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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도 아닌 교복자율화의 새 시대(?)를 열었던 80년대, 학교 대신 공장에 가서 돈을 벌어야 했던 나는 마지막 교복세대였다. 동네 누군가 입었던 교복을 얻어입고 중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에 진학하면서 집안 형편상 등록금과 학비 떄문에 중학교를 자퇴하고 공장에 취직을 했다.

공장 기숙사에서 지냈던 나는 집에 갈 때는 동네 사람들과 마주칠까봐 일부러 딴 길로 돌아 다니기도 했고 길을 걷다가 아는 동급생을 보게 되면 일부러 고개를 돌려서 피하기도 했다.

학력 콤플렉스는 학교 가방만큼이나 무거운 짐이 되어 내 어깨를 짓눌렀다. 몇 년의 공장생활을 통해 기술을 익혔지만 그것에 대한 대가는 고작 일년에 몇 만원을 더 받는 정도였고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하더라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생산 부서가 아닌 관리 부서 사원들과는 어울릴 수가 없도록 만든 뭔가 보이지 않는 장벽이 마음 속에 있었다.

기름 때 묻은 푸른 작업복의 나는 '공돌이'였고 베이지색 잠바의 그들은 '회사원'이었다. 드물게 생산현장에도 고졸은 있었지만 실업계의 공고를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87년 이후 민주화와 노동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었던 상황이라서 내가 일하던 공장에도 위장취업을 했던 대학생이 있었는데 얼마 못 가서 신분이 탄로나 쫒겨나기도 했었다.

근처 큰 기업들과 대학교에서 연일 데모가 이어졌고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가운데 내가 다니던 공장은 전경부대의 작전 본부가 되기도 했었다. 그 당시 기숙사에는 조선일보가 배달되고 있었는데 그 신문 보도를 보면서 정말로 나라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 조회 시간마다 사장과 간부들은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동요하지 말고 열심히 일해서 회사도 잘 되고 근로자들도 잘 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인간처럼 살고 싶다는 민주화의 물결은 막지 못했다.

노조가 없었던 공장에서도 여럿이 모이면 밖의 사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우리도 노조를 만들던지 파업을 하자는 말이 심심찮게 돌았다. 어느 날 회사에서는 잔업시간을 줄이고 야식을 제공한다면서 불이 지펴지는 것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회사 측을 압박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들은 의견을 모아서 월급 인상과 잔업과 특근을 줄이고 두 시간 일하고 쉬는 시간을 5분에서 10분으로 늘려 달라는 것과 기숙사 환경개선 등의 요구사항을 생산 부서 간부를 통해 전달했지만, 회사 측의 반응은 별로였다.

우리들은 파업으로 맞서기로 했다. 하지만 단결된 조직도 없었고 방법도 모르는 상황이라 무작정 기계를 세우기로 했다. 다행인 것은 회사에서 지원을 해서 만들어준 사내 축구부가 고참사원을 중심으로 조직 역할을 대신했었다는 거였다. 파업을 벌이기로 한 날 잔업시간에 맞춰서 저녁을 먹고 관리직과 기술부서를 제외한 생산부서 인원 대부분이 근처 산으로 모두 올라가 버렸다.

좀 황당한 파업이기도 했지만  그 당시는 나름 비장한 마음가짐이었다. 몇몇은 술과 음식을 들고 올라와서 장기농성(?)에 대비하는 듯 했지만, 파업은 그날 저녁으로 끝나고 말았다. 회사 측에서는 우리의 요구를 모두 들어줬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요구사항은 정말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라는 정도여서 하룻밤 파업으로 끝난 것 같다.

우리의 요구사항 대로 곧바로 기숙사 정비에 들어갔고 식당의 반찬 등이 개선되었으며 월급도 약간씩 올려주는 성의를 보였지만 회사 측은 더 이상의 문제를 막으려고 했는지 간부 한 사람이 관리직으로 들어왔다.

구로공단의 00전자 출신이라고 했다. 00전자는 그 당시 노동운동의 핵심에 있었던 회사였기에 노무관리 차원에서 영입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렇게 87년 민주화 물결은 작은 공장에까지도 흘러들었고 이후에 우리 사회를 보는 내 시각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회사는 확장을 거듭하며 규모를 늘려갔지만 이후에 공장사람들이나 내 삶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학력에 따른 월급의 차이는 뚜렸했고 시간이 갈수록 그 차이는 더 벌어진다는 것도 알았다.

잔업을 위해 저녁을 먹으러 갈 때 퇴근하는 관리 직원들을 보면서 부럽기도 하고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일 뿐이었다. 그 당시에도 검정고시 학원이나 방송통신테이프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중간에 포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같은 공장의 OO형은 몇 년간 대학 진학을 위해서 새벽에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나의 고민을 듣자 나에게 다시 공부하기를 적극 권유했다.

신설동에 있는 검정고시 전문학원 새벽반에 등록해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전철 첫차를 타고 학원에 갔다가 다시 공장으로 돌아올 때는 콩나물 시루처럼 꽉찬 전철 안에서 몸은 힘들었지만, 대학에 가서 흰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회사원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꾸었다.

학원의 새벽반은 늘 활기가 넘쳤다. 구두닦이부터 사장님까지 교육으로 부터 멀어졌던 사람들로 항상 북적였다. 그러나 개강 때와는 달리 갈수록 사람들 수가 줄기도 했다. 공부를 시작한 그 해 중졸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다음 해에 고졸자격 검정고시까지 합격했다.

합격도 기뻤지만, '무한도전'에 성공할 수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 것에 더 감격했던 것 같다. 학력에 대한 깊은 열등감은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떨쳐낼 수가 있었다. 그 당시 학력에 대한 열등감과 사회에서 왜 차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기에, 쉽지는 않았지만 내 안에 둘러쳐진 벽을 깨고 다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20대 첫출발은 내 무한한 도전정신과 잠재력을 확인시켜 주었다.

덧붙이는 글 | 씁쓸했던 차별의 기억 응모글.



태그:#학력,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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