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사상 첫 TV토론에 나선 공화당 닉슨 후보는 방송에 맞지 않는 옷차림을 하고 분장도 거절했다. 반면 민주당 존 F. 케네디 후보는 미리 카메라 위치까지 파악해두는 꼼꼼함에다 시종 차분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TV 앞에 모인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당시 정치 컨설턴트들은 "흥미롭게도 스튜디오에서 토론을 지켜본 사람들은 대부분 닉슨의 승리를, TV로 본 사람들은 케네디의 승리를 확신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결국 선거에서 승리는 케네디 몫으로 돌아갔다.

선거철뿐만 아니라 비선거철에도 '이미지 정치', '미디어 정치'는 일찍이 미국에서 만개했다. 매스미디어와 테크놀로지의 발전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대선 패배 이후 닉슨은 PR, 광고, TV 전문가들을 보좌관으로 기용하여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만들어냈고 그 결과 1968년 대선에서 승리를 일궜다.

루스벨트는 '노변정담'을 통해서 오래된 고향 아저씨와 같은 친근한 이미지를 쌓았으며, 이러한 이미지를 기반으로 원활하게 국정을 운영했다. 또 클린턴은 쇼 프로그램에서 자유로운 복장으로 색소폰을 연주하고, 청중들의 짓궂은 질문에도 여유 있게 답함으로써 공화당 후보와 차별성을 확고히 쌓았다.

이러한 '이미지 정치' '미디어 정치'는 대한민국에서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선거철,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지만 비선거철에도 정치인들은 꼭 필요하고 실현가능한 정책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이미지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지만 다음 선거를 의식한 이미지 전략이다. '꼼수 전략'이라는 평을 받는 이유다. 이러한 이미지 정치, 미디어 정치가 우리 사회에서 범람하고 있다. 그 사례를 들여다보자.

[# 장면 하나] "노점 할머니도 울고, 대통령도 울었다?"

노점 할머니도 울고 대통령도 울었다... <중앙일보> 5일자 1면.
노점 할머니도 울고 대통령도 울었다...<중앙일보> 5일자 1면. ⓒ 중앙일보

2008년 12월 5일. 서민의 눈물을 감싸는 따뜻한 대통령의 이야기가 서울의 일부 언론에 실렸다. 전날 새벽시장을 방문한 대통령이 생활고에 힘겨운 노점상 할머니의 사연을 들으며 20년 동안 자신이 쓰던 목도리를 안겨줬다는 기사를 큼지막한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1면도 부족해 이날 사설에서까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대통령 드라마'를 대서특필했다. <중앙>은 1면 '노점 할머니도 울고 대통령도 울었다'라는 제목의 머리기사와 '시장 할머니의 눈물과 대통령의 각오'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대통령에게 솔로몬의 해법을 내놓으라고 하는 건 사실 무리다"는 사설은 "한국 정부가 아무리 지혜로운 정책수단을 써보려 해도 외국의 금융파도가 출렁이고 수출시장이 쪼그라들면 정책효과는 줄어든다"고 강변했다.

국민은 울고 있다? <조선일보> 5일자 1면.
국민은 울고 있다?<조선일보> 5일자 1면. ⓒ 조선일보

<조선일보>도 1면에서 '국민은 울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노점상 할머니를 감싸는 사진과 기사를 무게 있게 실었다. <조선>은 이날 6면에서도 대통령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던 그 할머니의 환하게 웃는 모습을 다시 부각시켰다. <조선>은 "갑자기 만나니 힘들고 반가운 마음에…"이라는 기사에서 "박 할머니는 내가 못 배워서 말은 할 줄 모르고 대통령에게 '우리도 이렇게 힘든데 대통령은 얼마나 더 힘들겠냐'고 했다"고 전했다.

