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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작가는 노희경이다. 어지럽게 진열된 숱한 책 가운데서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를 집어 드는데 더 이상의 이유는 필요 없었다.

 

<거짓말> <꽃보다 아름다워> <굿바이솔로> 그리고 최근 종영한 <그들이 사는 세상>까지. 드라마 작가로 친숙한 노희경의 에세이라니. 마음 단단히 먹고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무도 몰래 가슴 깊이 묻어둔 그 무언가를 덤덤하면서도 예리하게 건드리는 그의 솜씨에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죄, 하나

 

노희경 에세이-지금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
노희경 에세이-지금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 박창우

책 제목처럼 작가 노희경은 첫 페이지에서부터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에게 외친다. 당신들은 죄인이라고. 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했으니, 죄명은 '사랑 유기죄' 정도? 국경을 뛰어넘거나 나이를 초월해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한 것도 아닌데(물론 그런 사랑이 죄라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지 않는 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이라니. 누군 죄인이 되고 싶어서 됐냐고...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 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 노희경,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中

 

어쨌든 난 죄인의 심경으로 글을 읽어 내려갔다. 노희경의 말대로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

 

죄, 둘

 

노희경의 청춘은 아름답지 못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십대였던 그의 머릿속은 죽고 싶다는 생각, 내 자신이 쓰레기 같다는 생각,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 빨리 학교를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찼다.

 

이십대는 담배를 피울 수 있게 되고 연애도 하면서 마음대로 학교를 땡땡이 칠 수 있게 돼 그나마 좀 나았지만 애인은 떠나고 친구는 비웃고, 지도교수로부터는 엉망이란 말을 들어야했다. 졸업 후에는 푼돈을 받으며 회사 생활을 했고, 상사가 마음에 안들거나 혹은 동료가 마음에 안들어 우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회사가 망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노희경 나이 스물다섯. 목표의식 없이 방황하던 청춘은 어머니가 위암말기 판정을 받으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노희경의 어머니는 말했다.

 

"네가 뭘 못해? 하면 되지. 해보고 말해, 해보지도 않고 말로만 말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회사를 접고 드라마작가가 되기까지는 1년 반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노희경은 요즘 청춘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나는 나의 가능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아! 나는 길지도 않은 인생을 살며 해보지도 않은 주제에 스스로 한계선을 그어놓고 슬그머니 발을 뺐던 적 얼마나 많았던가. 한계를 모르면 주저하게 되지만, 가능성을 모르면 도전하게 된다. 내가 몰라야 됐던 것은 내 한계가 아닌 바로 가능성이었는데…. 여기서 자유로운 청춘, 얼마나 될는지.

 

죄, 셋

 

당신은 만약, 지난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적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젊고 건강했던 청춘으로? 아니면 동심이 가득했던 유년기?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기 전? 부모님을 잃기 전?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고, 살아온 인생이 다르기에 위 물음에 대한 대답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물론 지난날이 너무 싫어서 혹은 현재에 너무 만족해서 지난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당신이 돌아가고 싶은 그때로 가져갈 수 있는 게 하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고 싶은가?

 

돈? 지위? 명예? 아니면 애인? 자동차? 집?

 

글을 쓰는 와중에 내 마음에 또 다른 내가 묻는다.

"너 다시 정말 지난날로 돌아가고 싶으냐?"

"그거는 아니고!"

강하게 부정한다. 지금이 좋다. 불효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매일 부표처럼 떠다니는 나를 기다리기 위해 동네 어귀 가로등에 기대 한숨지었을 어머니를 죄스러워 다시는 보고싶지 않다.

 

다만, 단서가 붙는다면, 아름다운 상상이 가능하다면, 지금처럼 철들고 지금처럼 부모 소중한 걸 아는 마음으로, 바로 이 순간부터 생(生)을 다시 시작한다면, 물론…. OK다. 두말할 나위 없이 두 손 들고 OK다.

 

또 다시 죄를 지은 느낌이다.

 

책은 다시금 초심으로 돌아가 글을 쓰고자 하는 작가의 다짐과 함께 몇몇 배우들이 책을 읽고 전하는 메시지를 끝으로 마지막장에 다다른다. 드라마 같았던 그녀의 인생. 하긴, 누구의 인생인들 드라마 같지 않으리.

 

다음 작품에서는(드라마가 됐건 글이 됐건) 그가 인도하는 조금 더 드라마틱한 인생을 만나보고 싶다. 그러기 전에 급한 것은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에서 벗어나는 길 일 테지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선샤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지음, 김영사on(2008)


#노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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