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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독립국으로 존재하기를

 

.. 콘라트 로렌츠가 이 편지를 쓰기 정확하게 2주 전에 오스트리아는 독립국으로 존재하기를 포기했다 ..  《클라우스 타슈버,베네딕트 푀거/안인희 옮김-콘라트 로렌츠》(사이언스북스,2006) 110쪽

 

 이 자리에서는 ‘정확(正確)하게’보다는 ‘바로’나 ‘꼭’이 잘 어울립니다. ‘포기(抛棄)했다’는 ‘그만두었다’로 손봅니다. “2(二)주 전(前)에”는 “두 주 앞서”로 손질합니다.

 

 ┌ 독립국으로 존재하기를 포기했다

 │

 │→ 독립국으로 남기를 포기했다

 │→ 독립국으로 있기를 그만두었다

 │→ 독립국으로 이어가기를 그만두었다

 └ …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싸움이 터지기 앞서, 오스트리아는 주권이 따로 있는 나라, 이른바 ‘독립국’으로 있지 않고, ‘독일과 하나가 되겠다’고 했답니다. 그러니 “독립국으로 있지 않겠다”나 “독립국이기를 그만두겠다”나 “독립국보다는 합병을 바란다”처럼 풀어서 쓴다면 한결 알아보기 좋습니다. 한결 알아보기 좋도록 쉽게 쓰면, 얄궂은 말이 끼어틀 틈이 없습니다. 얄궂은 말이 끼어들 틈이 없으면, 똑같은 뜻과 생각을 나누면서도 우리 말 살림과 문화를 북돋울 수 있습니다.

 

 

ㄴ.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는 존재

 

.. 더러운 것을 몸에 지닌 걸인을 만져서는 안 되고, 쫓겨난 사람이기 때문에 동네에 들어와서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어린 우리는 알게 모르게 배웠다 ..  《안치운-옛길》(학고재,1999) 188쪽

 

 우리 말 ‘거지’를 알뜰하게 쓸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거지’를 한자로 담아내는 ‘걸인(乞人)’ 같은 낱말을 안 볼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

 │→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는 사람임을

 │→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됨을

 └ …

 

 이 자리에서 ‘존재’는 ‘있지’ 않아도 되는 낱말입니다. 있을 구석이 없는 낱말이라고 할 수 있고, 넣을 까닭이 없는 낱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쫓겨난 존재이기 때문에

 └ 쫓겨난 사람이기 때문에

 

 ‘존재’를 앞쪽에 넣으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해도 말이 된다고 느껴지지 않나요. 그러면, 뒤쪽에 쓰인 ‘존재’를 ‘사람’으로 고쳐 보셔요. 이렇게 해도 말이 된다고 느껴지지 않나요.

 

‘사람’으로 적을 때와 ‘존재’로 적을 때는 무엇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우리는 왜 말느낌이 달라진다고 생각할까요. ‘사람’으로 적으면서 그때그때 말느낌을 달리할 수 없을까요. ‘존재’든 ‘사람’이든 모두 덜어내면서 말느낌을 짚어 나갈 수 없을까요.

 

 

ㄷ. 고마운 존재

 

.. 그 바람에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도 하지만, 기업에는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모른다 ..  《전태일기념사업회 엮음-전태일 통신》(후마니타스,2006) 249쪽

 

 말뿌리가 아무리 얄궂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두루 쓰고 있는 말이라 한다면, 안 써야 좋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말을 주고받는 우리들은, 좋다고 할 만한 말을 두루 퍼뜨리며 즐겁게 쓰는 사람들인 한편, 얄궂다고 할 만한 말을 아무 생각 없이 함부로 쓰며 퍼뜨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사회를 좋은 쪽으로 고쳐 나가는 힘은 바로 우리들한테서 나오는 한편, 우리 사회를 얄궂은 쪽으로 굴러떨어뜨리는 힘 또한 바로 우리들한테서 나옵니다.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우리 아버지는,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바르고 고운 말을 쓰라고 이야기를 하셨을는지 모르지만, 정년퇴임을 한 뒤까지도 ‘오라이’나 ‘엥꼬’나 ‘빠꾸’ 같은 말을 버리지 못합니다. 한 번 몸에 배고 입에 익숙해진 말이라 떨구기 어렵다고만 말할 일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생각을 삶으로 옮겨야 하고, 옳다고 말하는 생각이라면 마땅히 삶으로 녹여내어 펼쳐야 합니다.

 

 ┌ 기업에는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

 │→ 기업에는 얼마나 고마운지

 │→ 기업에는 얼마나 고마운 녀석인지

 │→ 기업에는 얼마나 고마운 동무인지

 │→ 기업에는 얼마나 고마운 물건인지

 │→ 기업에는 얼마나 고마운 돈보따리인지

 └ …

 

  사람을 가리킬 때에도 쓰고, 물건을 가리킬 때에도 쓰는 ‘존재’입니다. 보기글에서는 ‘같은 한자말을 쓰더라’도, “고마운 수단”이나 “고마운 도구”나 “고마운 물건”처럼 적어야 알맞습니다. 조금 더 마음을 기울여 줄 수 있다면, “고마운지”라고만 적을 테고, 느낌을 살리면서 “고마운 녀석인지”처럼 적어 볼 수 있어요. 슬그머니 비꼬는 마음이라면, “고마운 돈보따리인지”처럼 적어도 됩니다. 그렇지만, ‘존재’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이런저런 말 다듬기는 그저 부질없는 헛놀음으로 느껴지리라 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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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한자#우리말#우리 말#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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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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