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머리에 남아있는 '평강공주'는 울보였다. 울보 고집을 꺾기 위하여 천하의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아버지 평원왕 엄포가 현실이 되어 바보 온달과 결혼하였고, 그 바보를 고구려 최고의 장군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어린아이들에게는 익숙한 옛이야기이다.
현명한 아내가 어리석은 바보를 위대한 장군으로 만들었다는 이 논리를 재해석한 동화가 나왔다. '사랑이 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랫말을 쓴 정지원씨가 <태양의 딸 평강>을 썼다.
현모양처 개념이 강하게 자리잡은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보다는 '여성의 주체성'에 바탕한 평강에 대한 재해석이라 할 수 있다. 정지원씨는 머릿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는 많은 공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평강보다 더 당당하고 용감한 공주를 알지 못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는 친구들이 평강처럼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기를 바랍니다."(지은이 말)
평강은 고구려 공주로서 주체성이 확고한 여성이었고, 당당하고 거침없는 발걸음을 통하여 '바보'가 아닌 가장 따뜻하고, 매력 넘치는 사람이었던 온달이 고구려 역사를 온몸으로 써 내려가도록 인도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해모수와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 난 주몽의 자손 평강.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먼저 보내고 아버지 평원왕의 사랑을 받지 못 하며 계모(도화부인)의 모함으로 인해 자신을 돌보든 유모까지 잃게 된다. 평강공주는 차가운 눈빛과 침묵으로 저항하며 평원왕과 도화부인에게 저항한다.
자신이 고구려의 공주라는 사실을 증오하며 자신을 부정하고 백성들의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온달. 가난으로 인해 굶어 죽고 귀족의 종으로 팔려가야 하며 귀족 외 백성들에게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굴욕스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의 현실에 피를 토하듯 절규하는 사내의 말에 평강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하오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굴욕스러운 삶을 공주님은 결코 이해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가난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 놓는지 공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굶어 죽을 수 없어서 자식을 귀족들의 종으로 팔아넘기는 아비의 심정을 아십니까?"(45쪽)
이 대목을 읽는 이들은 지금까지 '천하의 바보'였던 온달에 대한 기존 관념이 흔들리는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온달이 바라는 세상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내였던 온달을 통하여 평강은 강인한 고구려의 딸. 안락한 궁중의 생활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 갈 줄 아는 힘을 되찾고 백성들의 가난과 슬픔과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그들의 어미로 평강은 되살아난다.
"그래 너희가 내 자식들이다. 나는 이제부터 너희 모두의 어머니답게 살아갈 것이다. 이 나라의 아이들이 모두 내 아이들이다."(173쪽)
자기가 낳은 아이가 죽었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자신의 젖을 물리면서 평강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신분보다는 사람 자체를 더 사랑하고, 귀하게 여겼다. '밥이 평등해야 사람도 평등해진다'는 평강의 말은 지금도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혁명적이 사고였다. 평강은 이 말을 머릿속에만 담아 두거나, 말만 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았다.
평강은 진정 주체적인 삶을 살았다. 여성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인간으로 사는 바람을 간직했다. 온달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되기를 소원한 것처럼 평강도 신분이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이유만 하나만으로도 가장 가치 있는 존재임을 평강은 알았고, 그 사람을 위해 살았다.
지은이는 평강과 온달을 통하여 그저 바보가 장군이 되었다는 옛이야기, 그래 열심히 공부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놀라운 결말로 우리를 인도한다. 지은이는 평강과 온달을 통하여 아직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우리 세상을 향한 외친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살고 싶어 우리는 싸웠다네. 임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웃어 주소서. 임아,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살고 싶어 우리는 싸웠다네. 그대들은 나를 알 것이다. 우리는 땅 한 뙈기 없이 태어났다. 굶주림보다 더한 능멸을 받았고 죽지 못해 사는 거리고 생각핬다. 그때 우리는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 없었다. 그대들은 왜 나와 함께 이 험한 전쟁터로 왔는가? 그대들과 내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나는 내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여기에 왔다."(221쪽)
울보와 바보가 만나 결혼하고 울보가 바보를 열심히 가르쳐 장군이 되게했다는 옛이야기를 가감히 뒤로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꾼 온달과 함께 평강은 진정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세상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시대가 아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고 할 때마다 거대한 세력은 온달이 경험했던 그 경험을 더하려한다. <태양의 딸 평강>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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