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팀은 중국과의 교역 관문일 것 같은 한강하구의 계양산성을 지난 2003년 8월부터 발굴하게 되었다. 2001년 인천시가 계양산 일대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한 것을 토대로 한 계양산성 발굴조사가 본격 시작된 것이다.
인천시와 계양구청은 제4차에 걸쳐 연차별로 발굴조사를 시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계양산성을 2007년도에 국가사적으로 지정하고 2008년부터 원형대로 복원할 계획이었다.
2003년 8월 1일부터 10월 27일까지의 1차 발굴조사 결과, 성의 높이가 7m정도로 추정되고 두께가 4m로 확인되었고, 성의 외벽은 잘 다듬은 돌로 기울기가 거의 수직에 가깝게 쌓았으며 내탁은 할석으로 견고하게 쌓고 외벽으로 기저부에는 보축한 시설이 남아 있었다 한다. 출토된 유물도 다양하고 많은 양이 출토되었다.
이후 2005년 5월 성내부 건물추정지 발굴시 집수정(골짜기) 맨 밑바닥에서 목간(木簡), 목제, 원저단경호 등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묵서 목간은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왜냐하면 목간이 나온 문화층의 연대가 400년과 480년이라 추정되었고 이후 그렇게 밝혀져 계양산성 유적이 4~5세기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또한 계양산성 논어 목간은 우리나라에 한자가 도입되고 유교가 수용되는 것을 입증해주는 가장 이른 시기의 실물로 유교사와 한문학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라 한다.
뿐만아니라 사료에 따르면 백제가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처럼 토성만 쌓았지 돌로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없어 그동안 논란이 계속되었는데, 계양산성에서 발견된 유물에 의하면 백제가 석성을 쌓았다는 것을 반증해 고고학적으로 굉장한 성과라고 한다.
인천의 진산이라는 계양산의 동쪽 능선(연무정)에 있는 '고산성'이라고도 불리는 계양산성은 그동안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만 알려져 왔었다. <증보문헌비고>,<관방성곽조>에 의하면 성둘레가 1,937보(步)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다.
계양산성 무분별한 등산로와 등산객의 발길에 훼손 중 위와같이 여러차례의 계양산성 발굴조사와 유적발견으로 1992년 5월 15일 인천광역시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된 계양산성(인천 계양구 계산2동 산8번지외 14필지)에 대한 고고학적 가치가 새롭게 평가(국가사적급)되었고 유적지에 대한 추가발굴, 보존, 복원이 시급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현재 한성백제시대의 석성으로 드러난 계양산성의 성곽 대부분이 심히 훼손되어 있고 성벽 일부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발굴작업 이후 계양산성 복원사업 안내문만 등산로와 팔각정 주변에 덩그러니 서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연무정에서 팔각정에 이르는 계양산성 주요 유적지는 오가는 수많은 등산객들의 발길에 의해 계속 짓밟히고 있다. 헐벗은 능선을 따라 오르는 등산로 곳곳에는 기와나 토기의 파편들이 나뒹굴 정도라고 계양산을 지키는 주민들은 말한다. 계양산성 동문 추정지 일대의 이름없는 묘지들과 그 사이로 난 등산로들 때문에 계양산성 유적들은 말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상태다.
국가사적에 가까운 유적지가 이렇게 훼손되고 있음에도, 지난 2006년 계양구(구청장 이익진)는 발굴작업 이후 1,000여기의 묘지파악을 마친 뒤 자료정리 작업 후 국가사적 지정 신청을 준비하겠다고 했으나 현재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한다.
관련해 계양산성 발굴 책임을 진 선문대 고고연구소장인 이형구 박사는 지난 2006년 이미 '중요한 유물이 많으면서도 기초자치단체에서의 지속적인 발굴과 복원이 불가능할 만큼 예산상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하고, '국가사적으로 지정받게 되면 국비가 70% 보조되므로 복원사업이 순조롭게 될 수 있을 것'이라 조언한 바 있다.
한편 계양산 목상동 일대 롯데골프장 개발과 관련해, 계양구가 계양산성의 국가사적 지정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는 지적과 비판도 있다.
아무튼 한성백제시대의 계양산성에 대한 복원작업이 언제쯤 다시 시작될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계양산성 유적을 짓밟고 가로지르는 등산로에 대한 정비와 개선이 시급한데 말이다.
그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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