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추워야 제 맛이다. 살을 에는 듯 스치는 찬바람에 볼이 얼얼하게 맞아야 따스함에 고마움이 절실히 느껴진다. 추운 계절에 갇혀 보아야 따스한 봄으로 탈출하고픈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나무도 겨울을 거쳐야만 천천히 성장을 하면서 나이테를 만들어 한 계절을 갈무리 한다고 한다. 단조로운 생활 속에 때로는 나무처럼 나이를 먹고픈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어렴풋한 나이테보다 뚜렷한 나이테로 각인하여 새롭게 출발하고픈 마음을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보았을 것이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탈피하는 방법 중 하나. 이름 있는 산을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싶다. 지난달 28일 민주엄마와 함께 광양에서 가까운 남해 금산을 찾았다. 찬바람은 제법 볼을 얼얼하게 만든다.
장갑도 준비하고 속옷 한 벌 더 끼어 입고 산행의 준비를 단단히 하여 출발하였다. 남해대교를 지나자 바다가 보이는 들녘이 푸릇푸릇하다. 벌써 봄이 오는 듯하다. 남해의 특산물인 마늘잎이 해풍을 맞으며 넘실대고 있다. 넓은 논에 마늘과 함께 시금치가 들녘의 푸름을 더하여 주고 있다.
광양에서 출발한 지 40여분, 금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갑자기 남해바다를 볼 수 없게 앞을 막으려는 듯 우뚝 앞을 가로막는다. 10여 년 전에 가본 적 있는 산이다. 직장 동료들과 극기 훈련차 산행을 하였었다. 그때 산행한 기억은 어디에 두었는지 가물가물하다. 남아 있는 기억은 조용한 산길을 올라 호흡이 헉헉거리도록 오른 정상에서 바라본 탁 트인 남해바다. 그 전경은 아직도 기억 속에 선하다.
집에서 늦게 출발한 탓에 쉽게 정상에 오르는 코스를 선택하였다. 복곡 저수지를 지나자 보리암으로 가는 주차장이 나온다. 제1주차장이라고 한다. 그리고 급경사 구불구불한 험한 산길을 조금 더 오르자 산중턱에 2주차장이 나온다. 승용차로 쉽게 산을 오른 느낌이라 산행의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20여분을 걸으면 정상까지 쉽게 갈 수 있다고 한다. 산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남쪽 상주 쪽에서 오르는 것이 좋다.
늦가을의 청취가 느껴지는 산
산 아래쪽에는 울긋불긋 가슴을 물들게 했던 가을단풍이 아직도 남아 있다. 북쪽지방에서는 폭설이 내렸다고 하는데 가을 끝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고운 단풍은 계절의 흐름을 무색케 한다.
너무도 쉽게 오른 산행이라 후회가 된다. 산을 오르는 맛은 뭐니 뭐니 해도 발품을 팔아가면서 이마에서 뚝뚝 떨어지는 땀을 훔쳐내며 등이 촉촉하게 젖어야 하는 건데. 다시 산행코스를 잡아 오르고픈 마음이 머릿속에 맴맴 돈다.
제2주차장에서 보리암이 있는 정상 쪽으로 산행을 시작하였다. 길은 널찍하게 잘 다듬어져있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많다. 다들 가벼운 옷차림이다. 등산 하는 사람들보다는 기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모양이다. 정상 가까이 가자 웅장한 바위들이 시야를 사로잡는다.
금산(錦山 701m). 이름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신라 초 원효대사가 금산을 찾았을 때 갑자기 서광이 비춰서 보광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고려 말 이성계가 백일기도로 영험을 얻어 조선을 세우고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산 전체를 비단으로 두르려 했으나 신하들이 비단 금(錦)자를 붙인 금산이라는 이름을 내리는 것이 좋겠다하여 이후 ‘금산’이라 불었다고 한다. 이 곳에는 문장암, 쌍홍문, 좌선대, 팔선대, 흔들바위 등 자연이 만들어낸 멋진 조각품인 금산 38경과 수많은 전설이 숨어 있다고 한다.
