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원(農園)의 화가 '이대원 3주기전'이 갤러리현대강남에서 12월 14일까지 열린다.
이대원(李大源, 1921~2005)화백의 그림은 자연을 사랑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잘 표현했기에 그를 알든 모르든 누구나 좋아할 것 같다. 대지처럼 꿈틀대는 자연의 힘과 인간적 체취가 물씬 풍기는 그림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그만큼 그의 그림은 우리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그는 1921년 파주에서 큰 농원과 넓은 토지를 가진 넉넉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대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집안의 유망주가 되어 출세 가도를 가는 것 같았으나 그의 속셈은 어디까지나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1938년 17살에 '언덕 위에 파밭'으로 조선미전에 입선했고 미술에 대한 남다른 재주를 보였지만 미술을 전공하지는 못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나 집안의 사정으로 보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작가는 1975년에 "자연의 힘에 새로운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것 같다. 나는 한 그루 나무, 한 포기 풀, 한 줌의 흙을 사랑스러운 마음과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이들은 깊은 곳으로부터 화심(畵心)을 이끌어내고 있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자연을 만나 맛보는 황홀감을 한 그루 나무와 한 포기 풀 한줌의 흙을 통해서 발견했다는 말에서 그가 얼마나 자연과 애틋하게 연애하듯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고 깊이 있는 소통을 하고 그 속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발굴하는 발견자인지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그의 미술의 출발점은 마음에 여백을 두고 관조하는 자세로 자연에 대한 그리움을 보다 승화된 이상화된 세계로 끌어올리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일단 자연에서 받은 직관적인 감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형을 통해 자신을 걸러내어 평면이라는 질서를 추구함으로써 재해석된 자연의 창조적 과정이 우리 앞에 놓여진다. 그것은 평범한 자연이 아니라 '자신에 의해 비로소 자연일 수'있는 의미를 획득한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가 그린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서 재해석된 자연이다. 그는 자연의 힘과 색을 살리면서 그만의 색채와 조형세계를 독창적으로 보여준다.
하여간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박수근, 이중섭, 장욱진, 김환기 등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다. 그의 그림은 어디에서 봐도 알 수 있다. 그만큼 독창적이다. 그리고 볼 때마다 어떻게 저런 색채를 낼 수 있는지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연에서 포착한 우주의 기운 생동을 자연스럽게 표현했기 때문이리라.
그의 그림을 얼핏 보면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많이 다르다. 보이지 않게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된다. 위 2000년 작품은 그의 그림경력 50년을 잘 녹인 높은 경지의 대작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회가 민주화될수록 그의 색채는 밝아진다. 그는 정치적 발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색채를 통해서 사회적 발언을 했다고 해도 좋은 것이다.
주변에서 '제한된 소재를 계속 그리는 일에 싫증이 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작가는 "나는 오히려 제한된 소재 속에서 더욱 다양하고 열정적인 경험을 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자연을 깊이 관찰하고 우주와 교감하며 그 속에서 무수히 다양한 변주를 시도할 수 있다는 뜻이리라.
그림보다 사람이 더 아름다운 작가
그의 그림은 단번에 사람을 사로잡지만 그의 인품은 그림보다 더 사람을 사로잡는다. 그와 가까이 지낸 분이나 그의 제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혹시나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면 열린 생각으로 조금이라도 나누려고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시의 작가 중 재산을 유산으로 꽤 많이 받은 사람도 있겠지만 "작가로 사는 것은 멋지지만 작가로 먹고 산다는 것은 끔찍하다"는 말처럼 대부분의 경우 빈털터리일 확률이 높다. 그는 그런 후배들 전시회에서 참석하여 소품 하나라도 구매해주며 그들에게 힘을 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일본 미술평론가 마쓰하시 료오타는 '관용의 미학'에서 "제자나 후배의 개인전에서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꼭 한 점씩 손수 구입했다. 이대원 선생의 집 지하실에 들어가 보면 제자의 작품컬렉션과 함께 옛날부터 인연이 있던 사람들과의 기념품으로 장식되어 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화단의 신사'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그의 후배들이나 그가 홍대교수와 총장시절 배출한 이두식 교수나 배병우 사진작가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제자들에게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이두식 교수는 "제자나 후배를 마치 친구 대하듯 격의 없이 대해오신 점을 생각하면 삶을 통해 구도하는 분 같다"라고 했고, 배병우 작가는 그를 떠올리는 단어로 "혜화동, 파주농원, 구미산, 배나무, 한국최초 독일전, 창경궁, 조선자기, 장롱, 뒤주, 까치호랑이, 서당책상, 놋그릇, 김원룡, 최순우, 5개 국어, 홍대총장, 예술원원장, 문화대사" 등을 들기도 했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 '정물'을 보자. 그가 얼마나 전통공예 등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자수, 나전칠기, 서당책상, 놋그릇, 뒤주 등을 하나도 예사로 보지 않고 그 속에서 한국적 색채와 특징을 찾아내 작품을 통해 현대화하려고 한 흔적이 쉽사리 발견된다.
그는 또 배병우의 증언처럼 50년대 영어·불어·독어·중국어·일본어 5개 국어를 구사하는 드문 지성인이다. 훌륭한 매너와 언어로 외국인에게 한국문화를 홍보하는 대사의 몫을 톡톡히 했다. 또한 아시아재단의 지원을 받아 한국의 최초의 상업화랑인 반도화랑을 운영하면서 거기서 한국작가들을 외국관광객들에게 널리 소개하기도 했다.
지난 11월 그의 추모 3주기에 생존에 친분이 두터웠던 미국조각가 탈 문 스트리터(T. M. Streeter)가 그의 파주작업실 앞에 추모조각을 헌정한 건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60~70년대 단색추상화와 미니멀리즘이 한참 유행인 한국화단에서 거의 유일하게 그런 흐름에 개의치 않고 우리가 어려서부터 봐온 친숙한 자연풍경을 그렸다. 그런데 이런 화풍은 전혀 지루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으로 그린다는 무거움을 떨쳐버리고 무심하게 붓을 스치는 방식이어서 관객에게 경쾌함과 자유로움을 더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는 '구상'을 그리면서 '추상'이었고 '서양물감'을 쓰면서 '동양화'였고 눈에 보이는 '자연'을 그리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적 세계'를 추구했다. 그래서 그만의 독특한 화풍이 그의 작품 속에서 변함없이 빛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점은 그가 50년대 말기에 서유럽미술관을 둘러보고 나서 자극을 받아 현대성을 터득하면서도 동시에 한국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한국적 빛의 향연 속에 너울대는 색의 잔치
하여간 미술을 전공하지 않는 그는 화법의 기본인 원근법을 무시해가며 마음 흐르는 대로 그렸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림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그의 작품세계를 "고요한 가운데 조용히 스며드는 한국적 빛의 향연 속에 너울대는 '색의 잔치'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어떨까싶다.
결국 그의 그림에는 동서의 통합적 정서가 다 담겨 있다. 조선시대의 산수화의 전통이나 청의 '묘화법'도 서양의 인상파나 '점묘법'의 흔적도 엿보인다. 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색채, 독창적 화법, 강렬하고 선명한 구도, 경쾌하고 생동적인 붓질, 서양적 화사함과 함께 동양적 소탈함 그리고 현대미와 자연미가 잘 통합되어 있다.
덧붙이는 글 | 갤러리현대강남 02)519-0800 www.galleryhyundai.com 12월14일까지 입장무료 월요일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