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가 위기라고 한다. 매체 이용자는 줄고 덩달아 매출은 떨어진다. 영향력도 예전 같지 않다. 그렇다면 잡지는 퇴물? 그렇지 않다.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잡지에 웃고 울고 감동 '먹는다'. 너무나 빠르고 얄팍한 시대. 잡지는 오히려 빛난다. 대한민국 잡지여 영원하라! [편집자말] |
그러니까 그날은 지난 12월 4일이었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환승을 하고, 미리 그려온 지도를 보면서 어디론가 급히 걸어가고 있었다. 혹시 늦을까 하는 조바심에 지나가는 집배원 아저씨를 불러 세웠다. 아저씨는 내가 알려준 번지수만 듣고는 정확하게 내가 찾는 건물을 알려주셨다. 두근거리며 문을 여니, 안에서는 화사한 웃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PAPER(
http://www.paperda.com)>를 만났다.
1995년에 무가지 'Street PAPER'로 출발해 올해로 13번째 돌을 맞은 이 잡지는, 그 시간동안 많은 것이 변했고, 또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거금(?) 5000원을 들여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전자고, 여전히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는 점이 후자다.
형형색색 화려하고 두터운 잡지들의 틈바구니에서 수수한, 그러나 아름다운 풀꽃처럼 조용히 독자들을 유혹하는 <PAPER>에는 열혈 독자가 많다. 홈페이지에서는 오늘도 '수다'가 한창이다. 그곳에 올라오는 이야기들은 종종 잡지에도 반영되기 때문에 <PAPER>와 독자가 서로 소통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일 년에 한 번 근사한 바자회도 열린다. 저마다 꺼내놓은 이야기가 있는 물건들은 한 곳에 모여 새로운 주인을 기다린다. <PAPER> 필자들을 직접 만나는 것이 '덤'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 거기서 나온 수익금은 '무지개 특공대'의 후원금으로 변신한다. <PAPER>는 무지개 특공대를 통해서 손길이 필요한 곳에 작은 도움을 주고 있다.
사실 나는 오랜 시간 <PAPER>라는 이상야릇한 잡지에 매료되어 있었다. 매달 꼼꼼히 챙겨보는 열혈독자라고는 말할 수 없더라도, 예쁜 사진이 나오면 오려서 편지지로 사용하기도 하고, 좋은 구절은 팔이 아프게 옮겨적기도 했다. 그리고 몇 번인가, 내가 쓴 글이 잡지의 한 귀퉁이에 실린 적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잡지 <PAPER> 인터뷰 날짜가 잡혔을 때 설렜다. 작은 살림살이들이 옹기종이 모여 있는 소담한 공간에 방문했을 때까지도 나는 두려움과 호기심이 반쯤 섞여서 멍한 상태였다.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니 걱정은 저만치 달아나 버리고, 어두운 방에 불이 켜지듯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종이 위에 적은 질문 대신에 진짜 살아움직이는 존재가 내 마음 속으로 성큼 다가왔기 때문이다.
정유희 "나한테는 고양이가 가족"... 황경신 "집에서 부채춤 추다"김원(이하 원) "인터뷰를 하기만 했지, 당하니까 기분이 또 이상하네. 이것도 쉬운 일이 아냐. 어떻게 할까? 우리 이런 거 한 번 해보자. 서로 질문하기. 양수가 유희한테 먼저 해봐."
김양수(이하 양수) "아, 이거 어려운데. (사이) 왜 오늘 누나에게 달콤한 냄새가 나는 거죠?"
정유희(이하 유희) "향수를 옛날부터 좋아했는데요. 어렸을 때 맛을 들여서 지금은 관심이 없는 편이에요. 그러다가 편안하게 쓸 수 있는 건 없을까 찾아봤죠. 부드럽게 뿌리려고 샀는데, 사람들이 '아기 냄새난다, 편안하다' 하고, 다들 좋아하더라고요. 물론 향수란 게 남을 위해서 뿌리는 것보다는 자기 기분전환용인 것 같아요."
최승우(이하 승우) "고양이를 키우고 있잖아요.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유희 "길러본 사람들은 다 느끼겠지만 저한테는 고양이가 가족이에요. 가족의 의미랑 다를 게 없고, 외계에서 온 존재처럼 같이 산 지 3년이 되었는데도 항상 신비로워요. 충만감이나 행복감이나 그런 게 너무 크기 때문에 감사하죠. '고마워, 사랑해' 이건 닭살스런 말인데, 사람들한텐 잘 못해도 고양이한텐 참 잘해요."
양수 "모성애가 있어서 챙겨주는 걸 좋아해요. 딸처럼 안고 다닌다니까요."
유희 "그럼 저도 질문 하나 할게요. 최근에 아이처럼 기분 좋았던 날은 언제예요?"
황경신(이하 경신) "음… 언제였지? 며칠 전에 우리집에서 애들이랑 놀고 그랬을 때? 춤도 추고. 부채 들고?"
일동 "부채? 하하하."
양수 "그러고 노는 거야?"
