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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 얘기 써도 돼?"
"뭐?"


"남녀 차별 얘기."
"뭔데?"

"왜 있잖아. 조선시대에나 있었음직한 끔찍한, 아니 슬픈 얘기. 명절 때면 남자들 먼저 밥 먹고 여자들은 남자들 다 먹기 기다려 밥 먹었던 얘기. 그나마 남자들이 먹고 난 밥상, 그대로 물려받아 밥 먹었던 얘기."
"…."

20년도 더 된 케케묵은 얘기를 꺼내니 남편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짐짓 모른 체 한다. 본디 설움을 당한 사람은 그 설움을 오래 기억하지만 정작 설움을 준 당사자는 쉽게 잊어버리는 게 인지상정! 남편 역시 오래된 내 설움에 그깟 걸 뭐 지금까지 기억하냐는 듯 쉽게 한마디 툭 던진다.

"그땐 자리가 비좁아서 그랬겠지."
"자리가 비좁긴. 안방에 상만 하나 더 두면 되는 일이었는데. 그러면 여자들도 '인간답게' 밥을 먹을 수 있었잖아."

여자들도 인간답게라! 정말 그때는 그랬다. 나를 포함한 여자들이 인간답게 밥을 먹지 못했다. 배울 만큼 배운 신여성들이었다. 시대도 무슨 고려시대, 조선시대도 아닌 1987년 현대였다. 또한 첩첩산중에 있는 두메산골도 아닌 큰 도시였다. 그런 화려한(?) 배경에서 여자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여자 목소리가 어디 담을 넘어?

울긋불긋 단풍이 곱게 물든 1986년 가을,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남자는 아들만 5형제인 왕손(?)이라는 전주 이씨 집안의 넷째 아들이었다. 집에는 일본 유학까지 마친 아버지가 계셨지만 경제적인 능력이 없었던 터라 재력을 갖춘 혼자 된 고모가 이 집안의 경제권을 좌지우지하면서 함께 살았다.

그런데 이 고모에게는 '남존여비' 사상이 깊게 뿌리 박혀 있었다. 남자는 무조건 존귀하고 여자는 무조건 비천하다는. 그래서 이 집에서는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귀하게 여겨지고 대접을 받았다. 반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늘 순서에서 밀려났고 대접받는 자리에서도 제외되었다.

남자 목소리는 담 넘어 골목까지 들릴 정도로 크고 우렁차도 문제가 안 되었지만 어쩌다 들린 여자의 큰 목소리는 "어디 여자가?"라는 무서운 고모의 불호령 속에 그만 잦아들곤 했다. 여자들에게는 발언권이 거의 없었다. 여자는 그저 남자의 부속품 같은 존재였다. 여성 인권의 사각 지대였다.

야만적인 너무나 야만적인

결혼 후 시댁에서 처음 맞이했던 명절은 1987년 1월 설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것이 참으로 고약하게 여겨졌던 날이기도 했다. 바로 '밥' 때문이었다.

5형제 가운데 신혼이었던 우리 부부는 결혼한 다른 세 형제 내외, 시동생과 함께 큰 형님네 차례에 참석했다. 그리고 이어진 아침식사 자리에서 나는 이상한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남자들만 밥을 먹는 것이었다. 여자들은 썰렁한 주방에서 잡담을 하거나 식사를 하는 남자들 수발을 들면서 안방을 들락거리고. 

따뜻한 안방에서는 남자들만의 정찬이 벌어지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밥상에 앉은 사람들의 구성이었다. 그곳에는 장성한 이씨네 아들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어린 자식들도 아들이면 무조건 남자들만의 밥상에 참석할 수 있었다. 참 고약했다. 여성으로 그 밥상머리에 참석했던 사람은 시고모와 시어머니가 유일했다. 