서민 가슴을 시리게 하는 경제 한파는 이명박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 외국의 금융 한파 때문일까. 정치가 서민 가슴을 감싸는 대통령을 도와주지 못할망정 앞길을 막고 있는 것일까. 이들 신문이 전하려는 진정한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이들 신문은 5일자 지면에서 '이미지 정치'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 장면 둘] "MB 붙잡고 운 완도 출신 박할머니 뒷얘기"

대통령 붙잡고 운 할머니 완도출신... <전남일보> 10일자 인터넷신문 메인기사.
대통령 붙잡고 운 할머니 완도출신...<전남일보> 10일자 인터넷신문 메인기사. ⓒ 전남일보

서울 언론이 대서특필한 기사와 사진이 너무 감동적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물 먹은 데 대한 보상일까. "겨울 한파가 누그러진 9일 오전 대통령 앞에서 눈물을 흘려 화제가 된 박부자(73) 할머니의 고향에서는 박 할머니에 대한 추억담을 나누느라 하루해가 진 줄 몰랐다"는 한 지역신문의 기사가 눈에 띈다.

10일 <전남일보>는 "박 할머니의 고향은 완도 고금이다"며 "박 할머니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덥썩 안기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본 고향 마을 사람들은 그를 단번에 알아봤다.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무일푼으로 고향을 떠나 어렵게 살 것이라고는 짐작은 했지만 그렇게 힘들게 사는 줄은 몰랐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고 다시 미화했다.

"박 할머니는 이날 즉석에서 선물 받은 대통령의 목도리를 그냥 집에 두고 다닌다. 또 사흘 뒤 청와대로부터 오찬 초청을 받았지만 박 할머니는 '장사 때문에 시간이 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는 이 기사는 "하지만 이것은 핑계일 뿐이다. 할머니의 속마음은 '다들 어려운데, 나만 맛있는 것 먹으면 안 된다'는 미안함 때문이다"고 덧붙여 보도했다.

의도되지 않은 이미지 정치로 볼 수 있겠지만 미디어 이미지 정치의 후폭풍 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장면 셋] 활짝 웃는 대통령과 악수하는 지역언론사 사장들 '클로즈업'

활짝 웃는 대통령 이미지... <충청투데이> 10일자 1면.
활짝 웃는 대통령 이미지...<충청투데이> 10일자 1면. ⓒ 충청투데이
이날 다른 지역신문들도 활짝 웃는 대통령 모습을 지면에 실었다. 수도권 규제완화와 지역신문발전기금 삭감 등에 이구동성으로 비난의 목소리를 높여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전날(9일) 청와대에서 마련한 지역언론사 사장 초청 오찬 간담회를 큼지막하게 보도한 것이다. 청와대에 낙점 받아 오찬 간담회에 참여한 지역언론사 사장은 44명. 해당 언론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대통령과 자사 사장의 얼굴만을 클로즈업한 사진과 기사를 내보냈다.

이날 간담회는 정부의 수도권 규제완화 발표 이후 거세지는 지역 반발을 수습하고 지역 민심을 듣기 위해 마련됐다고 지역신문들은 크게 보도했다. "지역 언론사 사장들은 이날 이 대통령에게 각 지역 현안과 지역 언론이 처한 현실, 그리고 미디어 문제 등에 대한 정부의 각별한 관심을 촉구했다"고 청와대 대변인은 전했다.

그러나 지역 언론사들은 "지역언론 발전방안을 이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했다"는 내용과 함께 "지역언론이건 지역현안 사업이건 세세하게 챙겨 나가겠다"고 답한 대통령의 발언 내용을 비중 있게 전했다. 이날 지역언론들이 내보낸 대통령 사진은 침통한 경제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이 장면의 이미지를 본 지역 독자들은 어떤 판단을 했을까. 이제 국민이 대통령을 따뜻하게 감싸줘야 할 때라고 생각했을까. '대통령 이미지와 드라마'는 이 정도로 정리하고 냉정한 현실로 돌아가 보자.

지역경제는 암울한 그림자 드리우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10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40~50대 중·장년층 일자리는 소폭 증가한 반면, 30대 이하 청년층 일자리는 1년 전에 비해 19만8000개나 줄었다. 지난 3분기 20~30대 취업자는 987만5000여명으로 1990년 이후 가장 낮은 규모다.

