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가시적인 변화의 요소들
.. 그러나 식민지 전체의 구조적 측면에서 가시적인 변화의 요소들이 분명하게 나타났고 .. 《손준식,이옥순,김권정-식민주의와 언어》(아름나무,2007) 152쪽
“식민지 전체(全體)의 구조적(構造的) 측면(側面)에서”는 “식민지를 통틀어 놓고 볼 때에”나 “식민지를 두루 살펴볼 때에”로 다듬어 줍니다. ‘분명(分明)하게’는 ‘틀림없이’로 손보고 ‘변화(變化)의’는 ‘바뀌는’이나 ‘달라지는’으로 손봅니다. ‘요소(要素)’는 ‘대목’으로 손질할 수 있습니다.
┌ 가시적인 변화의 요소들
│
│→ 눈에 띄게 달라진 대목들
│→ 도드라지게 바뀐 대목들
└ …
‘-적 -의’ 꼴로 쓰인 말투 하나를 다듬어 보는데, 앞쪽에 나타난 ‘-의 -적’ 꼴도 말썽입니다. 이 보기글은 토씨 ‘-의’가 달라붙는 말투가 앞뒤에 두 가지 나타납니다. 어느 한쪽만 다듬어 놓을 수 없습니다. 둘 모두 차근차근 살펴야 합니다. 또한, 이 보기글이 쓰인 책도 통째로 살펴볼 일이에요. 비록 이 대목은 좀더 꼼꼼히 살피면서 다듬어 낸다고 하지만, 더 많은 곳에서 마음을 안 기울이며 뒤틀려 버린 말씨는 어찌할까요.
글 한 줄 함부로 쓸 일이 아닙니다. 한 번 써 놓은 글도 거듭 돌아볼 일입니다. 우리가 쓴 글을 누가 읽을지,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가 쓴 글은 바로 지금 읽어 주는 사람이 있는 한편, 앞으로 대여섯 해 뒤에 읽어 줄 사람도 있고, 열 해나 스무 해 뒤에 읽어 줄 사람도 있습니다. 글 한 꼭지 덜 쓰게 되더라도, 책 한 권 덜 펴내게 되더라도, 한 번 더 되짚고 되뇌이면서 우리 생각을 펼쳐놓으면 좋겠습니다.
ㄴ. 역사적 과오의 결과
.. 우리의 불행은 단지 개인적인 불행이 아니라 당신들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의 결과라고 .. 《전진성-삶은 계속되어야 한다》(휴머니스트,2008) 86쪽
“우리의 불행(不幸)은”은 “우리가 불행한 까닭은”이나 “우리가 슬픈 까닭은”으로 다듬습니다. ‘단지(但只)’는 ‘다만’이나 ‘그저’로 손보고, “개인적(個人的)인 불행이”는 “우리가 잘못한 슬픔”으로 손봅니다. ‘결과(結果)’는 ‘때문’이나 ‘탓’으로 손질합니다.
┌ 당신들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의 결과
│
│→ 당신들이 역사에 저지른 잘못 때문
│→ 당신들이 역사를 짓밟았기 때문
│→ 당신들이 역사를 더럽힌 탓
└ …
‘과오(過誤)’는 ‘과실(過失)’과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과실’은 ‘잘못’을 한자로 옮긴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보기글은, 먼저 “당신들이 저지른 역사적 잘못의 결과”로 고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말차례를 바꾸어 “당신들이 역사에 저지른 잘못”으로 적으면 ‘역사적’ 뒤에 붙은 ‘-적’을 털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보기글 앞머리를 “우리가 슬픈 까닭은”으로 다듬었음을 떠올리며, 글 끝을 ‘때문/탓(←결과)’으로 손질합니다.
ㄷ. 일반적 고찰의 대상
.. 티베트에서 판매되는 상품이 중국 본토보다 훨씬 비싼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은 틀림없이 일반적 고찰의 대상인 것이다 .. 《폴 인그램/홍성녕 옮김-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알마,2008) 118쪽
‘판매(販賣)되는’은 ‘팔리는’이나 ‘사고팔리는’으로 다듬고, “중국 본토(本土)보다”는 “중국땅보다”나 “중국보다”로 다듬습니다. “비싼 경우(境遇)가”는 “비쌀 때가”로 손보고,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는 사실(事實)은”은 “흔하다는 대목은”이나 “많다는 일은”으로 손보며, ‘고찰(考察)의’는 ‘생각할’이나 ‘살펴볼’로 손봅니다.
┌ 일반적 고찰의 대상인 것이다
│
│→ 좀더 살펴볼 대목이다
│→ 더 널리 알아볼 일이다
│→ 더욱 깊이 헤아려 볼 일이다
│→ 찬찬히 돌아볼 노릇이다
└ …
티베트로 나들이를 가고, 거룩한 절을 둘러보러 가기도 하며, 무언가 깨달음을 얻자며 찾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티베트를 억누를 뿐 아니라 숱한 사람을 죽이고 절집을 무너뜨린 끔찍한 총부리를 들여다보거나 느끼거나 알아차리려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책이 있고 기록이 있고 살아남은 이가 있으나, 들으려 하거나 보려 하거나 만나려 하지 않습니다.
참을 참으로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참이 무엇인가를 살피지 않는 셈입니다. 거짓을 거짓으로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거짓이 무엇인지를 찾지 않는 셈입니다.
한두 번 이렇게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바로 그 한두 번, 참과 거짓을 가리지 못하거나 않는 삶을 잇는 가운데, 우리 삶은 참과 거짓이 뒤엉키게 되고, 우리 스스로도 참과 거짓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엉터리가 되고 맙니다. 바보가 되어 버립니다. 생각도 바보 삶도 바보 말도 바보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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