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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시즌의 미국 쇼핑몰.
크리스마스 시즌의 미국 쇼핑몰. ⓒ 강인규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엘리자베스'라는 여학생이 있었다. 세인트 출신의 엘리자베스는 "졸업 후 정치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정치학도다운 생각이었다. 실제로 한 여름방학에는 경험 삼아 유력 정치인의 비서 노릇도 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의 야무진 성격을 아는 주위 사람들은 그녀가 흔들림없이 자신의 꿈을 향해 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던 엘리자베스가 언젠가부터 열심히 스페인어 공부를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전과 다른 계획을 말해 주었다. 졸업 후 남을 돕는 일을 하고 싶으며, 특히 칠레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우연히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마음이 움직인 것 같았다.

다른 때 같으면 정계의 인턴 기회가 되었을 방학은 이제 빈민을 위한 집짓기나 교육봉사로 채워졌다. 학기가 시작하면 엘리자베스는 어김없이 그을린 얼굴로 나타났다. 피부가 짙어질수록 웃음은 더 환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졸업후 그녀는 칠레로 떠났다.

성탄절을 앞 두고 엘리자베스가 떠오른 것은 그녀와 나누었던 이야기 때문이다. 성탄을 며칠 앞두고 만난 우리는 크리스마스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두서 없이 흐르던 이야기는 '미국문화가 크리스마스에 미친 영향'에 도달했고, 나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말해 주었다.

한국인의 (미국인도 모르는) 미국산 추억

 팻분의 캐롤음반 <화이트 크리스마스>
팻분의 캐롤음반 <화이트 크리스마스> ⓒ Paramount
내 어린시절 성탄절의 기억은 낡은 레코드판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바랜 빛의 레코드 자켓 위에는 '팻 분(Pat Boone)'과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당시 영어는 물론, 한글도 제대로 모르는 어린이 눈에는 대략 이렇게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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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을 얹고 전축 바늘을 들어올리면 검은색 플라스틱판이 돌기 시작했다. 곧 바늘은 '투둑' 소리와 함께 가장자리로 떨어지고, 치직거리는 먼지 소리와 더불어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크리스마스 귀향(I'll be home for Christmas)"을 영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닌 나만의 '개사곡'으로 따라부르곤 했다.

매년 이 때가 되면 그 노래들은 '마이마이' 속의 테이프에서, 휴대용 시디 플레이어를 거쳐 아이팟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엘리자베스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팻 분이 누구예요?" 지구 반대편 동아시아에서 온 사내의 추억이 된 미국가수를 눈 앞의 미국인은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문화차이보다 세대차이가 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의 '미국산 추억'이 호기심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엘리자베스는 한국인들이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보내는지 알고 싶어했다.

미국은 '들어가는 날', 한국은 '나가는 날'

한국과 미국의 성탄절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미국이 '집에 들어가는 날'인 반면, 한국은 '집에서 나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가장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크리스마스 경험으로 '방바닥 긁기'를 꼽는다. 반면에 대다수 미국인들에게 가장 슬픈 성탄절은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특별히 더 가정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평상시 가족과 (지겨울 만큼) 더불어 사는 한국인들이 '이날 하루만은...' 하며 밖으로 나간다면, 평상시 독립적으로 살아 온 미국인들은 '이날 하루만은...' 하는 생각으로 집에 들어가는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한국의 설날과 비슷하다.

미국인들의 '가정적인 크리스마스'가 항상 평화롭고 따뜻한 것은 아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미국인들이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시기 가운데 하나다. 스트레스 원인 가운데 으뜸은 '선물'이다. 가족, 친척, 친구들을 위해 선물을 마련하기가 수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돈도 돈이지만, 매년 같은 사람에게 다른 선물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성탄이 다가오면 방송, 신문, 잡지는 자상하게 '크리스마스 스트레스(Christmas stresses) 피하는 법'을 가르쳐 주곤 한다. 정신과 의사나 상담가들이 나서서 '초과지출을 피하라'든가 '가족과의 말다툼 예방을 위해 민감한 주제를 피하라'는 등의 조언을 하지만, 이들도 그 와중에 열심히 선물을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미국의 크리스마스 준비는 트리용 나무를 준비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사진은 뉴욕시 거리의 전나무 행상.
미국의 크리스마스 준비는 트리용 나무를 준비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사진은 뉴욕시 거리의 전나무 행상. ⓒ 강인규

