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에 눈을 뜨곤 날이 밝아올 무렵까지 계속 뒤척였다. 옆엔 딸아이와 아들, 아내가 나란히 누워 자고 있다. 두 녀석은 이불을 걷어찬 채 쌔근쌔근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다. 한 사람은 이불을 꼭 여민 채 자고 있다.
이따금 심한 비염 증세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아들 녀석을 어둠 속에서 바라보았다. 요 몇 달 치아 교정을 위해 마우스피스를 물고 잔 탓인지 얼굴살이 쪽 빠졌다. 그 얼굴이 애잔하게 들어온다. 걷어 찬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에 입맞춤 하니 귀찮다는 듯 얼굴을 돌린다.
어제 난 참 고약한 아빠가 되었다. 나쁜 아빠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시험 점수에 매인 아빠가 되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와 아들이 어제 시험을 보았다. 딸아이는 초등학교 마지막 시험이고 아들은 앞으로 2년을 다 봐야 한다. 초등학교를 마치면 둘 다 더 험한 정글로 들어가야 하는 현실에 나도 모르게 아들의 시험 점수에 역정을 내었다.
아들은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다. 그래도 학원 한 번 안 가고 나름대로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시험에선 꼴찌 수준의 점수를 받아왔다. 그렇다고 단순히 그것 때문에 화를 낸 건 아니다. 일종의 비교의식이 작용했다.
아들은 시험이 끝나고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집에 왔다. 시험 잘 봤느냐는 말에 첫마디가 많이 어려웠다는 대답이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얼마나 틀렸는데?"
"응, 아빠. 열여섯 개."
"그래. 그럼 넌?"
아침마다 집에 와 아들과 함께 등교하는 친구에게 물으니 그 아이도 어려웠다고 말하며 이렇게 대답한다.
"전 두 개 틀렸어요. 다른 건 다 백점이고요. 한 과목만. 그리고 얘는 다섯 개요."
아니 어렵다고 말하면서 자기는 두 개, 다른 친구는 다섯 개, 아들은 열여섯 개. 그 말을 듣는 순간 좋지 못한 생각들이 못이 박히듯 꽂혔다. 그런데 철부지인 아들 녀석은 아빠의 표정도 읽지 못한 채 베란다에 나가 친구들과 공놀이를 한다. 슬쩍 눈치를 보긴 하는데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다.
그런 아들 녀석이 얄미워 밖으로 내보내자마자 딸아이가 들어온다. 인사를 하며 들어오는 아이에게 '시험은?' 했더니 '몰라, 망친 것 같애.' 한다. 또 화가 밀려오는 걸 참고 저녁시간에 두 녀석을 앉혀놓고 잔소리를 하고 그동안의 모습에 대해 싫은 소릴 했더니 아들은 안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딸은 뭔가 끄적거리며 쫑알댄다. 그런 딸아이의 낙서내용을 보고 온 아내가 '애들 잡들이 하니까 시원해요?' 하곤 퉁을 한다. 딸아이의 낙서 내용은 좀 충격적이었다. 그 속엔 시험과 아빠에 대한 원망이 잔뜩 들어있었다.
'시험을 증오할 것이다. 나쁜 시험.'
'시험을 만든 시험 중독자들……'
'초등학교가 인생을 정하지 않아!!'
'시험 땜에 BIG BANG도 마지막, 망했다.' 등등
사실 지금까지 아내와 난 아이들 점수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동안 시험을 잘 보든 못 보든 '열심히 했으니 괜찮아. 앞으로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돼.' 하곤 그날은 무조건 신나게 놀아주곤 했다. 헌데 이번에 그러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그대로 놔두면 살아가기가 힘든 세상살이가 떠올라서 그런지도 몰랐다.
아이들을 혼내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두 녀석을 다시 불러 아빠의 마음을 조용한 목소리로 전했다. 그리고 내 생각을 감정을 실지 않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빤 솔직히 좀 실망스러워. 너희들이 하고 싶고 보고 싶은 것 다 허용해줬는데 그 결과가 안 좋잖아. 그럼 너희들과 엄마 아빠가 해 온 방법이 잘못된 거라고 보거든. 아빤 그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고쳐야 한다고. 너희들 생각은 어때?"
"네."
"앞으로 우리도 더 열심히 할게요. 계획도 짜구요."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으며 컴퓨터 하는 시간, 텔레비전 보는 시간을 서로간의 합의하에 주말로 한정했다. 물론 아이들도 자신들이 필요한 시간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동안 아이들과 내 마음은 여름철 엿 녹듯이 풀어졌다. 그런데 대화 끝 무렵 아들 녀석이 제법 어른스런 말을 해 날 감동시켰다.
"아빠, 이제 아빠를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게요. 멋진 아들이 될게요."
지금까지 아들은 이와 비슷한 말도 한 적이 없다. 헌데 녀석은 눈가에 이슬을 맺혀 가면서 그렇게 말을 한 것이다. 그런 녀석이 기특해 안아주며 '고마워. 역시 아빠 아들이야!' 했더니 배시시 웃는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갑자기 아들 녀석이 아빠에 대한 글을 써주겠다며 노트를 들고 방에 들어가더니 한참 후에 나온다. 그리곤 내 손을 잡고 한쪽으로 끌고 가더니 '아빠만 봐.' 하면서 노트를 준다. 글은 '아빠'란 이름으로 지은 일종의 헌시였다. 아빠에게 주는 감동의 글이었다. 그러면서 녀석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글이었다. 난 그 글을 딸아이와 아내를 앞에 두고 큰 소리로 읽어주었다. 봐! 나 이런 남자라고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아빠
우리 아빠는 자상한 아빠
내가 아는 남자 중 제일 멋있는 남자
그리고 아주 재미있으시는 아빠
그치만 잘못할 땐 아주 엄하신 아빠
그치만 제일 멋있는 남자
우리 아빠
나한테 제일 사랑스러운 남자
우리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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