경신 "요새 플라멩코 배우거든요. 동작 중에서 부채를 들고 하는 춤이 있어요. 생각해보니까 춤출 때가 너무 좋은 것 같아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머리가 백지처럼 하얗게 되는 그런 느낌이 좋죠. 평소에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니까 춤을 추는 2시간 정도는 거기에 푹 빠져서 몸을 움직이는 거죠. 우리는 그런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아."
김양수 "글은 바다, 만화는 섬"... 최승우 "정신없이 보낸 1년"
PAPER 식구들을 살짝 소개한다면... |
<PAPER> 직원들은 아주 재주꾼들이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PAPER> 편집장인 황경신은 여러 권 책을 펴냈다. <나는 정말 그를 만난 것일까> <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솜이의 종이피아노> <모두에게 해피엔딩> <그림 같은 세상> <초콜릭 우체국> <괜찮아, 그곳에선 시간도 길을 잃어> <슬프지만 안녕> 등 연애소설도 있고, 연애서도 있다.
정유희는 여행에 일가견이 있다. 독특한 감각여행서인 <너에게 변두리를 보낸다>를 펴냈다. 이 책은 이후 <길 떠나는 사람에게선 바람냄새가 난다>로 바뀌어 재출간됐다. EBS <삼색토크 여자>에 나와 입담을 과시하기도 했다.
기자이면서 만화가인 김양수는 제목부터 실실 웃게 만드는 만화 <김양수의 카툰판타지 생활의 참견>을 출간했다. 김원은 또 어떤가. <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그림이 바로 그의 솜씨다. 게다가 아트디렉터라는 또다른 직함은 가진 그는 잡지 사진도 찍는다. MBC <한 뼘 드라마>에 백발의 남자로 출연해 한대수와 연기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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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 대표를 중심으로 황경신 편집장, 정유희 기자, 김양수 기자, 최승우 기자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놀이터'를 만들기 위해 잡지를 만든다. 그림에 자신있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만화에 자신있는 사람은 만화를 그리고, 소설에 자신있는 사람은 소설을 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세상을 담아내는 이들은, <PAPER>에서만 아니라 각자 분야에서도 반짝이는 중이다.
2004년부터는 각자의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어려움은 없나요?"라는 물음에 김원 대표는 "오래된 호흡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김양수 기자는 "원고를 빨리 쓰게 되었어요, 그래야 많이 노니까"라며 재치있는 답변을 덧붙였다.
원 "양수한텐 이게 궁금해. 글쓰는 거하고, 만화 그리는 것에 차이가 있다면?"
양수 "자유로움 정도에서 따진다면, 글이 바다면 만화는 섬 정돈 거 같아요. 그림은 그림체가 받쳐줘야 하는데, 글은 정말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거잖아요. 그림을 그릴 때는 벽돌을 가는 것처럼 지치죠. 기를 모아서 해야 하니까."
유희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나는 글쓰는 게 힘든데."
양수 "기본적으론 글 쓰는 걸 행복해 하는 것 같아요. 글은 그렇게 끝내 행복한 수준으로 남고 싶어요."
원 "승우는 회사에서 일한 지 일 년이 지났는데 어떤 감정이야?"
승우 "생각할 틈이 없었어요. 정신 차려보니까 1년이 후딱 지나갔어요. 근데 일단 좋죠. 하고 싶었던 거니까. 동시에 날마다 숙제는 하나씩 생기는 것 같고, 하나 해결되면 또 튀어나오고…."
원 "29세지?"
유희 "29수는 다들 힘든 것 같아."
승우 "<PAPER>가 도움도 되고, 숙제를 내준 것도 같고, 짐도 되고, 해방구도 되었던 거 같아요.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거죠."
유희 "자기 자신에게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이 어딘지 궁금해."
승우 "전 감이 좋은 거 같아요."
원 "난 너의 그런 점이 싫어."
일동 "(웃음)"
승우 "내가 맞는 걸 따라가면 그게 정답인 것 같아요. 좋아요. 진짜. 예민하긴 하지만."
김원 "나는 위기가 싫어"
원 "경신에게 궁금한 질문은 뭐냐면, 이제 살짝 살아봤잖아. 인생을 통해서 이루고 싶은 게 뭐야?"
경신 "이루고 싶은 건요. (잠시 고민) 저는 그냥 소울메이트를 만나고 싶어요. 세상에 정말 그런 게 있다면요. 모든 것을 공유하는 어떤 영혼으로서 그게 없나 봐요? 있나?"
원 "그렇다고 믿고 착각하고 사는 거 아냐?"
유희 "아주 외롭게 되더라도 그 기대치를 낮추고 싶은 마음은 없어?"
경신 "그건 포기의 문제가 아니라, 차라리 혼자 지내는 게 편하단 거죠. 그렇게 막 안 맞는 사람과 같이 지내느니. 금방 또 싫증나잖아요."
원 "아니 그렇게 싫증을 잘 내는데 <PAPER>는 어떻게 13년을 해봤을까?"
경신 "<PAPER>는 매달 바뀌잖아요."
원 "얼씨구 좋구나~"
양수 "그럼 대표님은 마음속에서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생길 때 뭐라고 답변하세요?"
