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부평 문화의거리에는 갖가지 브랜드 의류점이 즐비하다. 하지만 불과 40여년 전만해도 이 일대 옷가게는 단 네 군데에 불과했다. 그나마 있던 세 군데도 다 사라지고 지금은 딱 한 군데만이 지나온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문화의거리에서 꼬박 41년 동안 옷가게를 하고 있는 김애희(70)씨의 머리에도 어느덧 세월이 뱄다. 올해로 칠순이라 할머니라고 부를 만도 하지만 그가 칠순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단골 중에서도 그와 절친한 단골뿐이다. 그라고 해서 평탄한 세월을 보냈을 리 없겠지만, 그가 가게 찾아오는 손님들 코디 해주는 본새와 그의 고운얼굴이 칠순일 거라고 짐작치 못하게 한다.
김씨는 1968년 현 부평 문화의거리 르까프점 근처에 가게를 냈다. 그리고 3년 뒤 지금자리로 옮겨 줄곧 한자리에서 장사하고 있다.
그는 "요즘에 여기저기에 차밍이 많잖아요. 차밍스쿨, 차밍 뭐, 또 무슨 차밍 하는 것들 말이에요. 엄밀히 말하면 내가 원조에요. 차밍이라고 가게를 낸 게 68년이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사업자등록증은 안 바뀌고 계속 차밍으로 돼 있답니다"라고 말했다.
열아홉에 부평에 올라온 그는 스물일곱에 결혼해, 몇 년 뒤 가게를 냈다. 가게를 처음 냈을 때 취급 품목은 유아복과 아동복이었다. 그때 그 옷을 입고 다니던 아이들이 이제는 40대 어른이 됐고, 그 아이에게 옷을 사 입혔던 이들도 김씨처럼 어느덧 할머니가 됐고, 그들은 여전히 차밍의 단골손님이다.
당시에는 한복이 아닌 서양 옷을 파는 곳이라 해서 다들 양품점이라 불렀다는데, 김씨가 가게를 낼 때만해도 이른바 양품점은 네 군데밖에 안 됐다. 그는 "가게를 낼 때, 다 기억은 안 나지만 20세기 양품점, 경희양품점, 유신양품점 이렇게 세 군데가 있었어요. 지금은 다 사라지고 없지만 그 때는 옷 사러 부평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 가게마다 붐볐답니다"라고 전했다.
아동복을 3년하고 나서 김씨는 주로 여성복을 취급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여성복을 취급하고 있다.
가게를 찾은 손님들에게 40년 가까이 이곳을 꾸준히 찾는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옷을 고르던 손님들이 오히려 핀잔을 줬다. 한 할머니가 "난 여기 15년 째 단골이우. 옷이 좋으니까 오는 게지. 원 물어 볼걸 물어 봐야지"하자, 작전동에서 왔다는 한 손님은 "난 25년이요. 옷 좋고, 우리 사장님 좋고, 거기에 정까지 들었으니 부평 나오는 길이면 들를 수밖에" 한다.
김씨는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새벽길을 나서 남대문으로 옷을 때러 다녔다. 지금은 차를 이용해 오르락내리락 하며 수월하게 하고 있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씩 그는 전쟁을 치러야했다.
그는 "한번은 부평역에서 첫차 타기위해 새벽길 나서는데 경찰이 잡는 것 아니겠어요. 말인즉 장물아비인줄 알고 그랬다고 하더군요. 말도 말아요. 올라가는 것 보다 내려오는 게 더 힘들었어요. 짐이 많다보니 서울역에서 삼화고속을 타고 내려와야 하는데, 기사양반들이 짐이 많다며 안태워 주기 일쑤라 웃돈을 쥐어주거나, 담배라도 사주고 간신히 내려와야 했고, 그도 아니면 총알택시 잡아타고 내려왔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가게를 나서는데 한 할머니가 옷을 고르려 들렀다. 몇 벌을 입어도 성에 안찼는지 얼굴에 불만이 팽배하다. 하지만 김씨는 제 옷 고르는 마냥 싫은 내색 한 번 않고 골라주며 코디를 해준다.
그는 "장사하면서 배운 게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다 개성이 있어요. 그걸 자신이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해요. 그래야 남들도 자신을 존중해주는 법입니다"라고 전했다.
김씨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장사는 계속할 거라고 한다. 같이 장사했던 이들 중 남은 이는 이제 김씨밖에 없지만, 그는 장사할 수 있음에 고마워한다. 그 고마움을 손님에게 전할 뿐이라는 그는 가게를 찾는 이에게 꼭 야쿠르트 하나씩 손에 쥐어준다.
그래서 일까. 여전히 부여에서도, 김포에서도 그와 그의 옷을 보기위해 사람들은 부평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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