계선으로 하자고 제안하고 소련 측이 이에 동의하여 확정한 것이다.(이상은 백과사전에도 다 나와 있는 역사적 상식에 속한다)

"당시 휴전협정이 시작될 때 북한은 개성에서 하자고 했고, 미국은 원산에 정박해 있는 덴마크의 병원선에서 하자고 했는데 결국 개성으로 정해졌다. 왜 그렇게 쉽게 북한의 의견을 따랐는지 모르겠다. 아마 미국에도 친북한 세력이 있었던 것 같다."

 27일 오전 서울 대동세무고등학교에서 열린 서울시교육청의 현대사 특강은 많은 학생들을 졸게 만들었다.
27일 오전 서울 대동세무고등학교에서 열린 서울시교육청의 현대사 특강은 많은 학생들을 졸게 만들었다. ⓒ 박상규

휴전협정은 당시 소련 부외상 겸 유엔 대표 말리크가 1951년 6월 3일 미국 CBS 방송을 통해 제안했고, 이에 워싱턴의 지시를 받은 미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이 화답하면서 회담 장소로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 선상을 제시하니까, 북측이 7월 1일 장소를 개성으로 수정 제안한 것을 유엔군이 수락하여 7월 10일 1차 회의를 개성에서 가진 것이다.(이후 판문점으로 옮김) 또한 휴전협정 장소를 합의해 준 일이 어떻게 곧장 친북한 세력이 되는 건지. 강사 말대로라면 미국 리지웨이 사령관은 곧 친북한 세력이 되는 셈이다.

강사는 "6·25전쟁에서 미군 3만 7천 명이 전사했고 약 10만 명이 다쳤다.... 그들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미국에 대한 보은을 강조했다. 강사는 한국전쟁에서 죽거나 다친 한국인은 4백만 명이 넘는다는 사실도 학생들에게 말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마지막으로 강사는 "잘 아는 정보통으로부터 들었다"고 하면서 "김정일이 남한 사람 2000만 명을 숙청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강사도 참 딱하지만 이런 강의를 들어야 하는 한국 고교생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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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필자 김갑수는 소설가로서 오마이뉴스에 역사팩션 <제국과 인간>을 연재 중입니다.



#역사특강#강위석#이동복#이석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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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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