새댁이었던 나는 희한한 '그들만의 식사'를 지켜보면서 기분이 나빴다. 심기도 불편했다. 왜냐하면 이 집안에서 여성의 위치가 어떤가를 한눈에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더욱 이해가 안 되었던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남자들이 아침밥을 먹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엔 여자들 차례였다. 주방에 있던 동서들과 여자 조카들이 밥을 먹으러 왔다. 밥상은 이미 남자들의 식사가 끝난 뒤여서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남자들이 남긴 밥그릇도 그대로 있었다. 뭔가 조짐이 이상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남긴 밥 앞에 그대로 앉았고 수저만 새로 놨다. 세상에.

"왜 남자들은 밥을 남겼어? 여자들 먹으라고? 그게 예의였어?"
"무슨, 어쩌다 보니 그렇게 밥을 남기게 되었던 거지."

"옛날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엔 손님으로 가면 그 집 식구들을 위해 밥을 남기는 게 예의였다고 하잖아. 이씨네 남자들이 밥을 남겼던 것도 그거랑 비슷했어?"

다시 기분이 나빠지려고 한다. 속도 울렁거린다.  

"악, 난 그때 토할 뻔했잖아. 내가 먹으려고 하는 밥이 남편이 먹었던 밥인지, 시숙 밥인지 아니면 시동생 밥인지. 그렇게 야만적인 행동을 어떻게 할 수 있었지?"

야만이라는 말에 남편은 심기가 불편해진 듯 헛기침을 해댄다.

"난 결혼하고 처음 맞이한 명절이라 무서운 고모랑 시부모, 시숙 앞에서 말 한마디 못했어. 하지만 그건 정말 야만 그 자체였어. 당신 기억나? 어떤 게 당신 밥그릇이냐고 내가 물었던 거?"

"딸도 못 낳은 바보" 그 말 진심일까

내 결혼을 앞두고 신랑측 부모와 우리 부모가 한 자리에 모인 양가 상견례가 있었다. 그때 내 친정어머니는 사부인이 될 시어머니에게 '귀한' 아들을 다섯이나 낳아서 사랑을 많이 받았겠다고 칭찬을 했다. 1931년생인 친정어머니나 1920년생인 시어머니에게는 아들이 곧 목에 힘을 줄 만한 '권력'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시어머니는 "나는 딸 하나도 못 낳은 바보"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가진 자의 오만이 느껴지기도 하는 발언이었다. 적어도 남근 숭배가 남아 있는 우리 사회에서 딸만 낳은 여자들이 아들을 낳기 위해 드리는 눈물겨운 치성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나는 시어머니의 '바보' 발언을 들으면서 적어도 내 시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강박관념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과연 그랬을까. 딸 하나 못 낳았다고 스스로 '바보'라고 칭했던 시어머니의 말은 진심이었을까.

뭐라고? 수술을 했다고!

 지난 해 여름 두 딸이 시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을 찾았다.
지난 해 여름 두 딸이 시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을 찾았다. ⓒ 한나영

이왕이면 딸을 낳고 싶었다. 진심이었다.그리고 그 소원대로 나는 예쁜 딸을 둘이나 얻었다. 첫 딸을 낳았을 때는 시어머니가 산후조리를 해주었다.

그런데 둘째를 낳았을 때는 시어머니가 못 해준다고 했다. '또 딸'이어서 기운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이 산후조리를 다 해줬다. 미역국도 끓이고 우윳병도 소독하고 기저귀도 빨면서.

그런 다음 남편은 곧바로 수술을 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서운하다고 우리 내외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아들이 있어야 하는데 너희는 그렇게 쉽게 수술을 해버리냐?"

이제는 세상의 모든 차별 없어져야

결혼한 뒤 내가 겪었던 서글픈 남녀 차별 이야기다. 아들이라고, 딸이라고 부당하게 편을 가르고 차별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차별을 했던 시어머니와 시고모는 이제 더 이상 나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 모두 흙으로 돌아가셨다.

그렇게 아무 미련도 없이 떠날 인생인데 뭘 그리 모질게 차별하면서 상처를 줬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이제는 세상의 모든 차별, 없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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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차별의 기억' 공모글입니다.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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