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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지렁이 카로, 쉐퍼 선생님의 ‘자연학교’

- 글 : 이마이즈미 미네코

- 옮긴이 : 최성현

- 펴낸곳 : 이후 (2002.1.3.)

 

 

 겉그림
겉그림 ⓒ 이후

 갓난아기 때문에 옆지기는 책방 나들이를 할 수 없습니다. 책방 나들이는 책만 사는 일이 아니라, 책방이 깃든 마을을 우리 두 다리로 걸어다니면서 찬찬히 느끼는 일입니다. 그러하기에 책방을 찾아다니며 좋은 책 하나 만나고 사고 쥐어들 때면, 책마다 담긴 고운 줄거리를 받아먹으면서도 즐겁고, 책 하나 품고 있는 책방 문화를 헤아리면서도 즐겁습니다. 그렇지만, 책방에는 아기한테 젖을 물리면서 쉴 만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고, 걱정없이 기저귀를 갈 만한 자리 또한 없습니다. 새책방이나 헌책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도서관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기를 데리고 와서도 느긋하게 책을 즐길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여 주는 책방이나 도서관을 바란다는 일은 우리 나라에서는 꿈같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민주와 문화를 말하려고 하는 이 나라에서 우리들이 누려야 할 일, 권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그러고 보면 동사무소라든지 관공서에서도 아기 기저귀를 갈아 주거나 젖을 물릴 만한 자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극장이나 공연장도 마찬가지이고, 제법 크게 꾸리는 밥집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가용 없이도 걱정없이 골목을 거닐고 어디를 다니고 할 권리를 마땅히 누려야 하듯(그렇지만 우리 삶을 돌아보면, 골목이고 어디고 빵빵거리며 치고 들어오는 자동차에 가슴이 벌떡벌떡 놀라면서 힘겹습니다. 거님길에는 버젓이 대 놓고 있는 차가 가득하고요), 동네와 마을에서도 느긋하게 책 나들이를 할 수 있게끔 도서관이 마련되고 책방이 곳곳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도서관 없이 경제성장만 외친다든지, 책방과 공연장과 전시장과 극장은 없이 술집 밥집 옷집 잠집 들만 넘친다든지 해서야, 이 나라가 참된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기껏 스무 해밖에 가지 않는 아파트를 짓는 일이 문화도시를 이룬다는 듯한 이름으로 내세워지는 재개발이 넘치는 모습도 크나큰 말썽거리이고, 크고작은 도서관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는 한편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찬찬히 되짚고 곱씹도록 쉴 수 있는 자리가 곳곳에 있지 않은 모습도 크나큰 말썽거리입니다.

 

.. “(지렁이) 카로가 먹을 수 없는 게 진짜 ‘좋지 않은 쓰레기’인 거야!” 어린이들은 쓰레기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카로가 싫어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  (29쪽)

 

 그런데, 지금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많은 분들은, 책이든 연극이든 전시이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눈길을 보내지 않습니다. 딴 나라 이야기라고, 배부른 소리라고, 한갓진 놀이라고 여깁니다. 먹고살기 어려운 판에 무슨 문화이고 예술이고 지랄이냐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먹고살기 힘드니 먹고사는 데에만 마음쏟자’고 하면서 살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만,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 ‘먹고살기 힘들다’는 말이 입에 배었습니다. 몸에 박혔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 둘레에 ‘굶어죽는’ 사람은 몹시 드물지만, 굶어죽을 만큼 괴롭지 않은 분들이 ‘먹고살기 힘들다’는 말을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보리밥’이나 ‘콩밥’이나 ‘잡곡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이란 없이, 모두들 ‘흰밥에 고기국’을 끼니마다 넘치게 먹고들 있는데에도 ‘먹고살기 힘들다’는 말이 끊이지 않습니다. 정작 먹고살기 힘든 사람은 북녘사람이고 중국조선족일 텐데, 경제가 세계 몇 위이고 자원소비가 세계 몇 위라고 하는 남녘나라에서 ‘먹고살기 힘들어’하는 소리는 앞으로도 죽 이어질 듯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캔에 든 콜라를 산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핀잔을 듣는다고 합니다. “엄마, 이건 카로가 싫어하는 거야. 사면 안 돼.” 그래서 부모들도 이전처럼 쓰고 버리는 용기나 팩에 든 것 대신, 몇 번이고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용기에 든 것이나 팩을 안 한 야채나 과일을 고르게 됐습니다. 물건을 사러 갈 때는 시장 바구니를 들고 나가 상점에서 주는 비닐봉투를 거절합니다 ..  (42쪽)

