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위인들의 생가를 찾아가는 여행이 좋아졌습니다. 이렇다 할 볼거리나 즐길 거리는 없어도 퇴락한 생가의 툇마루에 걸터앉아 풋풋한 시골 정취를 심호흡하듯 들이마시다보면 이런 호사가 어디 또 있을까 싶습니다. 소담한 흙담을 따라 걷는 고샅길도 좋고, 그 길에서 만난 촌로의 푸근한 반김도 여느 여행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잘 보존된 생가에 가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역사가 돼 이 세상엔 없는 사람이지만, 마치 마실 나갔다가 곧 돌아올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대나무를 얼키설키 엮어 만든 사립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오, 자네 왔는가'하며 반가운 손님처럼 다감하게 맞아줄 것 같습니다.
온종일 스산한 겨울바람이 불었던 지난 주말(14일), 충남 홍성을 찾았습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큰 발자취를 남긴 만해 한용운과 백야 김좌진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두 위인은 야트막한 산봉우리 하나를 서로 등에 맞댄 한 고장 사람들입니다.
만해와 백야가 꼭 10년 터울의 동시대 인물이니, 고향 산천을 공터 삼아 놀던 시절 서로에 대해 알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배움이라 해봐야 한학을 배우기 위해 서당에 다닌 게 고작인 만해에 견줘 백야는 부유한 명문 가문 출신인데다 정규 교육을 받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으니 삶의 노정은 크게 달랐지만,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그들의 삶의 지향점은 같았습니다.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다가 실패를 경험한 만해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 승려가 된 후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며 독립운동에 뛰어듭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렸으며, 불교 혁신과 저항 문학에 앞장서며 <님의 침묵>, <알 수 없어요> 등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후 불교의 대중화와 청년들의 독립사상 고취에 힘쓰다 광복을 1년 남겨둔 1944년, 영양 결핍과 중풍 등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편, 백야는 15세 때 이미 거느리고 있던 노비를 풀어줄 만큼 시대를 앞서간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전 재산을 내놓아 학교를 건립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이끌었으며, 국권을 빼앗긴 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고,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와 함께 무장 항일투쟁 사상 최대의 승리로 일컬어지는 '청산리 대첩'을 이끈 독립운동의 큰 별입니다.
일제의 총칼에 잔뜩 주눅이 든 나약한 지식인과 민족을 배반한 변절자들로 넘쳐나던 시대, 홍성이 낳은 두 위인은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 역사의 자랑이며, 후세에 영원토록 기억하고 간직해야 할 교훈입니다.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 남긴 작품들을 소리내어 읽는 것, 또 오늘처럼 그들이 나고 자란 집터를 찾아 애써 자취를 더듬어보려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본디 만해의 생가터에는 대숲에 에워싸인 비석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초가지붕을 인 새뜻한 생가가 들어서더니, 쌍둥이마냥 관리사무소 건물과 높은 계단을 올라야만 만날 수 있는 기와집 사당이 연거푸 세워지면서 아예 '만해의 생가 마을'이 되었습니다. 바닥은 블록이 가지런하게 깔렸고, 여느 공원처럼 정원수도 심어졌습니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입구 주차장에 세워진 첨단 체험 시설을 갖춘 기념관입니다. 생가를 두르고 있는 야트막한 산등성이보다 높아 보이는 2층 콘크리트 건물로, 만해의 행적을 기록한 패널과 작품들을 전시해놓았으며, 탁본 체험장, 인터넷 영상실, 도서관 등 체험 공간이 마련돼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시설들이 만해의 치열했던 삶을 전혀 느끼게 해주질 못한다는 점입니다. 어린 학생들을 위한 배려라지만 디지털화한 기념관에서는 만해가 여느 값싼 영상 만화의 주인공이 된 듯하고, 경건해야 할 사당에 모셔진 영정은 외려 괴기스럽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세월의 무게 속에 생가가 스러졌듯 이곳에 있었을 마을이 남았을 리 없지만, 아예 새뜻한 공원으로 가꿔진 생가터에서 '만해'를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가 이곳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풍광 그대로를 기대하는 건 무리라 해도, 얼마든지 그 분위기만큼은 살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덩그러니 선 비석 하나가 외로워보였다면 그저 조촐한 생가 한 채면 족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백야의 생가터도 생뚱맞긴 마찬가지입니다. 그 넓은 터에 사람의 온기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생가 한 채, 콘크리트 기념관 하나, 그리고 높은 계단을 올라 만나는 육중한 사당 하나, 마치 같은 사람이 설계한 것인 양 건물 수와 배치가 비슷합니다.
단지 만해의 것과 다른 게 있다면 명문 대가 출신답게 복원된 생가가 초가가 아닌 행랑채와 안채를 번듯하게 갖춘 기와집이라는 것과, 생가임을 강조라도 하려는 듯 '김좌진'이라는 한자 문패가 어색하게 걸려있다는 점 정도입니다.
어려서 집 노비들을 풀어주었다는 이야기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업적들을 주련으로 만들어 놓은 게 이채로운데, 단연 눈길을 끄는 게 있다면 문 밖 마굿간에 매어져 있는 '백마' 한 마리입니다. 백야의 항일 무장투쟁의 혁혁한 공을 보여주려는 의도일 테지만, 놀이공원의 회전목마에서 뜯어온 듯한 것이어서 백야의 항일 의지를 느끼기는커녕 우스꽝스러울 지경입니다.
잘 다듬어진 잔디밭과 낙엽 하나 없이 깨끗하게 청소된 보도블록 계단길, 큼지막한 컬러 사진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안내판, 복제품이거나 별로 궁금하지 않는 것들만 주저리주저리 전시해놓은 기념관, 그리고 입구에 곧추 서서 1년 365일 펄럭이고 있는 하얀 태극기까지.
한 세기 전 그들이 나고 자란 곳이었을지언정 지금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곳처럼 느껴졌습니다. 비록 생가를 찾아왔지만 꼭 '집'을 보고 싶어 온 것은 아닌데. 차라리 빈 터였으면 비장감이라도 들었을 텐데.
아직은 덜 '개발'돼 있지만, 두 위인의 생가 주변도 여느 관광지처럼 식당이나 기념품 가게가 빼곡하게 채워질 것입니다. 곧 그들이 역사에 남긴 이름과 업적은 고향의 '경제'를 위해 유용하게 쓰이는 셈입니다. 혹 우리 고장에 '돈 될 만한' 역사적 인물은 없는지 지방자치단체마다 혈안이 돼 있고, 심지어 소설 속 주인공마저도 우리 고장의 실존 인물이라며 생가 짓기에 여념이 없는 현실도, 모두 '경제'를 위해서입니다.
인물과 역사를 활용해 돈 벌려는 것, 그 자체를 두고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위인들의 생가가 역사 학습과 성찰의 장이라는 의미를 도외시한 채 오로지 유용한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깔고 덮고 세우고 꾸미는 등 생가터를 화려하게 '꽃단장'시키기보다는 후세인들이 여전히 터를 잡고 살아가는 마을 속에 '산 채로' 남겨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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