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운 돈 들여서 지어놓고 저걸 왜 허문대?"
"여길 개발하려고 그런다잖아."
"넋 빠진 X들이 세금 걷어 돈지랄 한당께!"
"저런 돈 있으면 차라리 없는 사람들이나 도와주지..."
지난 24일 오후 수원 장안문 근처 SBS 대하사극 <왕과 나> 세트장 남쪽 안전펜스 앞. 세트장 앞을 지나던 여러 명의 남녀 노인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앙상한 뼈대만 남은 세트장 안을 기웃거리며 한마디씩 내뱉었다.
인근 연무동에 산다는 이들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지어 놓은 드라마 세트장이 철거되는 게 못마땅한 듯 연신 혀를 찼다. 한 노인은 "저렇게 금방 허물 거면 애초부터 짓지를 말았어야지, 아까운 세금만 축낸 것 아니냐"며 불만을 터트렸다.
실제 안전펜스 안쪽으로 보이는 세트장은 이미 흉물스런 몰골로 변해 있었다. 도심 속에 재현된 고풍스런 '조선시대 궁궐' 모습은 거의 뜯겨나가고, 대부분 건물 골격만 남은 상태였다. 거기에다 세찬 바람에 눈까지 흩날려 철거 현장 분위기는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작년 10월 경제적 효과 등 노려 6400평 규모 세트장 건립
경기도와 수원시, 경기관광공사가 지난해 10월 21억원을 들여 수원시 영화동 문화관광지구 내에 건립한 <왕과 나> 세트장이 1년여 만에 헐리고 있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곧 철거할 가건물에 거액을 투입한 것은 혈세낭비의 전형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왕과 나>는 조선 5대 문종~10대 연산군 시절까지 환관으로 자헌대부에 오른 김처선의 운명적인 사랑을 그린 드라마(SBS, 2007년 8월 27일~2008년 4월 1일).
경기도와 수원시, 경기관광공사는 이 드라마의 첫 방송을 앞둔 지난해 8월 22일 세트장 건립계획을 발표했다. 드라마의 인기를 염두에 두고 관광객 유치 등을 통한 경제적 효과와 수원 화성의 브랜드 가치 제고란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결정이었다.
이에 따라 개발을 앞두고 있던 영화동 문화관광지구 내 2만1266m²(6430평) 부지에 세트장을 지어 지난해 10월 17일 개장했다. 세트장은 7202m²(2178평) 규모의 오픈세트장과 1만4063m²(4254평) 규모의 테마정원 및 주차시설로 구성됐다.
오픈세트장은 궁궐에서 임금이 거처하는 안전, 후궁의 처소, 처선의 사가, 내자원 등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여기에 투입된 예산은 모두 21억원. 경기도가 7억원, 수원시 5억원, 경기관광공사가 9억원을 각각 부담했다.
그러나 <왕과 나> 세트장 건립과 운영을 주도해온 경기관광공사는 세트장을 개장한 지 1년이 채 안 된 지난 7월 30일 세트장을 폐쇄한 데 이어 최근 철거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1년도 안 돼 폐쇄 후 철거 진행... 시민들 "전형적인 혈세 낭비"
이와 관련해 경기관광공사 관계자는 "세트장이 들어선 곳은 문화관광지구로, 내년 초부터 본격적인 개발 사업이 진행될 예정이어서 더 이상 운영이 불가능해 철거하는 것"이라며 "처음부터 1년간 한시적으로 운영할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경기관광공사와 수원시는 내년 1월말까지 세트장 철거와 부지 정리 작업을 완료한 뒤 사업자 선정 절차 등을 거쳐 문화관광지구 개발에 착수할 계획이다.
하지만 시민들 사이에서는 처음부터 특정 드라마의 인기에 편승해 불과 1년 동안 운영할 세트장 건립에 21억원이란 거액의 예산을 투입한 것은 무리한 결정인데다, 전형적인 혈세낭비 사례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영화동 주민 이아무개(49)씨는 "작년 10월 문화지구에 드라마 세트장이 들어선 것이 개발계획에 따른 것으로 알았는데, 최근 세트장을 철거하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면서 "금방 헐릴 시설에 20억이 넘는 돈을 쏟아붓다니, 이게 제정신 갖고 할 짓이냐"고 비난했다.
그렇다면 세트장 운영의 성과는 어떠했을까. 세트장 건립 당시 수원시와 경기관광공사는 800억원 규모의 경제적 효과와 연간 120만명 이상의 관람객이 방문할 것으로 예상하는 등 그야말로 장밋빛 기대감에 부풀었다.
지역 경제 효과 800억원, 연간 120만명 이상 방문한다더니...
세트장 건립과 운영을 주도한 경기관광공사가 지난해 김용서 수원시장과 임병수 사장의 말을 인용해 발표한 보도자료 내용을 보면 양측의 기대감을 잘 보여준다.
김용서 수원시장은 "영화문화관광지구 사업 준비 기간 동안 오픈세트장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경영 측면에서도 혁신적"이라며 "계획대로 실행된다면 지역경제에 미치는 경제적 직·간접 효과는 8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또한 "접근성이 좋은 시내 중심에 위치한데다 야간개장을 겸해 연 120만명 이상이 방문할 것으로 기대된다"며 "역사적 무대로 화성을 활용해 화성과 수원시의 브랜드 인지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 2007년 8월 22일)
임병수 경기관광공사 사장은 "드라마 '왕과 나'가 사극 중 최고 시청률인 24%에 이르러 경기도와 수원 화성 홍보효과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며 "한류와 결합한 관광객 상품개발 등을 통해 외래 관광객을 적극 유치하겠다"고 말했다. (2007년 10월 17일)
경기관광공사는 <왕과 나> 드라마가 방영 초기 20%대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자 한껏 고무돼 지난해 9월 <시청률 호조에 '왕과 나' 정원도 뜨네!>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내고 "세트장 조성공사를 독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미디어리서치 기관의 시청률 조사결과를 인용하면서 "투자비용 회수도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세트장 개장식 날엔 임 사장이 "한류와 결합한 관광객 상품개발 등을 통해 외래 관광객을 적극 유치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장밋빛 기대감 물거품... 1년간 세트장 관람 수입 1000만원?