 

 이런 까닭에, 책을 읽고 책을 쓰고 책을 말하는 저 같은 사람을 바라보는 둘레 사람들은 궁금해 하기도 하고 나무라기도 합니다. ‘돈 되는 일을 해야 하지 않아?’ 하고 묻거나 ‘베스트셀러 같은 책을 써’ 하고 채근하거나 ‘이제 취미생활은 그만하고 직장생활을 하라’는 어른스러운(?) 도움말까지 건네어 줍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제가 출판사에 다닐 때에도 제 둘레 사람들은 ‘그렇게 일삯이 적은 데에서 일하면서 어떻게 살림을 꾸리느냐?’고들 물었습니다. 예나 이제나 책마을 사람들 일삯은 여느 회사 일삯과 견주어 절반쯤, 또는 그 아래가 됩니다(몇몇 잘나가는 출판사를 빼고). 책마을에는 정규직이 따로 있다고 하기 어렵고, 책마을 사람들은 어떤 노동조합 혜택도 받지 못하며, 노조 또한 없습니다. 책마을 사람들치고 어떤 사람이 밤일과 밤샘을 안 하겠습니까만, 책마을에는 ‘밤일삯(야간수당)’이 없습니다. 마감이 닥치면 으레 밤샘을 해서라도 책을 만들어야 하고, 일감을 집에까지 가져가서 해야 하는 일이 잦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외노동’은 한 푼도 일삯으로 값하지 못합니다. 이런 흐름을 바로잡아 줄 노조가 없으니 더 그러할는지 모르지만, 섣불리 따지면 밉보여서 목아지가 날아가기도 하니, 조용히 숨죽인 채 시키는 대로 일하곤 합니다.

 

 그러나, 책마을 사람 스스로 책을 좋아하기에 스스로 나서서 밤일도 하고 밤샘도 하고 집에까지 일감을 가져가서 하곤 합니다. 스스로 책이 좋으니, 딱 ‘먹고살’ 만큼만 일삯을 받아도 흐뭇하고, 책이 베풀어 주는 선물은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이기에, 예나 이제나 책이라는 보람 하나로 살아갑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흙과 하늘 앞에 고개숙이며 고마움을 느끼고 배우듯, 책마을 사람은 종이 한 장과 잉크로 새겨진 글자 앞에 고개숙이며 고마움을 느끼고 배웁니다.

 

 그래서 우리한테는 얼마나 많은 돈이 있어야 하고, 얼마나 많은 돈을 써야 하며, 얼마나 좋은 밥상을 차려야 하느냐를 곱씹어 보게 됩니다. 우리가 먹고살 만큼 되려면 살림을 어느 만한 크기로 꾸려야 하고, ‘먹고살기 어렵다’와 ‘먹고살 만하다’ 사이는 얼마나 벌어져 있는가를 되새겨 보게 됩니다.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못한 삶’은 어떻게 나뉘어 있는가 돌아보게 됩니다.

