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만에 만나 반갑다고, 21개월 된 딸아이가 나를 부른다. 내 다리에 매달려 안아 달라 한다. 어이쿠~녀석! 꽤 무거워졌다. 또래보다 많이 작은 편이지만 건강히 자라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런데 녀석이 참 재미난 소리를 한다. 나보고 자꾸 "고구마"를 달라는 것이다. 집에는 당연히 고구마가 없었기에 나는 '건희야~고구마 없는 데'라고 대답했다.
허허, 이런..
이젠 아주 울상을 짓기 시작한다.
그 때, 녀석이 고사리만한 손으로 식탁을 가리키며 가자고 한다. 식탁 위에는 귤이 담긴 흰 봉지가 있었다. 나는 '건희, 저거 먹고 싶어요?'라고 물었다.
녀석이 '응. 고구마 주해효'라고 대답한다.
순간 너무 어이가 없어 '엥?' 이라 소리내며 다시 물었다.
"건희 귤 먹고 싶어요?"
"네, 고구마 주해효"
라고 녀석이 대답한다. 나는 의아한 마음으로 귤 봉지를 내려 주었다. 그랬더니 녀석이 뛸 듯이 기뻐하며 연방 '고구마! 고구마!' 를 외쳐댄다.
하하, 이런.
녀석에게 "귤"은 "고구마"였던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 한참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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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귤을 고구마라고 가르쳐줬을까 귤을 보며 고구마라고 대답하는 딸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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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정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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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이번의 '귤'처럼 나는 모든 사물을 그동안 생각하고, 말하던 그대로만 여겨왔지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를 않아 왔다. 상상력이라고는 도무지 발휘되지 않는 무미건조한 삶만 계속 되어 오지 않았던가 라는 작은 깨달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 때는 그래도 그림도 곧 잘 그리고, 시도 써보려 하던 꿈과 낭만이 있던 나였지만 지금은 참 그렇다. 특히, 결혼 후 가장이란 타이틀을 안고 나니 좀 더 현실에 집중하게 되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상상력이 없는 아빠는 오히려 아이의 성장이나 가족의 행복에 해가 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말이다.
사람의 생을 아름답게 수 놓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추억"이란 녀석도 있고, 내일을 밝게 만드는 "희망"이란 녀석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데는- "열정"이나 "성실" 같은 요소도 중요하겠지만- 이번 일을 통해 나는 "상상력"이란 녀석도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나친 상상은 일상을 일탈하게도 하지만 적절한 상상은 새로운 아이디어의 원천이 되고, 일상을 더 재미나고, 색다르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하하. 이번에도 녀석 덕에 한 수 배웠다.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인생의 한수를 배워가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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