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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목적 존재

 

.. 이렇게 해서 근세 봉건사회에서는 명목적 존재에 지나지 않았던 천황과 그 측근들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  <아라사끼 모리테루/김경자 옮김-또 하나의 일본, 오끼나와 이야기>(역사비평사,1998) 47쪽

 

‘존재(存在)’는 덜어냅니다. ‘그 측근(側近)’은 ‘그 가까이에서 모시던 사람’으로 다듬고, ‘정치적(-적)으로’는 ‘정치에서’로 다듬으며, ‘상당(相當)히’는 ‘무척’으로 다듬어 줍니다. “중요(重要)한 의미(意未)를 갖게 되었다”는 “크게 자리를 잡았다”나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로 손질합니다.

 

 ┌ 명목적(名目的) : 실속은 없고 이름이나 구실만이 갖추어져 있는

 │   - 명목적 가치 / 사장은 명목적인 이유로 그 자리에 참석했다

 ├ 명목(名目)

 │  (1) 겉으로 내세우는 이름

 │   - 명목만 있고 실권은 없는 벼슬 / 그의 직책은 명목뿐인 이사였다

 │  (2) (흔히 ‘명목으로’ 꼴로 쓰여) 구실이나 이유

 │   -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기자를 내쫓았다 /

 │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할 것이고

 │

 ├ 명목적 존재에

 │→ 허울뿐인 이름에

 │→ 껍데기 같은 감투에

 │→ 빈 껍데기에

 │→ 속 빈 강정에

 │→ 허울에

 └ …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글이 아닙니다. 겉으로 들리는 소리가 말이 아닙니다. 글이나 말은 겉모습과 겉소리가 아닌, 속모습과 속소리입니다. 속에 담는 뜻과 속에 깃들인 줄거리입니다.

 

번드레레한 글이라 할지라도, 겉으로 무언가 있어 보이는 말이라 하더라도, 우리한테 정작 다가오는 느낌과 생각과 넋이 없다면 겉치레일 뿐입니다. 껍데기입니다. 허울좋은 개살구입니다.

 

 ┌ 명목적 가치 → 알맹이 없는 값어치 / 속없는 값 / 허울뿐인 값

 └ 명목적인 이유로 → 이름만 내세우려고 / 이름 때문에

 

 처음에는 ‘책마을’이라고 하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출판도시’라고 하더니, 이제는 ‘북시티’라고 이름을 고쳐서 쓰는 파주출판단지가 한국방송과 짝을 맺어서 지난가을에 ‘북쇼’를 한다고들 했습니다. 처음에는 ‘불쇼’를 한다는 소리인가 했으나 ‘불쇼’가 아닌 ‘북쇼’라 하는군요. 다른 한쪽에서는 ‘북페스티벌’을 하니, 그곳에서는 ‘북쇼’를 하면서 맞불놀이를 하자는 뜻이구나 싶습니다.

 

 ‘쇼’라 한다면, 이제까지는 연예인들이 나와서 노래잔치를 벌이는 마당을 가리킬 때 으레 이야기했는데, 책을 사이에 놓고 뭔가 보여주려고 ‘쇼’를 다 벌이려나 싶기도 합니다. 책이 안 팔린다고 하니, 책이 따돌림받는다고 하니, 사람들이 좋아하는 ‘쇼’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아무래도 뭔가 반짝 하는 놀이마당이 아니라면 눈길을 돌리지 않는 오늘날 사람들이니, 책마을이 아닌 북시티에서는 북쇼를 할밖에 없습니다.

 

 ┌ 겉만 번지르르한

 ├ 허울만 좋은

 ├ 시끄러운 빈 수레 같은

 ├ 빛좋은 개살구 같은

 └ …

 

 이렇게 돌아가는 세상이든 저렇게 굴러가는 세상이든, 책을 읽으려면 조용한 곳에서 마음을 다독이면서 시간과 품을 들여야 합니다. 시끌벅적 떠드는 곳에서는 책을 못 읽습니다. 시끌벅적 북적이는 곳에서 반값 후려치기를 하며 파는 책을 잔뜩 사들인다고 하더라도, 조용한 집으로 가지고 와서 조용한 방에서 다소곳하게 앉아서 읽어야 할 책입니다. 뒷간에 앉아 똥을 누며 읽더라도, 조용하지 않으면 읽기 어려운 책입니다.

 

책 밑바탕이 이러하고, 책 밑바탕에 따라서 우리 마음에 밥이 되기 마련인데, 밑바탕에 서린 아름다움을 어떻게 슬기롭고 즐겁게 엮어낼까를 더 깊이 헤아린다면, 허울을 키우는 잔치판은 멀리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 한 사람 허울좋은 개살구한테 끄달리지 않는다 하여도, 우리 둘레 숱한 사람들은 북적북적하고 왁자지껄하고 웅성웅성거리는 놀이마당에 훨씬 마음이 가고 눈길이 가고 발걸음이 가리라 봅니다. 돛대기시장처럼 판을 짜며 싸구려를 외치면서 마구 뿌려야 할 책으로 바뀌어 간다고 느낍니다.

 

 지난날에는 알뜰히 읽고 알뜰히 간수하여 알뜰히 물려주는 옷과 책과 물건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가볍게 읽고 가볍게 다루어 가볍게 버리는 옷과 책과 물건이 되었습니다. 옷을 물려주는 사람도 없으나, 옷을 물려받고자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책을 물려주려고 하는 사람도 없으나, 책을 물려받으려고 하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모두 돈으로 따지니 기꺼이 내어주며 함께 나누는 삶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돈벌이가 될 수 있는 구멍을 찾아서, 인터넷장사에 나서기도 합니다.

 

 알찬 마음이 아닌 예쁘장한 얼굴이요, 튼튼한 마음밭이 아닌 힘살 울퉁불퉁한 몸매이며, 사랑과 믿음이 가득한 마음결이 아니라 에스라인과 영어 지식으로 똘똘 뭉친 정신세계입니다. 껍데기는 가라가 아닌 껍데기여 어서 오라는 세상입니다. 옷도 껍데기 책도 껍데기 사람도 껍데기 생각도 껍데기 말도 껍데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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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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