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억하심정 때문일까. <조선일보>가 연일 한국은행을 동네북 삼고 있다. 은행과 기업들은 돈이 말라 아우성인데, 한국은행은 나 몰라라 하고 있다며 한국은행을 거칠게 비난하고 나섰다.
<조선일보>는 12월 1일 1면 머리기사로 한은을 '조졌다'. 미국이나 유럽의 중앙은행들과 달리 비상상황을 맞아 충분한 자금공급을 기획하고 있지도 못하고, 그나마 세운 자금공급 계획의 집행의지도 약하다는 것.
<조선일보>는 그 구체적인 사례로 정부와 한은이 133조원의 유동성 계획을 발표하고도 지금까지 50조원대의 자금만 공급하고 있다는 점, 10조원 규모의 채권시장 안정펀드에 5조원의 자금만 지원하겠다고 한 것, 정부와 은행권에서 25조원의 은행채 매입을 요청했지만 10조원만 매입해주겠다고 한 것을 들었다.
한은 비판에는 이헌재 전 총리와 정부당국자들도 동원됐다. "물가안정을 최우선적으로 하느라 위기에는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정부 당국자들)거나 "중앙은행의 독립성에만 치중하면서 보수적이고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새로운 내용은 거의 없다. 지금까지 한국은행이 유동성 공급을 더 확대해야 한다는 정부 입장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일보>는 이를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사실은 <조선일보>가 그렇게 보도한 것이 '새삼'스런 일이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2일자에도 한국은행이 "너무 한가해 보인다"는 비판기사를 실었다. 상황인식에서나 유동성 공급에서, 그리고 정부와의 공조에서 모두 문제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1일자 기사를 조금 더 자세히 쓴 것이다. 미국 FRB는 은행과 기업을 살리기 위해 기업어음까지 직접 매입해주고 있는데 한국은행은 은행채 매입이나 채권시장 안정펀드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미국은 지난해 GDP 기준 절반 가량 규모의, 유럽연합은 지난해 GDP의 22.4%에 해당하는 유동성 지원을 해주고 있는 반면 정부와 한국은행의 금융시장 지원규모는 GDP 대비 15%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미국은 FRB와 재무부가 긴밀하게 상호 협력 관계에 있지만 "우리 정부와 한국은행은 계속 삐걱대며 잡음을 내왔다"면서 "정부가 은행채 매입, 채권시장 안정펀드 지원 등의 정책을 미리 발표하면 한은이 압박에 못이겨 늑장 대응을 하는 식"이라며 역시 '한은의 늦장대응'을 주로 문제 삼는 듯한 보도태도를 보였다.
한국은행의 '반론'도 보도는 했다. <조선일보>의 이런 지적에 대해 한은 관계자는 "우리나라도 어렵긴 하지만 미국만큼(심각한 상황)은 아니다"면서 미국과의 단순 비교는 적절하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것. 또 지금 시중에 돈이 돌고 있지 않은 것은 '유동성 부족' 때문이 아니라, '신용불안' 때문이라는 것. 따라서 돈을 무작정 푼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앞장서서 기업 구조조정을 하는 등 옥석을 가리면서 금융시장의 잠재적 요인을 제거해야 금리인하나 유동성 공급 효과가 제대로 나타날 수 있다고 반박했다는 것이다.
한국은행 때리기는 강만수 편들기
한국은행이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역시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본격화하자 정부는 처음부터 한국은행에 금리 인하와 은행채 매입 등 유동성 공급을 계속 주장해왔다. 반면 한국은행은 유동성 공급도 공급이지만, 신용위기를 해소할 수 있는 근본적인 처방과 프로세스가 필요하며, 유동성 공급도 차후 그 파장을 고려할 때 신중해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을 취해왔다.
<조선일보> 보도가 느닷없어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정부와 한국은행의 이런 입장 차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는데, 느닷없이 <조선일보>가 한국은행의 유동성 지원 문제를 의제화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는 그동안 경제 운용과 관련한 정부와 한국은행의 줄다리기에서 <조선일보>가 한마디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편을 들어주기로 작심한 것처럼 보인다.
<조선일보>는 그동안 사설과 칼럼에선 강만수 장관의 정책과 행보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런데 돌연 태도를 바꿔 그 타깃을 '한국은행'으로 바꾼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런 것일까?
