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2일, 춘천 풍물 시장. 손등 위로 한두 방울 떨어지는 빗방울에 '배추 아저씨'의 손길이 바빠진다. 천막 지붕도 드리워야 하고 고춧잎 천 원어치도 저울질해야 한다. 물기 머금은 푸릇한 배추가 싱싱하다.
"아저씨, 이 배추 괜찮아요? 김장으로 쓸 수 있나?"
"아 그럼 두말하면 잔소리지. 이것 봐, 똥구녕이 이만큼 크면 김장 배추! 맛난 배추여. 한 단에 이천원! 싸제? 무는 천원~"
몇 번 흥정이 오가고 아줌마의 손에 배추 몇 포기와 무가 묵직하게 들린다. 호탕한 웃음으로 배웅하는 아저씨는 주름진 손을 툭툭 털고 허리춤의 전대를 고쳐 맨다. 직접 수확한 농산물인지를 묻자 말할 것도 없다는 표정이다.
"우리가 직접 다 농사지어 나온 것들이지. 씨 뿌리고, 약 뿌리고, 힘들고 돈 들여서 농사지어도 힘들어. 고추가 말이여. 꼭지가 마르면 못 팔어. 딴 데서는 꽁지만 똑 자르고 포장해서 팔겠지. 우린 오늘 못 팔면 내일은 밭에 내다 버려야 한단 말이야."
한 바구니씩 넘치도록 담아놓은 고추 바구니 옆에 자리 잡은 낡은 저울을 보고 있노라니 아저씨는 동고동락한 벗이라며 걸걸한 목소리로 자랑을 늘어놓는다.
"이 저울이 20년 된 저울인디, 아마 여기서 이만큼 오래된 건 없을 거라구. 이것이 아주 정확혀. 눈속임이 없단 말여. 뒤에 나사를 돌리면 눈금이 딱 맞는거렁."
유독 장터에는 앉아 있는 것들이 많다. 앉은뱅이 저울이나, 물오른 생선, 때깔 고운 과일들 모두 허리를 구부려야 잘 볼 수 있다. 장터 바닥에 자그마한 보자기를 깔아놓고 채소를 파는 할머니가 호박 좀 사라며 손짓한다. 생선 장수 아저씨의 칼 놀림도 바쁘다. 삼삼오오 모인 아줌마들이 고등어 앞에 섰다.
"아저씨, 생물 자반 한 손 주세요."
"아이고 예쁜 아가씨들이 또 오셨네."
"호호호. 아저씨 상 줘야 돼."
"난 상 주는 것보다 얼굴 보여주는 게 더 고마운데?"
장사 수완이 좋은 아저씨와 단골손님 간의 유쾌한 대화가 시끌벅적하다. 즉석 어묵 30년 장사했다는 부부는 춘천 풍물장 외에도 포천·송탄동·평택동 시장의 장날마다 이동하며 장사한다. 한 달에 네 군데를 돈다.
"여기는 5일 장이니까 5일마다 오고, 또 4일 장인 곳은 그쪽으로 가는 거고. 정해져 있으니까 옮겨 다니느라 바뻐."
"전국 지점을 두셨네요?"
"허허허, 좋게 말하면 그런 셈이지. 우리 딸이 스물두 살인데, 지금은 연수 갔다 와서 휴학하고 있어. 30년 동안 이 장사 해서 다 키워놨지."
슬쩍 핸드폰에 있는 딸 사진을 보여주는 얼굴에 함박꽃이 피어난다.
"아줌마, 새우바랑 문어바랑 매운 어묵 좀 싸주세요."
봉지에 담아 건네는데 알뜰함 밴 덧말이 따라붙는다.
"이것 좀 덤으로 주시면 안 돼요? 그래도 7천원이나 샀는데…."
머쓱한 웃음이 사라지기도 전에 주인 아줌마는 봉지에 오뎅을 가득 담아주며 "많죠?"하고는 씩 웃는다.
소시민의 삶터 위에 불어 닥친 '날파람'
시장길 위에 빗방울이 자리를 차지한다. 예전보다 확실히 발길이 뜸하다. 춘천 풍물 시장은 1989년, 노점상을 위한 시장으로 만들어졌다. 2일과 7일이면 일대 교통이 마비될 정도로 '잘 나가던' 5일장이었다.
2008년 현재, 20년간 민초의 터전이었던 이곳이 술렁이고 있다. 26년 전 효자동의 물길이었던 약사천을 복원하는 사업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물길을 잇는 길이 시장을 지나므로 복개 부지를 위해 이전을 결정했다. 춘천시에서 이전 예정지로 삼고 있는 지역은 퇴계동을 지나는 경춘선 고가 철도 하부 공간이다.