 

.. 쉐퍼 선생님은 받아쓰기 시험에는 밭 가장자리에 있는 생울타리 이야기라든가 베니에 울타리에 관한 것, 그리고 비탈진 산에 나무를 심으면 산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등, 평소에 어린이들이 하고 있는 일들의 중요성을 다룬 문장들을 냈습니다. 받아쓰기 시험은 매주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부모들도 매주 아이들에게 시험에 나올 문제를 몇 번이고 읽어 줘야 합니다. 그러는 사이 학부모들도 조금씩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이 하는 일과 식물이나 동물에 관해 많은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 결과, 아이들이 자연을 되살리기 위해 하고 있는 일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  (70쪽)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지렁이 카로》를 보다가 오래도록 생각에 잠깁니다. 이 책 《지렁이 카로》을 살며시 끄집어내어 펼치면서, 쓰다듬으면서 깊이깊이 생각에 잠깁니다. 《지렁이 카로》를 읽은 분들은 어김없이 ‘이렇게 좋은 책이 다 있었느냐’는 말을 합니다. 가슴 찡하다고, 훌륭하다고, 둘레 아는 이한테 선물해 주어야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다만, 아쉽다면, 《지렁이 카로》를 아는 분이 적고, 손수 이 책을 사서 읽은 분은 더욱 적어, 《지렁이 카로》는 2쇄를 찍기는 했어도 더 목숨을 잇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새책방 책시렁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아무리 줄거리가 좋고, 이 책을 읽은 이들 가슴에 뿌듯함과 넉넉함과 기쁨을 심었다고 하더라도 팔리지 못하는 책이 되면, 출판사로서도 끝까지 피만 보면서 만들어 팔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알아보아 주는 눈길 하나 기다리고, 알아채어 주는 손길 하나 바라지만, 참말로 ‘먹고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서, 출판사 사람들은 ‘밥굶기를 밥먹듯 하기도 하지’만, 끝끝내 버티고 버티다가 두 손을 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 어찌 되었든 이 책을 알게 된 사람이 있고, 읽어 준 사람이 있으며, 살가운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 준 사람이 있었어” 하는 보람을 가슴에 담아 놓고 주저앉습니다. 두 손을 모읍니다.

 

 책이란, 새책으로도 책이고 헌책으로도 책입니다. 도서관 빌려 읽는 책으로도 책입니다. 가슴으로 읽고 새겨지는 책이기에, 껍데기가 깨끗하든 손때가 탔든 똑같이 책입니다. 땀흘려 번 돈을 들여 새책으로 사 주면 출판사와 작가와 책마을 일꾼 모두한테 갚음도 되는 일이지만, 헌책으로 사 주는 일 또한 책마을 일꾼 모두한테 기쁨이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일찌감치 알아보고 사들여서 읽은 이들이 헌책방에 내놓아 주어야 다시 찾아서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었지만, 이렇게 한 해 두 해 세 해 네 해 …… 조용히 잠들어 지내다가 어느 날 퍼득 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비록 새책방에서는 판이 끊어졌어도 헌책방에서 다리품을 팔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는 책이기에, 먼 뒷날 헌책방 나들이를 하던 책마을 일꾼 하나가 헌책방 책시렁에서 이 책을 끄집어 내면서 “어라, 이렇게 훌륭한 책이 어떻게 죽어 버렸담. 내가 이 책을 되살려내 볼까?” 하는 꿈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꽤 많은 책들이 이런 흐름을 거쳐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흔히 ‘재출간’이라는 말을 씁니다만, 물건으로만 본다면 ‘재출간’이 맞지만, 물건이 아닌 책으로 본다면, 그리고 우리 마음을 살찌우고 북돋우는 살가운 이야기이자 목소리로 여긴다면 ‘되살아남’이라고 말해야 어울리지 않으랴 싶습니다.

 

 아무쪼록, 《지렁이 카로》도 앞으로 언제가 되든 되살아나서 우리한테 더 널리 기쁨을 선사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할 수 있겠지, 하고 꿈을 꾸어 봅니다. 조용히 꿈을 꿉니다. 잠든 갓난쟁이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면서 꿈을 꿉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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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카로 - 쉐퍼 선생님의 자연 학교

이마이즈미 미네코 지음, 강라현 옮김, 김우선 그림, 사계절(2011)


#절판#환경책#헌책방#책읽기#생태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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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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