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백색(百人百色)’이라는 짧은 말로 우리네 선조들은 사람들이 가지는 다양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백 명의 사람이 백 가지의 색을 가진다는 표현은 본디 다양성이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가진 차이와 같이 자연스럽고 그래서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유감스럽게도 다양함을 받아들이는 관용을 배우지 못한 것 같았다. 이제 ‘한’민족이라는 말에서 크다는 뜻의 ‘한[大]’이나 우리 민족의 이름인 ‘한(韓)’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대부분 ‘인문계 고등학교-대학교-사무직 회사원’의 성장과정을 거치게 마련이고, 만약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성장해 온 이가 있다면 그는 조금의 소외감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2008년은 어느 때보다도 획일적인 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 말 그대로 올 한해는 온 국민이 하나로 똘똘 뭉친 한 해였다. 대한민국 제 17대 대통령인 이명박 대통령은 경제 회복의 국민적 염원 속에 48.7%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되었고, 이 대통령의 취임 100일도 되기 전에 온 국민은 한 마음으로 촛불을 들고 새 정부의 미국산 소고기 수입 전면 개방에 반대하고 나섰다. 불타버린 대한민국 국보 1호 숭례문 앞에서는 모든 국민이 안타까움과 슬픔에 빠졌다. 올 한해 유명을 달리한 많은 연예인들은 2008년을 우울하게 만드는 동시에 나라 전체를 초상집 인냥 암울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2008 베이징 올림픽은 우리 선수들의 선전과 함께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었고 올해 여러 가지 일로 우울해진 마음을 달래 주었다.
무엇이든 한 목소리를 냈던 2008년.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것은 ‘다양성’이다. 다른 해와는 달리 여론이 합의적이었기 때문에 대세와는 다른 의견을 주장한 이들이 더 주목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촛불시위에 대한 반대의견은 가장 인상적이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 개방에 반대한 국민적 촛불시위는 그 규모로 보나 정권에 대한 감정으로 보나 필시 1980년대 민주항쟁과 비견할 만한 사건이었다. 거리는 연일 촛불로 넘쳐났고, 뉴스의 절반은 촛불시위와 관련된 소식으로 채워져 있었다. 경찰의 강경진압은 촛불 시위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어 그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고 급기야 6월 10일 100만인 촛불행진이 벌어지기에 이르렀다.(경찰추산 8만명, 주최측 추산 70만명) 인터넷에 촛불시위를 지지하는 네티즌, TV에서 정부를 풍자하고 반대의견을 내세우는 연예인들과 저명인사들까지.2008년 6월 대한민국은 촛불의 세상이었다.
그런데 촛불의 세상 안에서 타오르는 또 하나의 작은 촛불이 있었다. 그것은 촛불집회 시위에 반대하는 작은 촛불이었다. 대학생 이세진씨는 촛불집회 시위에 반대해 1인 시위를 벌였다. 이세진씨는 시민들이 촛불집회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들이 광우병에 대한 오해를 풀고, 특히나 정치세력에 의해 휘둘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씨의 1인 시위 소식이 전해지자 인터넷에는 이씨를 응원하는 모임이 생겨나기까지 했다. 비록 촛불의 힘은 촛불시위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피력한 연예인 정선희씨를 맡고 있던 여러 프로그램에서 하차시킬 만큼 강력한 것이었지만, 정치인들의 앞뒤 맞지 않는 변명이나 맹목적인 옹호가 아닌 이성적인 소수의견은 촛불시위를 더욱 의미있게 했다.
건군 60주년 국군의 날 벌어진 강의석씨의 알몸시위는 또 하나의 소수의견 표현이었다. 2008년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를 맞아 치러지고 있던 퍼레이드 행사에서 알몸으로 뛰어들어 군대폐지를 주장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강의석씨는 과자로 만든 총을 탱크를 향해 쏘다가 먹는 퍼포먼스를 통해 군대제도의 폐지를 주장했다. 그의 위와 같은 행동은 아직 군대제도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하나의 해프닝으로 비춰졌다. 사람들은 그를 단순히 미친 사람 취급했고, ‘군대를 없애자’는 주장은 황당한 구호로 그치고 말았다.
그의 행동에 대한 반응이 일회성 해프닝에 대한 반응과 다르지 않은 것은 군대제도에 대해 국민들이 갖고 있는 생각과 관련이 깊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부분 의무병 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우리나라가 처한 특수한 상황 때문에 의무병 제도가 태어나긴 했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여러 환경이 변화했음에도 사람들은 현재의 군 제도에 대해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군에 대한 언급이 남북관계와 동일시되어 잘못하면 사상이 불그죽죽한 사람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군대에 관한 문제는 특히나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예민한 문제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서 소수의견이 더욱 절실한 분야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새로운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분명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기 해 꼭 필요한 일이다. 특히나 오랫동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대세와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 어려운 군제도와 같은 것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에는 공공의 적이 존재한다. 본연의 위치를 망각하고 절대 권력을 휘두루려 하는 그에 대해 국민들은 뜨거운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이런 말이 생각난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굳이 민주주의의 자세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모두 한 목소리만 내는 곳에서는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다양한 의견은 우리를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고 또 아집에 사로잡히지 않게 한다. 이런 당연한 진리를 무시하고 자신의 뜻만 관철시키려 하는 그는 분명 우리의 공공의 적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숨은 공공의 적도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대한민국이다. 볼테르는 말했다. “나와 당신의 생각은 다르다. 하지만 누군가 당신의 생각을 억압한다면 나는 당신을 위해 싸울 것이다.”우리의 2008년은 어땠는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가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한 해였을까? 안타깝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공공의 적으로 삼아온 그처럼 우리도 우리와 다른 이를 배척했고 그들의 입을 막았다. 물론 사안에 따라 여론이 한 목소리를 외칠 때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묻히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이야기 할 권리를 가진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인 동시에 더욱 발전적이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기본이다. 그런 면에서 2008년 우리의 성적표는 그리 좋지 못하다.
하지만, 나는 가능성을 보았다. 비록 한 두 사람의 의견이지만 그들이 낸 대세에 반하는 의견들에서. 1980년대 민주항쟁과 비교되는 촛불시위. 촛불시위의 현대성은 비폭력성이 아니라 반대의견이 공존했다는 다양성에 있다. 강의석씨의 누드 퍼포먼스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누드’나 기이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그가 오래도록 견고한 성과 같았던 군에 대해 주장을 펼쳤다는 것이다. 촛불이 나라 전체를 집어 삼킬듯 한 분위기에서성역과도 같은 군대라는 문제에 대해 ‘다른 의견’이 존재했다는 것은 큰 가능성이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더욱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적이고 유연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백인백색(百人百色).’ 서로 다른 생김새처럼 믿음과 생각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관용의 사회에 대한 가능성이다.
개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관점에서도 앞으로 ‘다양성’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이제 사회는 ‘다양성’ 그 자체를 경제적인 성장 동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하나라는 믿음이 주는 소속감, 일치감은 대한민국 1막의 주제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제 2막을 올려야 할 때이다. 새로운 막의 주제는 서로가 다르다고 인정하는 여유와 그 다름을 자랑스러워하는 자부심이다. 2008년 어느 때보다도 다사다난했던 해. 그 많은 사건들에 비해 주목받지 못한 작은 목소리들이지만 나는 올 한해 그들의 목소리에서 대한민국의 제 2막을 이끌어 갈 가능성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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