 전구 장식을 한 뉴욕 시가지의 크리스마스 트리. 지금은 기독교의 축제가 되었지만, 크리스마스는 오랫동안 기독교인들에 의해 '이교도의 야만적 풍습'으로 배척받았다.
전구 장식을 한 뉴욕 시가지의 크리스마스 트리. 지금은 기독교의 축제가 되었지만, 크리스마스는 오랫동안 기독교인들에 의해 '이교도의 야만적 풍습'으로 배척받았다. ⓒ 강인규


크리스마스는 본래 '저주'와 '금지'의 날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날의 기원을 아는 사람 또한 많지 않다. 성탄절은 흔히 '그리스도 날의 미사'라는 뜻의 '크리스마스(Christmas)'라 불리지만, 이 이름은 아주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본래는 '율(Yule)'이라는 이름의 겨울축제로, 기독교인이 '이교도(pagan)'라 부르던 북유럽의 게르만인의 풍습이었다.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크리스마스의 '세속화'를 걱정한다. 하지만 역사상 크리스마스가 오늘날만큼 강한 종교적 의미를 띤 적도 없다. 과거 이 날은 성스럽고 기쁘기는커녕, 기독교인들을 분노케 하던 '야만의 날'이었다. 

17세기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가 금지되었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청교도혁명으로 왕당파를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한 이후 일어난 일이다.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이보다 더 엄격한 신앙을 추구하던 기독교도였다. 이들이 크리스마스를 그대로 둘 리 만무했다. 미국 청교도는 크리스마스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캐롤을 부르거나 선물을 교환하는 것조차 금기시했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런 부정적 태도는 19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바뀌기 시작한다. 종교적 이유를 떠나서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시기는 가난한 이들에게 고통스러운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추위와 배고픔에 고통받던 이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았다.

뉴욕시는 1826년에 경찰조직을 창설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일어났던 크리스마스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크리스마스에 '자비', '화합', '가족'이라는 의미가 부여된 것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크리스마스의 재창조'에 큰 기여를 한 사람으로 미국의 작가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어빙은 34개의 단편을 엮어 <스케치 북>이라는 책을 펴내는데, 이 가운데 5개를 크리스마스의 '의미'와 '정신'을 역설하는 데 할애한다. 이 책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저택에 가난한 이들을 초대해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 계급의 갈등을 봉합하는 치유책으로 '크리스마스 정신'을 제안한 것이다.   
 
 '산타 클로스'는 남을 은밀히 돕던 성 니콜라스에 착안한 가상의 존재로 알려져 있다. 성니콜라스는 가난한 사람의 신발 속에 동전을 넣어두곤 했다고 한다. 왼쪽 그림은 15세기 파브리아노의 벽화로, 성 니콜라스가 남을 돕기 위해 집 안에 숨어 들어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결혼 지참금이 없어 고민하는 가난한 세 처녀를 위해 금화를 남기는데, 말리기 위해 벽에 걸어 둔 양말 속에 동전을 넣어 주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크리스마스 양말(Christmas stocking)'의 모태가 된다.
'산타 클로스'는 남을 은밀히 돕던 성 니콜라스에 착안한 가상의 존재로 알려져 있다. 성니콜라스는 가난한 사람의 신발 속에 동전을 넣어두곤 했다고 한다. 왼쪽 그림은 15세기 파브리아노의 벽화로, 성 니콜라스가 남을 돕기 위해 집 안에 숨어 들어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결혼 지참금이 없어 고민하는 가난한 세 처녀를 위해 금화를 남기는데, 말리기 위해 벽에 걸어 둔 양말 속에 동전을 넣어 주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크리스마스 양말(Christmas stocking)'의 모태가 된다. ⓒ 공개자료

눈덮인 말구유, 전나무 숲의 동방박사?

크리스마스 장식이나 카드 가운데 이런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아기 예수가 말구유에 누워있고, 마리아와 요셉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다. 허름한 마굿간 지붕 위에는 눈이 덮여 있다. 낙타 등을 타고 예수께 경배하러 가는 동방박사들. 하늘의 밝은 별이 그들을 인도한다. 환하게 빛나는 별 아래로 (크리스마스 트리용으로 좋아 보이는) 전나무 숲이 펼쳐진다.(가끔은 설원 위로 낙타가 남긴 발자국이 보이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살바도르 달리 그림 이상으로 초자연적인 장면이다. 예수가 태어난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은 지중해성 기후다.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비교적 서늘하지만 밤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지역은 겨울철이 우기이고, 연평균 강수량의 70퍼센트 이상이 11월과 1월 사이에 집중된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 배경에 더 충실하려면, 침엽수인 전나무보다는 올리브나무가, 눈보다는 비가 더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이 어쨌든간에, 북구의 겨울축제 전통은 예수탄생을 기리는 날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지역을 막론하고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기 위해 유리창을 눈으로 장식하고, 전나무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며, 털옷 입은 산타 클로스를 고용하기에 이르렀다. 

