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에 영화 한편을 봤다. 프랑스 루이 말(Louis Malle, 1932~95) 감독이 1987년에 발표한 〈굿바이 칠드런〉이란 영화였다. 제목에서 비치는 대로, 소년들이 나누는 슬픈 우정의 전말이 차가운 겨울 풍경 속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 원제 '오흐부아 레장팡'(Au revoir les enfants)은 같은 작별인사이긴 해도 '안녕, 또 보자'의 의미에 가깝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또 보자'의 함의가 무겁게 가슴을 짓누른다. 1944년 친독 괴뢰정부인 비시정권하의 프랑스가 영화의 역사적 배경이다.
열두살 소년 줄리앙은 빠리 근교의 가톨릭 기숙학교에 다니고 있다. '보네'라는 친구가 전학을 온다. 기숙사 옆 침대에서 생활하게 된 보네는 왠지 어둡고 다른 세계에 속한 느낌을 준다. 아이들의 짓궂은 괴롭힘도 묵묵히 받아낸다. 줄리앙 못지않게 공부도 잘하고 읽은 책도 많다. 피아노 선생님 앞에서 슈베르트의 피아노곡을 능숙하게 쳐내는 모습을 줄리앙은 창문 너머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루이 말 감독은 다가서고 물러나는 두 소년의 아슬아슬한 마음의 진동을 영화의 표면에 조용히 쌓아간다. 그 마음의 진동은 아직 어떠한 이름도 얻지 못한 채 막 태어나고 있는 연하디연한 감정의 결일 터인데, 끝내 보호받지 못하고 세상에 의해 잔혹하게 파괴될 그것에 제대로 된 이름과 애도가 도착하기까지는 수십년의 시간이 걸려야 한다. 사정은 이렇다.
1어느날 줄리앙이 보네의 사물함에서 알게 되는 것처럼, 보네는 유대인이었다. 본명은 장 키플스타인. 유대인 색출에 혈안이 된 게슈타포의 추적을 피해 기숙학교로 숨어들었던 것. 기실 기숙학교의 교장 장 신부님은 보네 외에도 몇몇 유대인 학생을 보호해오던 참이었다. 유대인? 줄리앙은 기숙학교를 같이 다니는 친형에게 묻는다. "형, 유대인이 뭐야? 왜 사람들은 유대인을 미워해?" "돼지고기를 안 먹는 사람들이지." "그게 무슨 죄야?" "유대인은 똑똑하고 위선적이고,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야." 줄리앙은 이해할 수가 없다.
1944년 1월의 어느날 아침, 수업중인 교실에 게슈타포가 들이닥친다. 누군가의 밀고가 있었고, 장 신부님은 이미 체포된 상태였다. 게슈타포는 한명 한명 학생들의 얼굴을 살핀다. 교탁 쪽에서 지도를 보다 갑자기 뒤돌아서는 게슈타포의 눈길에 놀란 줄리앙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보네 쪽을 바라보고 게슈타포는 보네를 향해 걸어간다. 보네는 책상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보네는 친구들에게 손을 건네 악수를 한다. 줄리앙도 그 손을 잡는다. 기숙학교는 그날로 폐쇄되고, 학생들은 짐을 싸서 학교 마당에 모인다. 장 신부님과 보네를 포함한 세명의 유대인 아이들은 친구들의 눈앞에서 독일군에 끌려 기숙학교의 좁은 문을 빠져나간다. 아이들이 외친다. "안녕, 또 봐요 신부님!" "안녕, 또 보자 아이들아!" 어른이 된 줄리앙의 내레이션이 들려온다. "보네, 네귀스, 뒤프레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장 신부는 마우타우젠 수용소에서 죽었다. 학교는 1944년 10월에 다시 문을 열었다. 사십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난 그 1월의 아침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는 여기서 멈춘다.
이 영화는 루이 말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 내레이션의 문장은 영화감독이 된 루이 말의 창작노트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렸고, 그는 그 내레이션을 자신의 육성으로 녹음했다. 그러니까 사십여년 만에 루이 말 감독은 그 겨울 아침의 시간으로 돌아가 영원한 작별의 순간과 다시 대면한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영화 창작이 누릴 수 있는 예술적 상상의 자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날 학교를 떠나 아우슈비츠와 마우타우젠 수용소에서 죽은 신부님과 아이들을 다시 만날 방법은 없다. "또 보자, 아이들아!"의 작별인사는 여전히 불가능한 소망으로 남는다. 영화는 그러므로, 또 한번 작별을 되풀이할 뿐이다. 그러나 이 무력해 보이는 반복의 자리에서 줄리앙과 보네의 우정을 파괴시킨 세상의 야만과 잔혹을 생각하고, 장 키플스타인으로 살 수 없었던 한 유대인 소년의 짧은 삶을 애도하는 것은 살아남아 어른이 된 줄리앙의 몫만은 아니게 된다. 극장을 나서며 나는 담배를 꺼내기 바빴고, 어린 줄리앙처럼 나도 간절히 묻고 싶었다. "유대인은 무언가?"
2어린 시절 어디를 가든 양키 아니면 튀기라고 놀림받던 아이가 있었다. 아이노코라고도 했다. 한국 사람처럼 생기지 않은 외모 때문이었다. 어떤가 하면,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짓는 평범하고 전형적인 한국 사람이었다. 탓을 하고 따지고 드는 아이에게 어머니는 말한다.