원 "난 그런 고민 많이 했었어. 10대부터 스스로 계속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붙잡고 있었거든. 근데 그게 30대를 넘어서서 40대가 되면서 그 질문이 없어진 것 같아. 나는 현재에 존재하는 나로서 나고, 그게 나의 존재의 이유고, 그래서 질문 자체가 없어져 버렸어. 나이를 먹으니까 어느 선을 넘어서는 것 같아. 삶을 대하는 자세에서 그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거지."
양수 "좋네요. 전 그 질문에 사로잡혀 있는데."
경신 "술 먹고, 놀고 싶은데 그걸 못하니까 그런 거 아냐? 확 놀아봐. 그런 생각 안 들어."
승우 "대표님도 위기에 몰렸을 때가 있었어요? 도저히 상상이 안 되거든요."
원 "나한테는 진정한 위기가 없었던 것 같아. 위기를 싫어하는 것 같아."
경신 "위기가 오면 막!"
양수 "에이~ 왜 또 나타났어. 난 갈 거야, 하고 막 피해."
원 "그리고 지나갔나 싶으면 다시 돌아오고. 근데 그게 나에게 안 좋은 점일지도 몰라. 어떻게 보면. 큰 위기가 있었다면 그걸 딛고 일어서면서 크게 점프하는 계기가 되었을 텐데, 그런 크나큰 위기를 극복한 적이 없어서 잔잔하고 고운 사람으로…."
양수 "스스로 고운 사람이라고…"
원 "심성이 곱잖아. 양면성이 있긴 하지만."
경신 "근데 위기라는 게 똑같은 상황에 놓여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른 것 같아요."
원 "살아가면서 어떤 걸 택하면서 살았고 어떤 환경에서 속해서 살기 위해서 노력을 했고 자기 선택이 그 사람을 만들어 가는 거지."
경신 "환경 요소도 중요한 것 같아요."
양수 "나는 <PAPER>에 와서 성격이 많이 변했어요, 그런 점에서. 원래 조바심이 많고 소심하고 그런 스타일이었는데 좀 여유로워졌다고 할까?"
경신 "양수가 예전엔 예민한 문학 소년이었죠. 그땐 멋있었는데. 성격 좋아지면서 살찌고 조바심 없어지고(웃음) 역시 같이 지내는 사람이 중요한 것 같아요. "
따로 또 같이,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법
경신
"사람들이 대표님 사진처럼 찍는 경우가 많잖아요. 약간 유행처럼. 그런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원 "근데 뭐. 내가 없어도 그렇게 찍지 않을까?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사람들이 그걸 통해서 기분 좋은 느낌을 받았다고 하면 그걸로 좋지. 사진이랑 그림은 다르지만 그림 같은 사진이라고 할까? 사람들이 나도 이런 느낌의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새로움으로 다가가는 건 좋은 일인 것 같아."
유희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살면서 나쁜 일도 많지만, 좋은 것들, 따뜻하고 조용한 것들도 필요하다고요."
원 "우리가 시선을 그쪽에 두고 있는 거지."
경신 "세상이 정말 아름답다면 왜 그쪽으로 시선을 두겠어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거라면 아름다움을 꿈꿀 이유가 없잖아요."
유희 "시사지, 경제지를 보면 따뜻하단 느낌은 없거든요. 이놈의 세상!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나라에 따뜻한 잡지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술자리에서 본 <PAPER>의 속살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이어졌다. 허리띠를 풀고 편안하게 진행된 술자리에선 내 이름이 '이유하씨'에서 '유하야'가 되었고, 맥주는 소주가 되었다가, 막걸리가 되었다가 때론 와인으로 변하기도 했다.
동시에 대화는 어제 본 텔레비전 이야기에서 정유희 기자의 스펙터클한 꿈 이야기, 정치이야기로 변하며 때론 긴장감 있게, 때로는 일상의 '쫀득쫀득'한(?) 속내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 말을 덧붙였다. "아, 이거 우린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있는데 말이야."
술을 마시면서 인터뷰도 하고, 괜찮은 잡지 기획을 생각해 내기도 하고, 은근히 원고 압박도 시작되는 그 자리는 긴장감 있고, 즐겁고, 유쾌하면서도 진지했다. 막걸리 사이에서 원하면 소주를 먹을 수 있는 모습, 부족한 음식이 있으면 기자들 대신 김원 대표가 직접 가지고 오는 모습에선 <PAPER>의 실체가 드러났다.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마음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꼭 오랜 시간이 지나 눈빛만 봐도 대화가 가능한 가족 같았다. 마음이 맞는 따뜻한 사람들이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에선 행복이 느껴졌다.
이처럼 <PAPER> 사람들에 흠뻑 빠져 감동하는 내 눈빛을 눈치 챈 것일까. 갑자기 '악마의 미소'를 흘리며 마지막 한 방을 날린다.
양수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다가 아니라는 거죠. 과연 진실일까요?"
경신 "사실 우리 다 짰어요."
원 "한 편의 단편 드라마를 찍은 거지. 사악한."
일동 (웃음)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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