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5(목)일. 거센 북서풍, 맑고 간간이 눈발
귀덕해안도로→한림공원→신창해안도로→영락해안도로→대정→산방산→안덕계곡→열리해안도로→천제연폭포
술을 먹지 않고, 저녁에 일찍 자서인지 새벽에 눈을 떴다. 식사를 준비해야 하고, 이것저것 챙겨야 하는 부담 때문일 것이다. 새벽 5시30분에 아이들을 깨워 식사를 하고, 짐을 꾸려 아침 7시부터 길을 나섰다. 어둠이 밀려 나가기 시작하는 거리는 순하게 우리에게 길을 내줬다. 배낭과 자전거 뒤에 손전등과 반사경을 달았지만 밤과 낮이 교차되는 순간에 일어나는 교통사고는 매우 치명적이기에 긴장되는 순간이다.
1시간 정도를 달려 '한림공원'에 도착했다. 우리는 성탄절날 개장도 하기 전에 온 첫 손님이다. 여러 가지 식물, 분재, 용암굴, 수석, 새 등을 구경했다. 눈에 보이는 것마다 지극한 정성을 쏟고, 의미를 줘서 잘 가꾸어진 나무와 풍광이 아름답다. 관광산업이란 이런 것이다. 있는 것을 사람들이 와서 구경만 해도 어마어마한 이윤이 창출된다. 나무들이 죽기 전까지는 계속 돈이 쏟아질 것이다. 나는 분재나 수석에 더 관심이 가지만 아이들은 공작과 타조 등 움직이는 동물을 어르고, 어울리는 것에 더 신경을 썼다.
공원 안 민속촌 구경이 끝나갈 쯤 아이들이 배고프다며 먹을 것을 사줄 것을 요구했다. 돌아다녀 식욕이 당길 때쯤 음식 냄새가 풍겨왔고, 식당이 있었다. 이것을 입장객들의 호주머니를 자연스럽게 여는 과학적 합리성이라 해야 할까, 몰염치하게 돈만 생각하는 장삿속이라 해야 할까? 아침을 먹었기에 간단하게 요기를 하러 들어가서 비빔밥과 몸국을 한 그릇씩 비웠다. 몸국은 돼지 뼈를 고아 만든 국물에 바다풀인 까시리를 넣어 끊인 제주음식인데 아주 개운하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우리가 공원을 관람하는 동안 천주교 신자인
박용은 성탄미사를 드린다며 신창성당으로 먼저 갔다.
바람은 점점 거세져 검은 바다가 하얗게 변하는 장관을 연출했고, 옆에서 뒤에서 밀어주니 자전거 속도가 아주 빨라졌다. 우철이 자전거 뒷바퀴에 펑크가 났다. 타이어 한 부분이 지나치게 마모됐고, 튜브가 노출되어 지면에 직접 닿으면서 견디지 못한 것이다. 난감한 일이지만 계속 펑크를 때우면서 수리점이 있는 대정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3번 반복했다.
신창에서 박용을 다시 만났다.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의 장관을 즐기며 신창해안도로 절부암 근처의 풍차 위용을 보면서 빠른 속도로 길을 나아갔다. 다들 바다 풍경에 취하고, 뒤에서 밀어주는 바람의 위력을 즐겼다. 당산봉에서 차귀도가 보이는 자구내포구까지 가는 길은 바람을 정면으로 맞받아야 했는데, 내리막길임에도 애써 힘을 다해 페달을 밟아야 자전거가 앞으로 나갔다.
영석이는 자전거에서 내려 밀고 와야 했다. 자구내포구에서 수월봉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현무암 지층구조와 용천수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곳은 아님에도 바람 부는 날 바다 풍광을 보기 위해 자동차들이 몇 대 지나갔다.
영락해안도로를 지나다 배고프다며 점심 먹기를 채근하는 박용 때문에 '초원식당'에서 흑돼지오겹살에 밥을 먹었다. 아침부터 따지면 3끼를 해치울 만큼 열량소모가 많은 것이다. 대정에 도착하여 자전거를 수리하고, 마라도 배가 출항하는 선착장에 갔으나 풍랑주의보로 배가 묶여 있었다.
송악산과 산방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였다. 이제 제주 남쪽에 온 것이다. 송악산을 보며 언덕을 힘들게 달리는데 차들이 지나가며 소리와 손짓으로 응원해 줬다. 산방산에 오르는 길부터 숲섬이 바로 앞에 보이는 제지기오름까지 25km에 이르는 길이 오르내림이 심해 해안도로 일주 중 인내심을 요구하는 구간이다. 그만큼 구석구석에 절경도 많다. 산방산까지 심장이 터질 듯 숨차게 올라와서 여름에 들렀던 휴게소가게에서 국수와 막걸리를 먹었다. 음식이 아주 맛있고, 그만 달라고 할 때까지 귤이 계속 나온다. 주인이 친절하다.
안덕계곡을 지나 대평리에 이르는 길은 해안도로 일주 중 가장 긴 내리막을 제공한다.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시원하게 밀려오는 바다와 속도의 짜릿함을 즐기며 열리해안도로에 들어섰다. 질지슴해안은 검은색 바위를 검푸른 바다가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노랗게 열매가 맺힌 귤밭 뒤로 한라산 백록담이 하얀 모습으로 신성하게 보이는 전형적인 제주도 풍경을 볼 수 있다. 좋은 풍경은 가슴 깊은 곳에 삶에 대한 희열을 준다. 그 희열은 걸을 때 가장 크게 다가오고, 속도가 더해질수록 가벼워진다. 제주도 옛길을 걸어서 다니는 올레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났다.
서부하수처리장 앞의 오르막을 힘들게 올라 중문에 들어서니 날이 어두워졌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천제연폭포 주변에서 민박을 하고자 두 번을 들른 끝에 아이들과 나도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그린사이드펜션'에 짐을 풀었다.
마트에서 찬거리를 준비하여 다시 김치찌개에 밥을 달게 먹었다. 종우가 바로 잠에 빠지며 열이 심하다. 자전거주행능력과 체력이 좋아 항상 맨 뒤에 오면서 상황을 살폈는데, 오기 전부터 앓아온 감기가 지금 막바지에 이른 것 같다. 내일은 좀 나아지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내일 나가야 하는 박용과도 마지막 밤이다. 내일은 내 생일인데, 떠나고 남은 사람 모두의 무사함이 중요하다. 특히 아이들의 안전이 중요하다. 이틀을 잘 견뎠으니 남은 구간은 틀림없이 잘 해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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