정상이다. 금산 38경중 그 첫 번째인 제1경인 ‘망대(望臺)다. 겨울햇살은 시계의 긴 바늘처럼 금빛 침을 늘어뜨리고 망망 바다를 째깍거리며 정오를 넘어 한 시 방향으로 달려간다. 멀리 상주해수욕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섬들이 정겹게 느껴진다. 이곳에서 보는 일출은 절경이라고 한다. 기회가 있으면 장엄한 일출이 보고 싶다.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 최남단 봉수대로 사용되었으며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나무 아래로 사뿐사뿐 잘도 내려오는 딱따구리
38경을 모두 둘러보려면 한나절로는 부족할 것 같다. 상사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산길을 조용하다. 발밑에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만이 우리 존재를 알린다. 팥배나무, 상수리나무 등활엽수는 나목으로 겨울나기를 하고 있다. 갑자기 "탁탁" 소리에 발을 멈추었다. 설마 딱따구리려니 반심반의하면서 소리 나는 쪽을 살폈다. 오색딱따구리다. 며칠 전 광양 백운산에서 딱따구리를 만났는데 이곳에도 또 녀석을 만날 줄이야 반갑다.
“혹시 이산에서 딱따구리 보셨나요.”
지나가는 국립공원 직원에게 물었다.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청소며 안전예방을 하는 직원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웃음을 짓는다. 산행을 할 때 귀는 쫑긋 코를 실룩 눈은 사방을 경계를 하며 가다보면 뜻하지 않은 횡재를 한다.
녀석은 열심히 나무를 쪼아댄다. 목탁소리처럼 경쾌하게 들린다. 그리고 나무아래쪽으로 사뿐사뿐 내려오면서 먹이사냥에 열중이다. 차윤정이 저술한 <나무의 죽음>에서는 빳빳하게 내린 꼬리는 수직으로 매달릴 수 있는 힘을 주며, 이 꼬리는 딱따구리를 위로 올려주기만 할 뿐 내려오게 할 수 없다. 그래서 딱따구리는 옆으로 움직이거나 위로 오가기만 한다고 기록되어있다. 녀석은 별종이다. 위로 올라가기 보다는 아래로 내려오면서 먹이사냥을 한다.
금산 27경인 ‘상사암’이다. 평평한 바위는 매끈하게 잘 다듬어져 있다.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다듬어진 자연의 힘이 느껴진다. 건너편 보리암을 한눈에 볼 수가 있다. 비극적인 이야기 숨어있으려니 생각하며 도착한 바위다. ‘옛날 상주에 살던 한 사내가 이웃 여인에 반해 상사병이 들어 사경을 헤매게 되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여인은 이 곳에서 사내의 수순한 마음을 받아 들여 둘 사랑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재미있는 러브스토리가 숨어있었다.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나침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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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 금산 지난달 28일 광양에서 가까운 남해 금산을 영상에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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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도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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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암을 뒤로하고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보리암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관음봉 아래에 위치한 암자는 아늑하게 느껴진다. 불경소리가 암자를 뒤덮는다. 멀리 남해바다를 바라보는 해수관음보살의 인자한 모습에서는 자애로움이 느껴진다. 두 손을 합장하고 정성으로 절을 하는 불자들의 모습에서는 무슨 소원을 비는지 진지함이 느껴진다.
관음보살 옆으로 고탑이 눈에 띈다. ‘보리암전 삼층석탑’이다. 비보(裨補)의 성격을 담고 있는 이 탑은 가락국 김수로의 왕비 허태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사리를 원효대사가 이 곳에 모셔 세웠다고 한다.
평범하게 보이는 탑이다. 그런데 나침판을 놓으면 동서남북을 제멋대로 가리킨다. 이금백(사진사, 안내원)씨는 탑 주변에 나침판을 놓아 신비한 현상을 보여준다. 그는 42년을 이곳에서 관광객들에게 사진을 찍어주면서 안내원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나침판이 방향을 틀리게 잡은 것은 이 곳이 기(氣)가 많이 모인 곳이라고 한다. 보리암 위쪽 관음봉 부처님 바위에서 흐르는 기가 흘러 이 곳에 많이 쌓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비스러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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