산타 클로스의 모델이 된 사람이 성 니콜라스(Saint Nicholas)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신발이나 양말 속에 몰래 돈을 넣어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산타의 통통한 몸매나 붉은 색 털옷의 유래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흰 수염에 빨간 색 옷을 입은 산타가 코카콜라 광고에서 나왔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코카콜라가 미국적 산타의 이미지를 전 세계로 알리는 데 적극적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거대한 체구의 붉은 산타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었다.

우리가 아는 산타의 모습은 누구 한 명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여러 세대와 여러 문화권에 걸쳐 전해진 산타의 모습은 여러 작가들의 손에 의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다. 특히 독일계 미국인 만화가인 토마스 나스트(Thomas Nast)의 역할이 컸다. 우연인지 모르나, 19세기 중반 나스트는 잡지 삽화에서 산타를 자신과 닮은 통통한 모습으로 소개한다.

 왼쪽은 미국 삽화가인 토마스 나스트이며, 오른 쪽은 그가 1881년에 그린 산타의 모습.
왼쪽은 미국 삽화가인 토마스 나스트이며, 오른 쪽은 그가 1881년에 그린 산타의 모습. ⓒ 공개자료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해피 할리데이스' 말하는 미국인들

크리스마스의 종교적 의미가 강화된 데에는 기독교인들의 노력도 크게 작용했다. 겨울축제의 세속적 상징을 거부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이지만, 이 날이 예수가 탄생한 정확한 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때를 성탄절로 선포한 데에는 겨울축제 '율'에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동기도 포함되어 있다.  

교회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서고 성가대가 캐롤을 부르는 가운데 '율'은 '성탄절'이 되었다. 크리마스의 종교적 의미를 강화시킨 것이 '금지'가 아닌 '수용'이라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사실 이런 식의 '전용'은 모든 문화와 종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부활절 달걀'처럼 말이다. 봄축제에서 '다산'을 기원하던 이교도의 상징은 기독교를 거쳐 '죽음을 이긴 예수'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났다.         

크리스마스가 기독교의 축제로 재탄생하는 가운데 반작용도 나타났다.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해피 할리데이스(Happy Holidays)'라는 비교적 '덜 종교적' 인사가 미국사회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상대가 기독교인인지 확신할 수 없다면, 미국에서 연말인사는 반드시 '해피 할리데이스'라고 해야 한다.(복수형을 쓰는 것은 크리스마스뿐 아니라 유대교의 '하누카' 등 다른 명절도 동시에 일컫기 위해서다.)  

얼마 전 엘리자베스가 다니던 교회의 사람을 통해 그녀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올해의 성탄도 그곳에서 보내게 됐다는 것이다. 비록 가족과 함께 보낼 수는 없게 됐지만, 그녀가 올 해 맞을 성탄은 그 누구의 것보다 예수탄생의 의미에 가까울 것이라 믿는다. 마굿간처럼 낮은 곳에 태어나,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돌아가신 분을 기리는 날이라면 말이다.  

전나무를 덮은 눈이 없어도 좋겠다. 북미대륙보다 칠레의 지중해성 기후가 베들레헴에 더 가까울테니 말이다.

 정교분리 원칙과 종교 선택의 자유권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연방정부와 대다수의 주는 공공장소에 특정 종교의 상징물을 편향되게 설치하지 않는다. 앞의 사진은 연방정부 건물에 나란히 설치된 크리스마스 트리와 유대교 하누카의 상징물인 '하누키아' 촛대. 뒤의 사진은 뉴욕 공공도서관 정문 앞의 트리와 촛대. 유대인들은 8일간 진행되는 '빛의 축제' 하누카 기간에 하루에 하나씩 촛불을 늘려간다.
정교분리 원칙과 종교 선택의 자유권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연방정부와 대다수의 주는 공공장소에 특정 종교의 상징물을 편향되게 설치하지 않는다. 앞의 사진은 연방정부 건물에 나란히 설치된 크리스마스 트리와 유대교 하누카의 상징물인 '하누키아' 촛대. 뒤의 사진은 뉴욕 공공도서관 정문 앞의 트리와 촛대. 유대인들은 8일간 진행되는 '빛의 축제' 하누카 기간에 하루에 하나씩 촛불을 늘려간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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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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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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