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시리도록 푸르고 맑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경상도 하동과 이웃하고 있는 전라도 광양은 울산 언양과 더불어 불고기로 이름이 높은 곳이다. 하지만 매서운 겨울바람이 손발을 꽁꽁꽁 얼리는 요즈음에는 광양에 가서 굳이 불고기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눈사람처럼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벽난로처럼 따스하게 녹여주는 왕뼈감자탕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왕뼈감자탕이란 맛난 음식이 광양에만 있다는 것은 아니다. 왕뼈감자탕은 전국 곳곳 어디에서나 쉬이 맛 볼 수 있는 우리 고유의 음식이다. 하지만 광양에서 맛보는 왕뼈감자탕은 그 어느 지역보다 국물이 아주 진하고 아주 얼큰하면서도 아주 시원하다. 이는 아마도 전라도 지역에서 즐겨먹는 묵은지가 깊은 맛을 더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날씨가 영하로 내려갈수록, 주머니 사정이 달랑달랑할수록 사람들이 더욱 많이 찾는 대한민국 대표음식 감자탕. 감자탕은 돼지 등뼈나 목뼈를 푹 고아 국물을 낸 뒤 감자와 여러 가지 채소, 송송 썬 대파, 붉은 고추, 빻은 마늘, 들깨가루 등 갖은 양념을 넣어 만드는 매콤하고도 얼큰한 서민음식이다.
감자탕은 함박눈이 펑펑펑 쏟아지는 늦은 밤, 갑자기 배가 출출할 때 가족들과 따뜻한 방에 오손도손 둘러앉아 가끔 골목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찹쌀떡! 메밀묵!' 소리를 들으며 밤참으로 먹는 것도 별미다. 하지만 찬바람이 씽씽 부는 저녁, 입김 호호 뿜으며 저녁끼니나 소주 한 잔 앞에 놓고 술안주로 먹을 때 더욱 제 맛이 난다.
삼국시대, 전라도에서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간 감자탕'감자탕'이라는 이름 뒤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얽혀 있다. 하나는 돼지 등뼈에 든 척수를 '감자'라 부르기 때문에 감자탕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돼지 등뼈를 여러 갈래로 나눌 때 감자뼈라는 부분이 실제로 있어, 그 뼈로 만든 음식이라 하여 감자탕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감자를 넣어 만들기 때문에 감자탕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란 그 말이다.
KBS 월드넷(2007년 9월30일)에 따르면 감자탕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자웅을 겨루던 삼국시대 때 돼지를 많이 길렀던 전라도에서 처음 만들어져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간 우리 고유의 전통음식이다. 고기가 부족했던 삼국시대, 농사를 짓는 '소' 대신 '돼지'를 잡아 그 뼈를 우려낸 국물로 음식을 만들어 병사들이나 노약자, 환자들에게 먹였다는 것.
감자탕은 그 뒤 인천항이 개항되면서 전국 곳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인천지역 곳곳에도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특히 1899년 경인선 개통공사를 할 때에는 육체노동에 몹시 지친 일꾼들이 몸보신용으로 감자탕을 즐겨 찾기 시작하면서 감자탕은 인천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는 감자탕을 만드는 주재료인 돼지등뼈에 단백질과 칼슘, 비타민 B1 등이 듬뿍 들어 있어 일꾼들에게 스태미너 음식으로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감자탕은 여성들에게는 저칼로리 다이어트 음식으로, 어린이들에게는 성장기 발육을 도와주는 음식으로, 노인들에게는 노화방지 및 골다공증 예방 음식으로 자리를 굳혔다.
왕뼈감자탕 포인트는 얼큰한 국물 맛에 있다"저희집 왕뼈감자탕 맛의 비결은 진하고,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에 있어요. 저희들은 돼지목뼈를 찬물에 오래 담가 핏물을 뺀 뒤 가마솥에 물을 붓고 대파, 생강, 양파, 마늘, 매운고추 등을 넣고 반나절 정도 우려내지요. 아침에 쓸 것은 앞날 밤에, 점심 때 쓸 것은 그날 새벽에, 저녁에 쓸 것은 그날 점심 때부터 국물을 우려내기 시작하지요."전남 광양시청에서 칠성 주공3단지 쪽으로 가다보면 왕뼈감자탕(3~4인 2만7천원)을 전문으로 조리하는 널찍하고 깨끗한 음식점 하나가 있다. 요즈음처럼 추운 겨울철 저녁에 이 집에 들어서면 30평 남짓한 드넓은 식당에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모두 소주 한 잔에 왕뼈감자탕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이 집 주인 정용주(46)씨는 "여름에는 밑반찬으로 갓 담근 배추김치를 내지만 요즈음 같은 겨울철에는 포기 배추김치를 생굴과 함께 식탁 위에 올려 손님들이 보쌈처럼 먹게 한다"고 말한다. 정씨는 "이 지역 사람들은 겨울철이 되면 유난히 생굴을 좋아한다"며 "친절을 생명으로 삼는 음식점에서 그 정도 서비스는 기본"이라며 활짝 웃는다.