그러다보니 청년실업자 100만명 시대도 열리게 됐다. 최근 노동부가 발표한 '청년층 노동시장' 조사결과에 따르면 15~29세 청년층의 취업애로자 인구는 지난 3분기 101만3000명으로 나타났다. 취업문이 좁아지면서 구직기간도 크게 늘었다.

최근 노동부가 발표한 '통계로 보는 노동시장'에 따르면 학교를 졸업한 청년층이 처음 취업에 성공하는 데 걸리는 기간은 '3개월 이내'가 52.1%로 가장 많았다. 그러나 2년 이상 소요되는 경우도 14.3%나 됐고 평균 구직기간은 11개월에 이르렀다.

이 같은 청년실업난은 금융·경제 위기로 상당수 기업들이 채용 규모를 줄이거나 채용 계획을 포기했고, 신규사원을 채용하더라도 '투자 대비 생산성'이 뛰어난 경력직을 신입직보다 선호한 결과다. 그만큼 취업이 어렵고, 청년 취업은 더더욱 어렵다.

정부의 수도권 규제완화 정책은 지역에 이전하기로 했던 수도권 기업들을 주저하게 하고 있다. 아예 포기한 기업들도 속출하고 있어 지역경제 전망은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는 형국이다.

"전 세계적으로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마당에 대한민국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강변은 그렇다 치자. 라디오 정례연설도 모자라 신문들이 앞 다퉈 국정 최고 책임자의 이미지를 미화하거나 포장하기에 바빠진 이유는 뭘까.

미디어의 이미지 정치 범람에 대한 사회적 논의 필요

최근 일부 언론에 비친 이명박 대통령은 인자하고 따뜻하며 사려 깊은 '서민 대통령' 이미지 그대로였다. 그러나 현실은 언론보도와 많이 다른 모습이다. 순박한 할머니의 가식 없는 눈물은 일부 언론에 '괜찮은 그림'으로 다가왔겠지만 서민의 애환은 '이미지 정치'의 소품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이미지 보도가 과연 독자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 정보일까.

일찍이 미국의 역사학자 대니얼 부어스틴은 "이미지가 이상을 대체함에 따라 이상은 날이 갈수록 촌스럽고 기만적인 것이 되어 가고 있다"고 했다. 이런 이미지 사고의 범람은 '사회적 자아도취'적 증세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매스미디어가 정치캠페인의 중요한 수단으로 등장하면서 매스미디어를 통한 이미지 메이킹 작업은 정치캠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이 되고 말았다. 각 후보자들은 이미지 컨설팅 회사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언론보도나 TV토론에 대비하여 실전대비 연습을 하고 모니터링을 하는 등 유권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기 위해 노력과 비용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종종 보아왔다.

그런데 비선거기간에도 매스미디어가 정치인들의 중요한 이미지 이킹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으니 이러한 노력과 비용은 계속 증대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국민들은 미디어를 이용한 권력의 이미지 메이킹 캠페인에 쉽게 현혹되지 않기 위한 교육·훈련이라도 받아야 할 모양이다. 권력은 이미지 생상공장이라 할 미디어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더불어 대단히 정치적이고 정교한 심리전으로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매체 비평을 넘어서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미디어의 정치 이미지 생산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메시지 중심의 미디어 이데올로기를 논의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매스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이를 활용한 정치적 행위 증가, 특히 미디어를 통해 비춰지는 대통령의 '이미지 정치' 범람을 경계하자는 뜻이다.

[최근 주요기사]
☞ "시험은 내가 거부했는데 왜 선생님을 자르나요?"
☞ "30년 버텼지만 점포 정리... 행복하세요"
☞ [기고] 동료 의원들, 종부세 깎는 게 뭐 그리 급합니까
☞ [미디어 비평] 위기의 MBC 뉴스와 75명 기자의 성명
☞ [엄지뉴스] "나를 징계하라"... 서울시교육청 앞 1인시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선샤인뉴스(sun4in.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미지 정치#미디어 정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