그러나 퇴계동 주민들과 풍물 시장 상인들의 반대가 거세다. 시장 상인들은 사업의 중심에 서 있지만 생존권에 대한 구체적 대책과 사전 협의를 제안받지 못했다. 새 장터를 꾸려도 시장 활성화 방안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앞으로 대형마트가 2개나 들어올 예정이라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고가 철도 밑이라 소음 및 먼지 등 환경이 좋지 못하고,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철도공사에 임대료를 내고 시장 부지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란이 다시 일어날 소지가 다분하다. 번영회 측은 왜 굳이 고가 철도 부지가 시장이 되어야 하느냐며 안정적인 부지로 이전하면 시장을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퇴계동 주민과의 갈등, 철도청과의 힘든 줄다리기를 안 해도 될 것이라고 못 박았다.
퇴계동 측은 '공지천 포장마차·풍물시장 이전 반대 추진위원회(이하 반대추진위)'를 구성했다. 대우 이안·유승 한내들·쌍용·우성 아파트 등 4개 아파트 연합회와 인근 아파트 주민이 합세해 2400여명이 서명운동을 마친 상태다. 춘천시가 당초 철도공사에서 약속했던 주차장이나 공원 등 편의시설 제공을 무산시키고 재래시장을 이전한다는 이유다.
이안아파트에 사는 A(48)씨는 약사천 사업은 좋지만 시장 이전으로 인해 주변 환경이 저해되고, 우리는 재래시장보다 마트를 이용하게 된다며 시장 이전에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쳤다.
춘천시의 입장을 듣기 위해 도시행정과로 몇 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워낙 민감한 사안이고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어 할 말이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시장 활용과 주민 갈등에 대해 방영한 강원민방 GTB <갑론을박 뜨거운 감자>에서 도시건설국장 심규호씨가 밝힌 내용을 인용한다.
"벼룩시장은 한시적 5일장이고, 전통시장은 전통 물건을 팔고, 명품시장은 이러한 부분을 명품화한 시장을 말한다. 지금 형태의 재래시장이 철도 하부공간으로 이전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 등 해외 활용 사례를 벤치마킹 하여 전통 명소로 탈바꿈해 명품화할 것이다."
명품 만들려면 '장인'의 자세 배워야
갑자기 의문이 든다. 명품화, 명품화 하는데 과연 '명품화'라는 게 무엇인가? 생뚱맞게 사전을 뒤적인다.
명품[名品] [명사] 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 또는 그런 작품.
명품의 조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세계 최고의 명품이라 일컫는 것은 모두 오랜 시간에 걸쳐 변함없이 최상의 품질을 선보였고 만드는 이의 철학이 담긴 제품들이다. 모름지기 명품에는 휘황찬란함보다 깊고 그윽한 개성을 지속적으로 지켜나가는 멋이 있다. 영국의 왕실 도자기를 248년째 만들어온 웨지우드가의 8세손 토머스 웨지우드는 명품의 조건을 "역사 속에서 축적된 이야기"라고 정의했다.
우리네 재래시장이 변화의 바람 앞에서 위태롭게 서 있다. 정이 있는 곳에는 아픔이 있다. 아픔을 알기 때문에 정도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나눌 줄 알고, 누릴 줄 안다. 풍물시장의 진정한 명품화 조건을 생각해본다. 역사 속에서 축적될 수 있는 시간과 안정적인 공간, 그리고 사람 냄새 듬뿍 나는 정이다.
풍물시장의 하나슈퍼 주인 아주머니와의 이야기를 담는다.
- 약사천 사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약사천 복원되면 청계천처럼 되면 주변 땅값도 올라가고 환경도 좋아지고 춘천시 입장에서 보면 더 좋겠지. 그래도 시장은 제일 어려운 사람들, 영세민들이 사는 터전인데…. 여기도 20년 전에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형성한 거야. 없는 서민은 당장 먹는 것이 중요하단 말이야. 여기서 장사해서 가족들 먹이고 지금껏 살아왔는데."
- 춘천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으로서 풍물시장은 어떤 의미인가요?
"추억이 많은 곳이지. 아가씬 젊어서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밑에서부터 올라온 추억이 있어. 옛날에는 꽹가리도 울리고 무대에서 노래자랑도 하고 참 신났지. 옛날 풍습이 그대로 닮아있는 곳이기도 하고, 풍물시장이 도심에 있기 때문에 개발하려고 하는 거겠지. 시대가 변하면서 발전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시장이 없어지는 건 안타까운 일이야."
그때, 한 아줌마가 웃으며 불쑥 들어선다. 안부 인사를 전하러 왔다며 바쁘냐고 묻는다. 쓴웃음 지으며 하는 아주머니의 대답이 어쩐지 서글프게 들린다.
"장날에 안 바빠요. 나중에 또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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