24시간 영업한다는 정씨는 "왕뼈가 무엇이냐?"고 묻는 길라잡이 질문에 "음식 이름을 왕뼈라 붙였을 뿐 왕뼈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라며 "왕뼈감자탕은 푹 고은 돼지목뼈와 국물 그리고 3년 묵은 묵은지가 주재료이다. 저희집 왕뼈 감자탕이 다른 집과 맛이 다른 점은 3년 묵은 묵은지에 있다"고 밝혔다.
묵은지로 감싼 왕관 위에 하얀 팽이버섯이 눈꽃처럼 피어나다 "음식은 주인의 정성어린 손맛에 있다고 봐요. 그래서 저희들은 왕뼈감자탕에 쓰는 묵은지는 가까운 채소밭에 나가 싱싱한 배추를 구한 뒤 미리 담궈 숙성시킨 뒤 쓰지요. 묵은지는 대장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것은 물론 숙취제거, 여러 암 등 성인병 예방에도 아주 좋지요. 특히 요즈음 날씨가 추워지면서 왕뼈감자탕을 찾는 손님들이 부쩍 늘었어요." 이 집 왕뼈감자탕 특징은 널찍하고 커다란 돌솥 한가운데 왕뼈가 큰 바위처럼 우뚝 솟아나 있다는 점이다. 언뜻 보기에는 묵은지로 감싼 왕관 위에 올려진 하얀 팽이버섯이 눈꽃처럼 피어나 있는 듯하다. 여기에 보석처럼 예쁘게 박혀 있는 송송 썬 대파와 붉은고추, 양파가 국물이 보글보글 끓을 때마다 장식처럼 파르르 떤다.
예쁘다. 왕이 보글보글 국물소리처럼 아우성치고 있는 이 나라 가난한 백성들에게 음식을 베풀기 위해 나라 한가운데 우뚝 서서 살펴보고 있는 듯하다. 하도 예뻐 왕뼈를 국물에 무너뜨리기가 아깝다. 하지만 어쩌랴. 기왕 왕이 백성에게 음식을 베풀기 위해 나선 것 같으니, 왕이 내려주는 그 음식을 백성들 하소연처럼 보글보글 끓고 있는 국물에 나눠줄 수밖에.
우뚝 솟은 왕뼈를, 추위에 꽁꽁 얼었다가 따스한 불꽃에 스르르 풀리는 어린아이 볼처럼 발그스레한 국물에 나눠주자 거기 고기가 뼈 속에 푸짐하게 박혀 있다. 국물 한 수저 떠서 입에 넣자 매콤하면서도 시원한 뒷맛이 깊고 깔끔하다. 광양에서 나온다는 청주 한 잔 마신 뒤 왕뼈 한 토막 들고 입에 물자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고기가 쏘옥쏙 빠져 나온다.
혀 3번 까무러치게 만드는 겨울 보양음식 왕뼈감자탕입에 넣자마자 살살 녹아내리는 고기 한 점 먹으며 집어먹는 감자탕 국물 듬뿍 밴 새콤달콤한 묵은지가 몹시 부드럽고도 향긋하게 씹힌다. 갓 담근 포기 배추김치에 향긋한 생굴을 싸먹는 맛도 기막히다. 왕뼈감자탕 속에 든 감자와 함께 가끔 집어먹는 사각사각 씹히는 깍두기 맛과 풋고추 맛도 상큼하다.
왕뼈감자탕을 거의 더 먹어가고, 국물이 거의 다 졸아들 때면 서비스로 라면사리와 함께 대파를 송송송 썰어넣은 국물이 다시 나온다. 왕뼈감자탕 국물에 라면사리를 끓여먹는 맛도 별미다. 왕뼈 감자탕 국물과 함께 꼬들꼬들 익어가는 라면사리를 감자탕 국물이 듬뿍 밴 묵은지에 돌돌 말아 입에 넣자 미소가 절로 번진다.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렇게 라면사리를 맛나게 다 건져먹고 나면 돌판 위에 밥과 김가루, 참기름을 뿌려 쓱쓱 볶아준다. 그러니까 이 집에서 왕뼈감자탕을 시키면 혀가 3번 까무러치게 된다. 그만큼 세 가지 맛이 다 독특하고도 잊을 수 없는 맛이라는 것이다.
연초부터 연말까지 계속 이어지는 고물가 고환율에 민생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가난한 서민들은 그 어느 해보다 추운 겨울을 맞고 있다. 이럴 때 가족이나 가까운 벗들끼리 오순도순 둘러앉아 왕뼈감자탕 한 그릇 나눠먹으며 가정에 깃드는 돈가뭄에 따른 추위와 우리네 삶을사각사각 갉아먹는 불황을 한꺼번에 날리는 지혜를 모으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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