그동안 경제 실정의 주요 책임 소재는 주로 강만수 장관에게 집중돼 왔었다. 어설픈 외환 시장 개입, 안이한 상황 판단으로 인한 정책 방향의 잘못, 정책 타이밍의 실기 등으로 그 어떤 정책도 더 이상 신뢰를 얻기 어렵게 됐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또 말로는 "지금은 관치금융이 필요한 때"라며 은행들의 소극적인 대출관행에 대해 으름장을 놓기도 했지만, 전혀 말발이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 "백약이 무효"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일보>가 한국은행이 '문제'라고 치고 나온 것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한국은행이 진짜 '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 기업과 금융권에 돈이 돌지 않아 사태가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문제는 정부와 한국은행이 지급보증을 해주고, 총액한도대출까지 늘려주고 있는데도 왜 자금 경색이 풀리지 않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원인 진단에서 한국은행은 '유동성'이 문제가 아니라, '신용'이 문제라는 입장이다. 잠재적 불안요인, 즉 부실을 거둬내는 노력을 병행하지 않는 한 유동성 공급만으로는 지금의 자금 경색을 풀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한은의 이같은 진단이 100% 정답일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상당 부분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히려 문제는 정부가 내놓은 처방이나 대책들 가운데 정작 '신용의 문제'를 풀어나갈 대책이나 처방이 빠져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기도 하다.
이성태 한은 총재만 '보통 이상 역할' 평가
실제 <한국일보>가 30일 학계, 연구소, 시장관계자 등 경제 전문가 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12월 1일자 1면 머리기사)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전광우 금융위원장,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 박병원 청와대 경제수석,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 등 이명박 정부 경제팀 수장 5명 가운데 '보통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이성태 한은총재 단 한명이었다. 한국은행이 지금 이 상황에서 그나마 제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평가에도 <조선일보>가 한국은행의 소극적 자세를 문제 삼으면서 적극적인 '유동성 공급'을 압박하고 나선 데에는 나름대로 정치적 배경도 있어 보인다.
첫째는 우선 당장 급한 대로 돈줄을 크게 풀어야 한다는 정부와 금융권, 그리고 기업들의 '정치적 주문'을 <조선일보>가 충실히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중에야 어떻게 될지언정 지금 당장은 "돈줄을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 이들에게 인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문사의 상업적 이해와도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또 하나는, 일종의 '속죄양' 만들기다. 국내외 경제 여건은 앞으로 더 악화될 개연성이 크다. 어디서 '부실'이 터질지 모른다. 그 파장 역시 얼마나 클지 예측하기 힘들다. 강만수 경제팀 정도가 아니라, 이명박 정부가 정치적 곤경에 처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럴 경우 등에 대비한 일종의 알리바이로 '한국은행'을 걸고 들어가는 전략일 수 있다.
이는 <조선일보>를 넘어서는 '전략'이자 '기획'이다. 1일자에 경제 전문가 설문조사에서 그래도 한국은행이 '보통 이상' 점수를 받았다고 보도한 <한국일보>가 2일자 사설(한은은 시중에 돈부터 돌게 해야)에서 <조선일보> 기사와 똑같이 한국은행이 돈을 더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 그런 경향을 잘 보여준다. 은행과 기업들에게 직접 자금 지원을 더 해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신문들이, 다수의 언론들이 이런 식으로 한국은행을 압박하고 나서면 어떻게 될까? 말할 나위 없이 한국은행은 강만수 장관의 요구대로 한국은행은 충실하게 정부 정책대로 따라 가게 될 것이다.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쪽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결과는? 알 수 없다. 다행히 큰 부실이 터지지 않고 위기국면을 넘길 수 있다면 천만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은 일본의 10년 장기불황이, 또 미국의 이번 금융위기와 경기 위축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국은행이 마냥 공급한 자금으로 연명하던 '부실덩어리'가 그 덩치를 키워 '폭발'하게 되면 그 여파는 더욱 걷잡을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훤하다.
정부는 지금 그런 길로 가자고 한국은행을 재촉하고 있다. 거기에 <조선일보>가 장단을 맞추고 나선 셈이다. 나중에 그 부실이 터질 때 뭐라고 할지도 지금부터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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