그러나 경기관광공사가 지난 1년 동안 <왕과 나> 세트장 운영을 통해 얻은 성과는 참담한 수준으로 드러났다. 물론 어느 정도 홍보효과를 거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투자액 회수에 필수적인 흥행에 실패함으로써 당초 장밋빛 기대감은 물거품이 된 셈이다.
1년간 <왕과 나> 세트장 관람객 수와 관람 수입을 묻자, 경기관광공사 한류마케팅팀 관계자는 관람객 수를 제대로 밝히지도 못한 채 "관람 수입은 연 1000만원 정도였다"면서 "이 수입은 현장의 일용직 근로자 인건비로 사용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구체적인 세트장 운영 성과 자료를 요청하자 이 관계자는 곤란하다고 밝힌 뒤 "당초 운영수익을 내기 위해 투자한 게 아니라 시와 공사에서 추진 중인 영화지구 사업부지 내에 인·허가 등 행정절차로 생기는 여유 기간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을 돌렸다.
이 관계자가 밝힌 관람 수입을 근거로 대략 전체 관람객 수를 추산해 보면 성인 입장료 2000원을 기준으로 할 때 5000명, 학생 입장료 1000원을 기준으로 해도 1만명 정도다. 이는 당초 예상했던 관람객수 120만명의 약 1% 수준이다.
이처럼 세트장 운영에 실패한 것은 관람객 유치 전략을 철저히 세우지 못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화성과 연계한 관광코스 운영 등 관광객을 유인할 수 있는 관광 상품 개발을 통한 수익창출에 적극 나서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여기에다 몇 차례 안 되는 세트장 촬영과 시청률 저하 등으로 관광객들의 흥미를 반감시킨 것도 실패의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왕과 나'는 방영 초기 25% 이상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지난해 10월 중순부터 수원 화성을 축조한 정조대왕을 다룬 MBC <이산>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고전을 거듭했다. 일부에서는 차라리 SBS <왕과 나>보다 수원 화성과 깊은 연관이 있는 MBC <이산>의 세트장을 지어 관광 상품화했어야 옳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처럼 <왕과 나> 세트장은 일부 지방자치단체들의 드라마 세트장 건립 붐에 편승한 이른바 '묻지 마 투자'의 산물이란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운영 실패 책임 추궁 뒤따라야"... 수원시-경기도, 책임 회피
시민단체의 한 관계자는 "많은 지방자치단체들이 드라마 세트장 건립에 나섰다가 줄줄이 실패하고 있는 상황에서 철저한 손익분석 없이 <왕과 나> 세트장을 건립한 것은 전형적인 예산낭비 사례다"면서 "운영 실패에 대한 책임 추궁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수원시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세트장 운영이 잘 안 됐다"고 흥행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드라마 자막 광고효과가 100억원 정도는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구체적인 분석 자료를 요구하자 태도를 바꿔 "수원시는 5억원의 예산만 부담했을 뿐, 세트장 운영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른다"면서 "세트장 운영 주체 측인 경기관광공사에 문의해 달라"고 답변했다.
경기도 역시 책임을 회피했다. 경기도 관광문화산업과 관계자는 "경기도가 도비 7억원을 부담한 것은 산하 기관에 출연금으로 지원한 것"이라며 "회수를 목적으로 지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기도는 세트장 운영에 대한 흥행 성패와는 관계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문제는 세트장의 사후 활용방안 논란이다. 수원시는 지난해 10월 지방재정투자심의위원회 투융자 심사에서 <왕과 나> 세트장 투자와 관련해 '사후 활용방안 마련'을 조건으로 승인을 받았다. 수원시의회 역시 이를 조건으로 예산을 승인했다.
요컨대 예산이 낭비되지 않도록 세트장 이전 등 재활용 방안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기관광공사는 현재 세트장의 사후 활용 방안도 전혀 없이 철거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철거가 끝나면 세트장은 완전히 공중분해돼 없어지는 것이다.
경기관광공사 관계자는 "당초 이전을 검토했지만 이전할 곳도 마땅치 않은데다, 이전에 따른 추가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철거하고 끝내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면서 "세트장을 없애는 게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수원시는 경기관광공사의 이런 방침에 대해 한마디 문제제기도 못한 채 끌려가고 있는 상황이다. 수원시 관계자는 "세트장 이전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이 나 지방재정투자심의위원회 위원들과 시의회를 상대로 양해를 구했다"고 말했다.
이는 수원시가 사후 활용방안 마련을 전제로 예산 승인을 받고도 예산집행 후에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따라서 수원시는 전시용 사업에 시민의 혈세를 낭비한 것은 물론 지방재정투자심의위원회와 수원시의회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린 셈이 됐다.
[최근 주요기사] ☞ 김형오 의장, 7번째 경호권 발동자 되나 ☞ 술 권하는 사회, 뼈다귀 해장국 예찬 ☞ 대운하 찬성 단체, 4대강 정비 착공식엔 왜 왔나 ☞ [엄지뉴스] 뒤따라오던 지하철이 '꽝'... 실제상황이었으면? ☞ [엄지뉴스] 나도 가끔 남자기자이고 싶을 때가 있다 ☞ [E노트] 전여옥 "김형오, 가장 먼저 죽어야 할 리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