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매듭짓는 12월 끝자락이 되면 오랜만에 떠오르는 기억처럼 가물거리는 음식이 있다. 마치 붉은 바다 속을 헤집고 다니는 듯한 새알심이 동동 뜬 팥죽과 척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팥수제비다. 그중 팥죽은 동짓날이 아니면 맛보기 쉽지 않다. 하지만 팥수제비는 동짓날이 아니라도 언제든지 즐길 수 있는 겨울철 별미다.
첫사랑 그날처럼 은근하고 부드럽게 다가와 마음을 한꺼번에 사로잡는 팥수제비. 따금따끔 바늘로 찌르는 듯한 강추위가 휘몰아치는 동지섣달 기나긴 밤을 지새우다 보면 팥수제비가 더욱 눈에 밟힌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팥수제비는 시원하고 칼칼한 동치미 국물과 함께 먹는 것이 가장 맛이 좋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뜨거운 팥수제비를 만드는 팥은 차거운 음식에 속하고, 시원한 동치미를 만드는 무는 따뜻한 음식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팥수제비에 들어가는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 또한 따뜻한 음식이다. 뜨거움과 차거움… 차거움과 뜨거움… 그 맛깔스런 포옹. 아마 이만큼 음식궁합이 척척 들어맞는 음식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팥은 차거운 음식이지만 먹으면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성질이 있다. 따라서 몸이 차거나 차거운 것을 먹으면 배탈이 나는 사람들에게 팥은 보약이나 다름없다. 팥을 물에 불려 삶은 뒤 팥물을 내 자주 마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름철 팥빙수를 만들어 먹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다.
"팥 이기 잡귀와 잡병까지 쫓아내는 영물이라카이"생일밥, 찐빵, 팥빙수, 팥죽 등에 주로 쓰이는 팥은 소두(小豆) 혹은 적소두(赤小豆)라고도 부른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팥에는 녹말 등 탄수화물이 약 50% 들어 있으며, 그 밖에 단백질이 약 20% 들어 있다. 팥은 특히 다른 콩과는 달리 지방(2.2%)이 적고, 당질(58%)과 비타민B1(0.45mg)이 듬뿍 들어 있어 각기병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팥은 다이어트에도 그만이다. <동의보감>에 팥은 "평(平)해 차지도 따뜻하지도 않고 맛이 달면서 시고 독이 없는 작물이다. 사람을 마르게 하고 몸에 안 좋은 기능을 뺀다"라고 적혀 있다. 이와 함께 팥은 "농혈을 배출하고 소갈과 설사를 그치게 하며 소변을 잘 나오게 한다. 수종(몸이 붓는 병)과 창만(배가 나오는 병)을 다스린다"고 나와 있다.
"산모 젖 잘 나오게 하는 데는 팥 이기 최곤기라.""오데 그 뿐이가. 설사병 난 데 하고, 술병 난 데는 또 울매나(얼마나) 좋다꼬.""팥죽 좋아하는 산수골 새댁 반들반들한 피부 좀 봐라. 백옥이 따로 없다 아이가.""붉은 팥 이기 집에 들어오는 잡귀들만 쫓아내는 기 아이라 잡병들까지 다 쫓아내는 영물이라카이"1960년대 끝자락. 나그네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마을 어머니들은 산모가 젖이 부족할 때면 팥을 삶아 소금이나 벌꿀을 넣어 먹이곤 했다. 어머니께서는 고된 농사일을 술로 달래던 아버지께서 술병이 날 때마다 팥죽을 끓이곤 하셨다. 어머니께서 팥죽을 끓이는 방법은 시간이 좀 오래 걸릴 뿐 그리 어렵지는 않게 보였다
먼저 팥과 멥쌀을 물에 불린 뒤 팥은 가마솥에 포옥 삶아 주걱으로 으깼다. 그리고 으깬 팥에 불린 쌀을 넣고 물을 부어 포옥 끓여 소금 간만 맞추면 그만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끓인 팥죽을 드신 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삽을 어깨에 메고 논으로 나가곤 하셨다. 말 그대로 팥은 나그네가 어릴 때 우리 마을 사람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
"하루에 만 원어치 팔면 많이 판다"21일(일) 밤 8시. 동짓날을 맞아 팥죽 한 그릇 먹지 않고 그냥 보내기가 영 찜찜했다. 가족들을 창원에 두고 홀로 서울에 뚝 떨어져 살고 있는 것도 서러운 마당에 동짓날 팥죽 한 그릇도 먹지 못하고 보내야 하는 나그네 신세가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새알심까지 빚어 동지팥죽을 직접 끓이자니 시간도 오래 걸리고 번거로울 것만 같았다.