"하이고, 니가 아조 에미를 볶아묵는구나." (…) "어짜냐? 니 에미도 좀 놀짱한 기가 있제? 엄마가 뭔 숭한 짓을 했겄냐. 그란다고 우리가 널 어디 다리 밑에서 줏어왔겄냐. 분맹히 니는, 느그 아부지하고 나하고 하룻저녁에 맹근 잘난 내 새끼다." ― 전성태 「이미테이션」, 『문학과 사회』 2008년 겨울호 고등학생 때 이 아이는 아예 자신을 미국계 혼혈아라고 생각해버리기로 마음먹고 영어공부에 매진한다. 그러다 우연히 백인계 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한 혼혈인의 사연을 접하게 된 그는, 게리 워커 존슨이라는 그 혼혈인의 인생을 이름과 함께 온통 베끼기로 작정한다. 그는 지금 어린이 영어학원에서 게리 워커 존슨이라는 원어민 강사로 짝퉁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틈틈이 짝퉁 명품가방 장사를 하면서.
물론 이것은 작가 전성태가 비정상적인 영어교육 열풍이나 짝퉁 명품가방으로 상징되는 작금의 가짜 욕망의 세상을 비판하고 풍자하기 위해 빚어낸 허구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혼혈 아닌 혼혈인의 삶을 살아가는 게리 워커 존슨이라는 인물의 창조는 이 소설을 한갓 세태 풍자의 차원 이상으로 올려놓는다. 외국인과의 결혼이 더이상 낯선 일이 되지 않고,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사회의 주요 구성원으로 편입된 지 오래인 이즈음, 배제와 차별의 폭력으로 드러나기 일쑤인 단일민족이라는 순혈성에 대한 우리 안의 오래된 집착과 편견은 거듭 반성되어야 마땅하고, 이 소설은 그 지점을 에둘러 아주 섬세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 소설가 전성태씨를 안 지가 조금 된다. 술도 여러차례 마셨고 허물없이 농담도 한다. "전성태 씨는 아무래도 저 중동쪽 같아." "안 그래도 조상을 캐는 소설을 한번 써볼 작정입니다. 새로운 씰크로드가 발견될지도 모릅니다." 그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대답하곤 했다. 「이미테이션」을 읽으며 처음에는 웃다가 다 읽고는 담배 한대를 피워 물었다. 우연히 며칠 뒤 술자리에서 만났다. "소설 잘 읽었소. 정말 재미있데." "아, 자전소설 말이에요? 하하." 그의 웃음은 늘 상대를 편하게 한다.)
3장 키플스타인도 게리 워커 존슨도 자기 이름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키플스타인에게 닥친 참담한 비극과 같은 층위에서 비교하긴 어렵다 하더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가짜 인생의 옷을 입어야 했던 게리의 삶 역시 우리를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한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곳저곳 책들을 넘기다 보면 유대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론적인 대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서구문명에서 유대인은 가장 불편한 타자라는 이야기. 그리고 그 타자성이 견디기 힘든 이유는 그것이 서구문명 그 자신의 내부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외부의 타자성이 아니라 이른바 '그들(우리) 안의 타자성' 말이다. 유대인이란 서구문명, 혹은 서양인의 삶에서 가장 외설스럽고 더럽고 불편한 그 무엇이며, 그들 자신의 텅 빈 실재, 비존재를 상기시키는 흉물이라는 것. 그런만큼 그 타자성은 끊임없이 배제되고 삭제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그리고 그 배제와 삭제를 '최종적 해결'인 '절멸'의 방식으로 수행한 것이 바로 나치였다. 얼마나 우울한 이야기인가.
하긴 혼혈의 생김새 때문에 괴롭힘을 당한 뒤, 세상의 구획 바깥으로 걸어나가 비참한 가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게리의 경우가 아니라도 불편하고 쓸모없는 타자에 대한 배제의 이야기는 지금 이곳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가령, 구제금융사태 이후 일상어처럼 되어버린 '구조조정'이란 말은 얼마나 무서운가. 경제적 효율과 강자생존의 절대적 기준이 요구하는 신성한 구조가 새로이 구축되는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퇴출되고 쫓겨난다. 그들은 무능하거나 게으르거나 나이가 많거나 능력 이상의 임금을 받거나 등등의 이유로 새로운 구조에서는 불필요한 군살이며 가급적 사라져주어야 할 존재들일 뿐이다. 그런데 이 경우, 그 대단한 새로운 구조가 한국경제를 살리고 한국을 선진화하는 동안,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순진한 소리라고? 그러나 나는 문명이 숨기고 있는 '피의 번제(燔祭)'를 모를 정도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냉혹한 현실에 맹목일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다. 민주주의는 바로 그 냉혹한 세계 속에서 진전되고 확대되어왔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다.
가장 혹독한 한 해가 될 거라고 한다. 경제정책을 책임진 정부의 고위관료는 지금의 일자리에서 살아남는 게 관건이며 강자만이 살아남을 거라고 무시무시한 말을 쏟아낸다. 다시 한번 묻자. 그렇다면 우리, 무능한 약자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덧붙이는 글 | 정홍수 기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창비주간논평에서 제공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