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망해도 나는 웃는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게다가 대폭락 시대에도 살아남는단다. 요즘 같은 불황에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꼬이고 얽힌 돈 문제가 술술 풀린다고 소개했다. 주가 하락에 눈물 흘리고, 펀드 실패로 '쪽박' 찬 이라면 눈이 번쩍 뜨일 대목이다.
재무전문가 이광구가 쓴 <대폭락 시대에도 살아남는 재무설계>(엘도라도 간)는 제목도 그렇지만 부제가 파격이다. 시원시원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도대체 그 비법이 뭐기에.
7200만원짜리 홈쇼핑, 6000만원 날린 남편... 생생한 사례가 강점
마술상자를 열듯이 잔뜩 기대를 안고 책장을 연다. 어, 그런데 이상하다. 가난했던 글쓴이는 친구들과 자취하던 방에서 바로 살림을 시작했다. 주례도 없이 아주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은 기차 타고 남원으로 갔다.
가난하게 시작한 지은이가 이제 성공담을 잔뜩 늘어놓겠거니 싶은데 그것도 아니다. 1995년 노동자협동기업을 만들었다 빚 1억원을 졌다. 그 때문에 6-7년간 잔뜩 고생했다. 2002년엔 아내가 총선과 지방선거에 출마하면서 또 빚을 졌다. 게다가 자식은 세 명이나 된다. 그래도 행복하단다.
지금껏 그려왔던 금융전문가에 대한 그림이 사라진다. 이 독특한 사람이 말하는 재무설계는 과연 무엇인가. 책장을 넘기다 보니 '돈 버는 비법'이 아니다.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고 더 나아가 내 사람을 관리하면서 삶을 풍요롭게 설계하는 비법을 다룬 책이다.
하긴, 얼마 전 어느 자리에서 우연히 '빚'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한 친구가 빚이 3000만원 가량 있다고 말했다. 몇 년 전 뜻하지 않게 몇 백만원 정도 지출을 한 뒤 눈덩이처럼 빚이 불어났다고 한다. 몇 백만원 빚을 갚기 위해 카드대출을 하면서 빚이 불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자포자기 심정이 되면서 갚을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그 친구는 특별한 생계수단이 없다.
또 다른 한 친구는 효성이 지극하다. 부모님에게 빚을 내서까지 용돈을 드린다. 오래 전 생긴 빚은 계속 불고 있는 상태. 빚이 문제라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용돈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두 친구를 보면서 돈 쓰는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소득이 늘어도 빚을 해결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엔 내 친구들처럼 수많은 생생 사례가 나온다. 돈 버는 동생을 데리고 살면서도 하숙비 달라는 말을 못해 속 앓는 언니, 아낀 용돈을 모아 어머니께 드리다가 부인과 크게 싸운 남편, 남편이 날린 6000만원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60대 석씨, 홈쇼핑에서 덜컥 7200만원짜리 상품을 산 총각 김씨를 보면 내 모습, 가족, 이웃들 모습이 자연스레 겹쳐진다.
이씨가 실제 상담을 하면서 겪은 사례를 다뤄 생생하다는 게 이 책이 지닌 강점이다. 사례가 다르니 접근법도 다르다. 강조하는 점은 있다. 수익률 대신 돈 통제력에 방점을 찍는다.
너무나 단순한 접근법이지만 그 결과는 놀랍다. 설마 될까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이 바뀌는 과정이 나온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단기 이익에 급급해하면서 멀리 보지 못해 어려움에 빠진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글쓴이가 슈퍼맨은 아니다. 차마 해결하지 못하는 과제 앞에서 한숨도 쉬고, 같이 생각해보자고 문제를 던지기도 한다. 비교 문화는 지은이도 차마 어쩌지 못하는 바다.
"'40평대 아파트 사는 아이가 그보다 좁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이런대요. '너희 집은 왜 이리 좁아?' 저는 우리 애들한테 그런 얘기 듣게 하고 싶지 않아요." -P43
엄마 친구의 아들 또는 딸을 일컫는 '엄친아'와 '엄친딸'은 이런 세태를 반영한 유행어다. 정신과 의사들은 자꾸 비교를 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학생 시절에는 공부 잘한다고 '엄친아' 대접 받다가, 사회에 나간 뒤 공부는 못했지만 억대 연봉을 받는 친구와 지위가 바뀌기도 한다.
변호사, 교사, 의사, 디자인연구소 소장이 재무설계를 말하다
글쓴이가 쉽게 이게 답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이론과 현실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교육을 반대하지만 자기 자식이 공부를 잘하면 좋아한다. 사교육 반대를 말하는 학부모들이 모임을 만들었다가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게 되면 하나둘씩 빠진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결국 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돈을 많이 벌거나 제대로 관리하는 것만으론 어렵다. 책은 수많은 고민들을 담았다. 돈을 매개로 한 부부갈등, 부모와 자식 간 갈등, 사교육에 목메는 학부모들.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에 대한 답이 없다면 돈 관리는 모래성에 불과하다.
"그 간부는 조합원들이 10년 전에 비해 훨씬 소득은 많아졌지만 행복해진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오로지 돈만 많이 벌기 위해 일하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협력업체나 다른 분야에 대한 관심은 없고, 오로지 자기 몫만 챙기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바뀌어 있고, 이제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고 걱정했다." -P176
그래서일 거다. 글쓴이는 수많은 전문가들로부터 글을 받아 재무칼럼이라는 이름으로 책에 담았다. 그 내용들이 제법 쏠쏠하다. 이문구(CFP, 공인중개사), 김치형(로하스SOT의원 원장, 한국의과학 콘텐츠 연구원장), 김대호(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홍제남(교사), 조진표(와이즈멘토 대표)가 글을 썼다.
글쓴이는 재무설계를 하면서 자기 삶이 많이 바뀌었다고 털어놓는다. 인생을 계획하게 되고, 꿈꾸게 됐다고 말한다. 적게 번다고 해서 불행한 게 아니고, 많이 번다고 해서 행복한 게 아니다. 돈으로 말문을 연 글쓴이는 교육, 가족, 정치, 경제를 버무린 뒤 결국 '행복'과 '꿈'으로 마무리한다. 돈 많이 버는 비법이 아니라 행복해지는 비법을 찾는 이라면 <대폭락 시대에도...>에 귀 기울여 볼 만하다.
"재무상담 일을 하면서 내 인생을 구체적으로 설계하고 실천해 나가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기쁜 일이다. 재무설계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더욱 더 건전한 문제의식을 키워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이 뜻을 펼쳐감에 따라 또 많은 사람들이 돈 문제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지고 행복하게 살아갈 것으로 기대한다. 벌써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P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