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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 "소련을 전승국으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소"

독일 엘베 강 지류인 하펠 강 연변에 위치한 브란덴부르크 궁전은 유서 깊은 도시 포츠담의 자랑거리였다. 오늘날 시설의 대부분이 호텔로 사용되고 있는 이 궁전에서는 미· 영· 소 3개국 정상이 모여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1945년 7월 17일, 스탈린은 신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만난다. 스탈린은 루스벨트와는 면식이 있었지만 트루먼과는 첫 만남이었다. 트루먼은 루스벨트와 달리 약간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스탈린을 대했다. 그는 스탈린에게 더 이상 대일본전 참가를 종용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것은 물론 원자폭탄의 성공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트루먼의 여유가 다소 의아했지만 평소 해오던 대로 지연 전략을 구사하기로 했다.

"일본이 우리에게 평화교섭 요청을 해오고 있어요. 이런 마당에 당장 선전포고를 하기가 어렵소."

트루먼은 이미 도쿄 통신을 청취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머쓱해진 스탈린이 다시 말한다.

"우리도 몇 주일 이내로 만주를 통해 일본을 공격할 거요. 그러니 미국도 우리의 희망을 저버리지 마시오."
"귀국의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알고 있겠지만 다시 알려 드리지요. 일본의 북쪽 섬 홋카이도를 쪼개서 우리에게 달라는 것입니다. 패전국 일본은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

이튿날 아침 트루먼은 처칠을 별도로 만나 물었다.

"스탈린에게 우리 최신 무기를 알릴까요?"
"무익한 일이지요. 일본은 곧 항복할 테니까요. 공연히 말해 소련이 당장 연합국으로 들어와 전후에 전승국 지위만 차지하게 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다만 일본의 항복을 더 빨리 받아내려면 소련의 참전보다는 일본에게 천황제 유지를 보장해 주는 것이 좋겠소이다."

점심을 먹고 난 후 트투먼은 스탈린을 다시 만났다. 하지만 그는 처칠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우리가 만든 강력한 폭발물로 전쟁은 곧 종결될 것이오."

트루먼의 기대와는 달리 스탈린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은 채, "유효하게 사용되기를 바라오"하고 냉담히 말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스탈린은 트루먼에게 질문을 해야 할 까닭이 없었다. 소련의 첩보 기관은 이미 1943년부터 맨해튼 프로젝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련 역시 독자적으로 원자탄을 개발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날 저녁 트루먼은 처칠, 스탈린 등과 13개 조항의 합의 선언문을 전 세계에 발표한다. 이른바 포츠담 선언이라는 것이었다. 포츠담 선언은 일본에게 무조건 전쟁 종결과 항복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전후 일본 영토를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와 그 외 도서들로 제한했다.

또 전범자 처벌과 전쟁 주도 세력 제거를 다짐했으며, 한반도와 대만에서 일본군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그리고 일본의 국체 유지는 평화를 원하는 일본 국민들의 자유의사를 존중하여 결정될 것이라고 했다.

일본 군부가 항복을 반대한 이유

일본의 도고 외상은 포츠담 선언문을 검토하고 일말의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는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항복이라는 용어 대신에 '전쟁 종결'이라는 말을 썼다든지, 국체를 일본 국민의 의사대로 하겠다는 언급은 그들이 걱정해 왔던 것과는 다른 것일 수도 있었다. 일본 군부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천황제의 유지였다. 그런데 선언문에는 천황제를 부정하는 문구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도고 외상은 스즈키 수상에게 외교 전문가로서 자신의 견해를 설명했다.

"포츠담 선언을 당장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표현이 애매하거나 불확실한 것을 확인하면서 협상을 전개해 볼 수 있는 고무적인 내용입니다." 

그들은 군령부총장과 회합하기로 했다. 군령부총장 도요다 제독은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 총리실로 들어왔다.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즉각 발표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지요?"

수상의 물음에 도요다는 즉각 대답했다.

"천황을 몰락시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본의 영원한 몰락과 같습니다."

일본 군부가 항복 거부의 명분으로 시종일관했던 것은 천황제의 유지였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표면적인 명분이었다. 일본 군부는 한반도와 대만을 놓기가 싫었던 것이다. 한반도와 대만의 총독 자리는 일본 군부에서 독식해 왔던 그들만의 배타적 기득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어 열린 각의에서는 군부의 강경론과 정부의 온건론이 절충되었다. 그들은 포츠담 선언에 대한 공식 반응을 보류하면서 신문에는 기사를 작게 취급하도록 하며, 소련과 마지막까지 협상을 벌여 보는 것으로 결정했다. 도고 외상은 지금 소련과 외교 교섭이 진행 중임을 강조하여 성급한 강경론에 제동을 걸었다. 그는 외교관으로서의 전문성과 관리로서의 소신을 함께 피력한 것이었다.

이어 도고는 천황에게 가 포츠담 선언을 설명하고 천황으로부터, "이런 내용이라면 원칙적으로 수락할 수 있다"는 말을 받아냈다.

사실 일본은 이 시점에서 항복 방침이 결정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스즈키 수상의 기자회견에서 빚어졌다. 스즈키는 평소 언어 구사력이 빈약하여 이따금 빈축을 사거나 웃음거리가 되곤 했던 인물이었다. 그 날 모인 기자들의 관심은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온통 모아져 있었다.

스즈키는 외무성의 의견이 포츠담 선언에 대한 '고려'나 '검토'임을 알고 있었다. 반면 군부의 주장은 '무시' 아니면 '거절'이었다. 그래서 각의에서는 일단 절충안을 낸 것이었다. 절충안의 취지라면 포츠담 선언에 대한 반응은 '보류' 또는 '유보'가 적합한 어휘였다. 하지만 그는 너무 긴장했는지 이 어휘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영어로 '노코멘트'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마당에 영어를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보류' 또는 '유보'라고 해야 될 것을 '묵살'이라고 말해 버렸다.

언제나 화끈한 기사를 고대하는 저널리즘의 속성대로 마이니치 신문은 당장 '가소로운 일'이라는 표제를 뽑았고, 아사히 신문은 '성공을 위한 정부의 결심을 더욱 굳게 할 따름'이라고 썼다. 다음날 아침 미국 신문들도 대부분 '일본, 연합국의 최후통첩 공식 거부'라고 보도했다.

세 도시 기상 모두 흐림

미국 합참본부는 즉각 원폭 투하 건의를 올렸고 트루먼은 이를 승인했다. 사실 마셜이나 맥아더 같은 군부 실력자들은 본토 폭격만으로도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으니 원폭 사용을 하지 말자고 주장해 오던 차였다.

1945년 8월 6일 새벽 2시 27분, 필리핀에서 멀지 않은 티니안 공군 기지에서는 4.4톤짜리 폭탄을 실은 비행기 에놀라게이가 이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5시 22분 에놀라게이는 합류가 약속되어 있었던 호위기 B- 29기를 상공에서 만났다. 이미 기상 관측 비행기 세 대는 일본 본토 상공에 머무르고 있었다.

오전 8시 15분부터 기상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히로시마 흐림, 고쿠라 흐림, 나가사키 흐림.'

원폭 투하 예정 도시가 모두 흐린 날씨였다. 기내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들고 있었던 기장은 더 세밀한 기상 보고를 요구했다. 검토 결과 기장은 그나마 히로시마가 낫다고 판단했다. 에놀라게이는 히로시마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의 실상과 이에 도전한 매혹적인 한국인들이 소개됩니다.



#에놀라게이#히로시마#스탈린#트루먼#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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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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