붉은 빛을 띠고 있는 팥이 잡귀를 쫓고 액운까지 막아준다는 데, 팥죽 대신 팥수제비라도 해 먹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재래시장인 동원시장(중랑구 면목동)으로 나갔다. 시장 곳곳에는 동지팥죽을 파는 할머니들과 그 동지팥죽을 사려는 아주머니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동지팥죽 한 그릇 2천5백 원. '그냥, 여기서 동지팥죽 한 그릇 사 먹고 말어' 하는 생각을 하다가 시장통에 붙어 있는 제법 큰 슈퍼마켓에 들렀다. 팥은 생각보다 비쌌다. 600g에 5천5백 원. 하지만 이 팥을 거두기 위해 땀 흘린 농민들 수고로움을 떠올리면 비싸다기보다는 오히려 싸다는 생각도 들었다.
밀가루와 흑설탕도 몇 개월 앞에 살 때보다 500원 남짓 오른 것 같았다. 기왕 시장에 나온 김에 이 것 저 것 몇 가지 더 사다보니 돈 만 원을 훌쩍 넘겼다. 그나마 집 가까운 곳에 값 싼 재래시장이라도 있으니 돈이 적게 들었다고 스스로 마음을 다독였지만 "하루에 만 원어치 팔면 많이 판다"는 노점상 할머니 말에 은근이 부아가 치밀었다.
모든 액운 한꺼번에 다 날려버리는 팥수제비 한 그릇 "동지 섣달 기나긴 밤 / 한 허리 베어내어 /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널었다가 / 어른 님 오신 밤 구뷔구뷔 펴리라". 조선시대 시인이자 이름난 기생이었던 황진이(?~?)가 쓴 '동지섣달 기나긴 밤'이란 시를 읊으며 팥을 따뜻한 물에 불려놓고, 밀가루에 달걀 하나, 식용유 서너 방울, 소금물을 부어가며 반죽을 하기 시작한다.
수제비는 반죽을 잘하고 30분 정도 숙성시켜야 쫄깃쫄깃 제 맛이 난다. 불린 팥을 삶을 때도 처음 끓는 물은 따라 버리고 다시 새물을 부어 삶는 것이 팥에 남아 있는 불순물을 깡그리 없애는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팥이 삶아지면 약한 불에서 팥이 으깨질 정도로 다시 한번 포옥 삶아야 한다.
이제 팥을 잘게 으깨고 물을 적당히 부어 팔팔 끓이다가 미리 준비해 둔 밀가루 반죽을 먹기 좋은 크기로 뜯어 넣고 소금과 설탕으로 간만 맞추면 끝. 부드럽고 은근하게 고소한 맛이 깊은 팥수제비는 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동치미국물과 함께 먹어야 제 맛이 난다. 동치미가 없다면 묵은지와 함께 먹어도 맛이 깊다.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 5평 남짓한 방 안에 홀로 앉아 누가 훔쳐 먹을 사람도 없는데, 후루룩 쩝쩝 후루룩 쩝쩝 팥수제비를 정신없이 먹는다. 나그네가 직접 만들어서일까. 아까 시장통에서 한 수저 맛 본 동지팥죽보다 맛이 훨씬 더 깊다. 붉으죽죽한 팥수제비 국물도 몹시 부드럽고 고소하다. 팥 국물과 함께 떠먹는 수제비 맛은 쫄깃쫄깃 달착지근하게 술술 잘도 넘어간다.
후여~ 후여~ 물럿거라~ 고소영 귀신, 강부자 귀신 물럿거라! 옛 고향에 대한 그리움처럼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팥향 속에 감칠맛 나게 쫀득거리는 팥수제비 한 그릇. 동지섣달 기나긴 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팥수제비 한 그릇 새콤달콤한 동치미 국물과 함께 먹고 있으면 올 한 해 있었던 모든 액운이 강추위 속에 꽁꽁 얼어붙어 버리는 것만 같다.
귀신을 쫓는다는 붉으죽죽한 팥수제비 속에서 문득 요령소리를 철렁거리는 천녀(天女)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우리나라를 지키는 천녀가 따당~따당~ 따당따당~ 하며 치는 괭과리 소리에 서민경제 졸라매는 모든 액운이 무릎 꿇고 엎드려 싹싹 비는 것만 같다. 팥수제비 입에 문 천녀 목소리가 연말을 맞은 겨울 밤하늘로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것만 같다.
후여~ 후여~ 물럿거라! 가난한 서민 살리는 팥수제비 나가신다. 후여~ 후여~ 물럿거라~ 고소영 귀신, 강부자 귀신 물럿거라! 후여~ 후여~ 물럿거라! 신보릿고개 귀신, FTA 귀신, 명박산성 귀신 물럿거라! 후여~ 후여~ 물럿거라! 고물가 귀신, 고유가 귀신, 고환율 귀신, 양극화 귀신 모두 물럿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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